지난 호에 이어 이번 호에서는 현존하는 전국의 돌다리를 찾아가고자 합니다. 삼국유사 <도화녀 비형랑> 편에는 '귀교(鬼橋)'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다리의 감독관은 '비형(鼻荊)'이라는 자인데 아버지 진지왕은 저승세계의 귀신이요, 어머니 도화녀((桃花女)는 이승세계의 생모이므로 비형은 반신랑(半神郞)의 독특한 신분입니다.
비형은 밤이면 귀신들과 어울려 수작을 부리곤 했는데 이를 안 진평왕이 비형으로 하여금 신원사 북쪽 개천에 돌다리를 놓도록 명령을 하지요. 아니나 다를까 그는 하룻밤 사이에 귀신의 무리들을 거느리고 다리를 완성하고 맙니다. 기록상 우리나라 최초의 돌다리는 바로 귀신들이 만들었던 것입니다.
불가의 다리
불가(佛家)에서는 세상의 중심에 수미산이 우뚝 솟아 있다고 합니다. 그 수미산에 부처님이 계십니다. 인간들이 수미산에 가려면 8산9해(八山九海)를 넘어야 겨우 수미산 어귀에 이르게 되고 그 수미산을 사천왕을 비롯한 여러 권속들이 빈틈없이 지키고 있습니다. 절집들이 깊은 산중에 입지한 경우가 많은 것은 척불(斥佛)이나 고유의 산신신앙과도 관련이 있지만 그보다 수미산을 중심으로 한 불교의 우주관이 앞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산속에 있는 절들은 대개 계곡을 끼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필연적으로 다리를 건너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과정은 물을 건넘으로써 차안(此岸)의 세계에서 피안(彼岸)의 세계로 접어들고 해탈, 극락의 세계로 진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가에서는 '월천공덕(越川功德)'이라 하여 다리를 놓는 행위를 수행의 과정으로도 봅니다. 다리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을 도와 복전(福田)을 확보함으로써 깨달음에 더 빨리 이를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수행자인 스님들이 월천공덕으로 쌓은 다리 중 대표적인 다리가 벌교에 있는 ‘홍교(虹橋)’입니다. 벌교(筏橋)라는 지명은 옛날에 뗏목다리가 있어서 불린 이름입니다. 조선 숙종 44년(1705)경에 선암사의 초안선사가 이 다리를 놓았다고 하며 영조 13년(1737)에 개축하면서 3칸의 무지개다리를 만들었습니다. 특히, 다리의 내력이 담긴 석비가 많이 남아있어 그 가치를 높여주고 있습니다.
과학과 미학의 조화 - 무지개다리
무지개다리를 ‘홍예교(虹霓橋)’라 일컫습니다. 주로 궁궐이나 사찰 다리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그 견고함과 아름다움을 자랑합니다. 석재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무지개 모양으로 양쪽에서 쌓아가다 최종적으로 이맛돌[key stone]을 끼우면 완성됩니다. 홍예교의 견고함은 바로 이 이맛돌에서 비롯하는데 이맛돌이 빠지지 않는 한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한 위에서 가하는 힘을 좌우로 분산시키기 때문에 붕괴 위험이 거의 없습니다. 이런 과학의 힘에다 선경(仙境)에나 등장할 듯한 미학이 조화를 이룬 쾌거라 하겠습니다.
무지개다리라 하면 보물 제400호 선암사 ‘승선교(昇仙橋)’를 많이 떠올립니다. 승선교의 아름다움은 뒤에 배경으로 따라오는 강선루(降仙樓)가 있어서라고 생각합니다. 신선이 타고 오르는 무지개다리와 신선이 내려와 머문다는 집의 조화가 있기에 그 아름다움이 더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토함산이 있기에 함월산이 있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강원도 고성 거진에 자리한 건봉사에도 ‘능파교(凌波橋)’가 있습니다. 대웅전 지역과 극락전 지역을 연결하는데 숙종 30년(1704)부터 숙종 33년(1707) 사이에 처음 축조되었다고 합니다. 그 규모는 폭 3미터, 길이 14.3미터, 다리 중앙부의 높이는 5.4미터이며, 다리의 중앙부분에 큰 아치를 틀고 그 좌우에는 장대석으로 축조하여 다리를 구성하였는데 보존상태도 양호하고 우리나라 돌다리의 아름다운 조형미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경남 창녕 땅 ‘영산 만년교(萬年橋)’는 이전의 나무다리가 가진 불편함을 없애고 천 년 동안 변하지 않는 돌로 다리를 만들어 오랫동안 보존하자는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특히, 반원형 홍예는 영산 석빙고가 자리한 상류에서 흘러오는 개천과 어울리면 완벽한 원을 만들어 가히 환상적입니다. 조선시대 1780년에 석공 백진기가 가설하고, 1892년 4월에 영산현감 신관조가 석수 김내경을 시켜 다시 지었습니다. 전남 여수의 흥국사 홍교, 강진의 병영성 홍교와 진도 남박다리 또한 무지개다리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돌을 나무처럼 잘라 뚝딱뚝딱
