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전에 도입된 ‘윈-윈’ 전략
오늘날 기업경영에서 금과옥조처럼 강조되는 ‘윈-윈(win-win)’ 전략은 이미 500년 전에 우리 선조들의 자녀교육에서 강조되었다. 수백 년 전 선조들은 삶의 주도적인 원리로 ‘상호 이익을 도모하라’는 인간관계 기술의 핵심원리를 가르쳐왔던 것이다. 이는 조선 최초의 ‘여중군자(女中君子)’를 며느리로 두었던 운악 이함 가문의 ‘지고 밑져라’라는 가풍에서 대표적으로 엿볼 수 있다. 이는 ‘대접 받고 싶거든 먼저 대접을 하라(마태복음 7장 12절)’는 성경구절을 연상케 한다. 이 구절은 세계 최대 부자들을 배출한 유대인들의 자녀교육에서 고전으로 통하는 바로 그 율법이다.
삼보컴퓨터를 창업한 이용태 박사(박약회 회장, 퇴계학연구소 이사장)는 이 가문의 17대 종손이다. 이 박사의 할아버지는 당시 어린 손자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과 사귀거나 일을 할 때는 네가 지고 밑져야 한다”고 반복해서 가르쳤다고 한다. 요즘 사람들은 흔히 “남을 밟아야 내가 산다”고 생각하는데 이 박사의 할아버지는 그와 정반대로 가르쳤던 것이다. 이 박사는 ‘지고 밑져라’ 가풍을 기업 경영에 적용해 위기를 극복한 적이 있다고 한다. 알려진 대로 이 박사는 한때 학원재벌로 통하기도 했다. 1970년에 동업자와 함께 학원을 개업했는데 몇 차례 위기를 겪다 급기야 문을 닫아야 하는 기로에 놓였다.
그는 궁리 끝에 동업자에게 “학원을 계속 운영하려면 추가 증자를 하거나 빚을 얻어야 한다. 이 빚은 모두 내가 책임지겠다”는 단안을 내렸다. 이 같은 결정에는 “남과 더불어 일할 때는 희생하고 손해도 볼 줄 알아야 결국 서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할아버지의 교훈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자 동업자는 그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고, 그가 하는 일에 협력을 아끼지 않는 분위기가 싹텄다. 결국 학원은 크게 성공해 장안의 명문으로 떠올랐다. 이 박사는 80년대에 삼보컴퓨터를 우리나라 IT업계의 선두주자로 일구었지만 자금난을 겪다 경영에서 손을 떼야만했다. 이 역시 역설적으로 ‘지고 밑져라’ 가풍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3대에 걸쳐 영남 대표하는 학자 배출
재령 이씨 운악 이함(영해파, 1554~1632) 가문은 석계 이시명(1590~1674)이라는 학자를 배출하면서 명문가로 도약하기 시작했다. 운악 종가는 의령현감을 지낸 이함에 이어 석계 이시명갈암 이현일밀암 이재 등 3대에 걸쳐 퇴계학맥을 잇는 대학자를 배출해 영남의 명문가로 자리를 굳힐 수 있었다. 이들은 영남에서 높은 벼슬보다 더 존경받는 대유학자로 우뚝 섰다. 운악 이함은 56살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한 특이한 이력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운악의 며느리인 정부인 장씨를 주인공으로 그린 이문열의 소설 〈선택〉에는 운악 이함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운악은 임진왜란으로 왜구가 침공하자 집의 창고를 풀어 굶주린 주민들에게 나누어주었고 군수 물자를 조달하는데 앞장섰다고 한다.“공이 창고를 풀어 기민(飢民)을 먹인다는 소문이 나자 부황난 사람들이 문간이 비좁도록 몰려들었다. 또 물자를 명군에 조달했다. 그 공으로 벼슬길에 들어서게 되자 나라가 어려울 때 세운 작은 공로에 의지해 벼슬살이하는 걸 구차하게 여기신 공은 마흔일곱의 연세도 늦다 아니하시고 과거에 응하셨다. 그만큼