전라남도 함평군과 나주시를 가르는 고막천 위에 놓인 고막천 석교는 현지인들이 ‘똑다리’ 또는 ‘떡다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고려 원종 14년(1723)에 무안 승달산에 있는 법천사의 도승 고막대사가 이 다리를 눈 깜짝할 새에 도술로 ‘똑딱똑딱’ 하여 ‘떡하니’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다리가 있는 고막리는 행정구역으로 함평군 학교면에 속합니다. 고막마을이야 고막대사에서 유래한 마을 이름인 것은 추론할 테고 학교란 지명이 재미있지요? 학교(鶴橋)는 ‘학다리’를 말합니다. 삽교(揷橋)를 ‘삽다리’라고 이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 다리는 무지개다리와는 달리 돌을 나무 다루듯 잘라서 교각 및 상판으로 꾸민 목조건축물의 양식을 보이는 돌다리입니다. 지난 2001년도 보수공사시 바닥 기초 나무 말뚝의 연대를 측정한 결과 최소한 고려 말, 조선 초로 밝혀져 축조연대가 상당히 오래된 돌다리임이 증명되어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나주평야가 인접하여 한 때 각종 물산을 실은 수많은 배들이 드나들던 번화한 곳이었습니다. 지금은 그 화려함을 잃었지만 조수간만의 차와 홍수 등 모든 악재를 이겨내고 수백 년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1980년에 고막마을 사람들이 세운 유적비에 이 다리에 대한 향수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 서술컨데 이 석교는 옛날의 국도가 나주함평의 군계(郡界)를 흐르는 고막천을 통과하는 데에 가설된 것인데 철도와 신도로가 석교의 바로 전방에 개통된 1910년대만 해도 영산강을 오르내리는 선박들이 바로 교하(橋下)에 정박되어 있었음으로 미루어 그가 교통산업상 중요한 일역을 담당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고도화되는 문명으로 급속히 변모되는 세태는 석교로 하여금 그 무거운 짐을 후배 교량들께 물려주게 하였으니, 이제는 면전에서 들리는 갖가지 차량의 경적과 굉음을 푸념삼아 귀에 익히며 볏단을 나르느라 조심스레 아끼며 밟고 지나가는 농부의 발자국에도 긍지와 애착을 느끼고 그것으로써 자위 자족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승지(勝地)는 불멸일세. 이 석교가 고려조 이래 수백 년간에 쌓아올린 공적과 아울러 고막스님의 이름은 고막마을과 고막강으로 흐르는 강물의 영원함과 같이 언제까지나 이 나라 이 고장을 지켜보리라….
한편, 충청도 옥천 땅에 있는 ‘청석교(靑石橋)’도 목조건축 양식을 볼 수 있습니다. 바닥에 긴 장대석을 놓고, 그 양 끝에 네모진 돌기둥을 세워 교각(橋脚)을 만들고 그 위에 넓고 긴 상판석을 얹어 두었습니다. 고려 시대 강감찬 장군이 이곳을 지나다가 모기 때문에 백성들이 괴로워 하고 있음을 보고 모기에게 호령을 하여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원래 군북면 증약리에 있었는데, 보존상의 이유로 지난 2001년 4월 옥천 향토전시관 앞 인공못에 박물(博物)이 되어 서 있습니다.
근대화에 제 할일을 잃어도
미내다리[渼奈橋]는 금강지류인 강경천에 자리해 있습니다. 옛 비문에 의하면 강경의 석설산과 송만운이 처음 발의하고 주동이 되어 모금한지 일 년도 되지 않아서 관의 힘을 빌리지 않고 다리를 완성하였다고 하네요. 특히 이 작업에는 승려들이 협조해 주었다고 합니다. 원래 나무다리가 있었는데 조수가 물러가면 바위가 보인다 하여 ‘조암교’ 혹은 ‘미교’라고 일러오다가 조선 영조 7년(1731)에 지금의 다리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지금 이 다리를 찾으면 다리가 냇가를 가로질러 있는 것이 아니라 강경천의 물줄기와 평행하게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다리가 물길과 평행하게 놓여 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논산문화원 관계자의 답변을 듣고야 수긍이 되었습니다. 1931~1932년 일제강점기에 높은 제방을 쌓아 하천정비를 하는 과정에서 당시 여럿이던 물길을 정비하면서 다리 아래로 흐르던 물길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인근 원목다리[院項橋]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목다리는 물길을 가로질러 제 위치에 있지만 하천정비로 인해 하천의 폭이 넓어지면서 현재 다리로는 물이 들지 않고 옆으로 물이 흘러갈 뿐입니다. 다리로서의 기능을 상실해 버린 것이죠. 식량의 보고인 금강유역을 넘다들며 수많은 사람들이 오갔을 미내다리와 원목다리는 자신보다 훨씬 키 큰 제방 아래에 웅크린 채 옛 영화를 추억할 뿐입니다.
투박한 막돌이 모여 미려한 농다리가
‘생거진천(生居鎭川)’은 충북 진천 땅이 살기가 좋은 고장임을 은근히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 진천 땅 세금천에 ‘농다리[籠橋]’라고 불리는 돌다리가 있습니다. 지역 향토지에 따르면 고려시대 임연장군이 그의 전성기에 고향마을에 쌓았다고 하는데 기록으로 보았을 때 현존 최고의 석교라 해도 무방할 듯합니다. 그런데 이 다리의 축조 연대가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논란이 된 적이 있습니다. 태권도 공원을 유치하기 위해서 과열경쟁을 벌이다 보니 진천이 김유신의 탄생지라는 점을 부각시키는 과정에서 이 농다리가 김유신의 아버지인 김서현 장군이 고구려로부터 낭비성을 되찾을 때 가설한 다리라고 주장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던 것입니다.
하류에는 굵직한 돌을 바닥에 깔았는데 상류로부터 몰려오는 물살의 저항을 1차적으로 줄이는 역할을 해줍니다. 그 길은 또한 소와 같은 가축들이 지나갈 수 있는 통로로도 활용됩니다. 항공사진을 통해 본 전체적인 생김새는 수심이 깊은 곳은 하류 쪽으로 돌출해 있고 수심이 얕은 곳은 상류 쪽으로 주춤한 곡선형입니다. 마치 교각과 판석이 어울려 배다리[舟橋]의 모습을 보는 듯하고 혹은 지네가 몸을 비틀고 있는 듯합니다.
특히, 붉은 빛이 나는 사력암질의 돌들은 다른 다리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멋을 풍기는데 결코 단단하지만은 않은 것 같은 돌의 재질로 보아 장구한 세월을 견뎌온 것이 신기할 뿐입니다. 제대로 정련되지 않은 투박한 막돌이 모여도 이렇게 미려한 돌다리가 만들어지는구나, 농다리에 가면 새삼 길들여지지 않은 것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수한 형태의 돌다리
화성의 아름다움 중에서도 특히, 화홍문 및 방화수류정과 용연이 함께 어울린 풍광은 ‘용지대월(龍池待月)’이라 하여 화성의 백미라 일컫지요. 이중 화홍문은 본래 수문다리의 역할에다 건축물의 용도를 더한 대표적인 누교건축물(樓橋建築物)입니다. 화홍문의 홍예는 모두 7칸인 데 일곱 색깔 무지개를 형상화한 듯합니다. 수문을 통해 쏟아지는 물보라에서 피어나는 무지갯빛을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 하여 수원팔경의 하나로 치고 있습니다.
3보사찰의 한 곳인 순천 송광사에서는 누교건축을 두 군데서 볼 수 있습니다. 절로 들어가는 초입에 계곡을 가로질러 ‘청량각(淸凉閣)’이 있습니다. 이 다리를 지날 때면 아래로 조계산의 맑은 물과 정기가 흘러 청량감이 몰려옵니다. 또 한 곳은 대웅보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건너야 하는 ‘삼청교’라는 무지개다리와 그 위에 세운 ‘우화각’입니다. 우화각은 18세기 초의 건물인데, 입구 쪽은 팔작지붕이고 나가는 쪽은 맞배지붕을 하는 특이한 양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불국사에 있는 연화교(蓮華橋)와 칠보교(七寶橋), 청운교(靑雲橋)와 백운교(白雲橋)는 국보로 지정된 계단형 다리입니다. 2단의 석단(石壇)과 함께 축조되었으며 연화교와 칠보교를 지나면 안양문(安養門)을 통하여 극락정토에 들어갑니다. 청운교와 백운교를 지나면 자하문(紫霞門)을 통하여 불국토에 들어갑니다. 계단 형태의 돌다리를 건넘으로써 극락과 불국토라는 피안(彼岸)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깨끗한 청계천을 기원하며
청계천 복원을 둘러싸고 말이 많습니다. '맑은 물'이라는 청계(淸溪)를 복원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인데 맑지 못해 한몫 챙기려는 자들이 있어 말썽입니다. 깨끗한 정치는 깨끗한 교육이 있을 때 필요하지 않을까요. 다음 호는 옛 다리를 찾아가는 마지막 여행으로 청계천을 중심으로 한 서울지역의 옛 다리를 만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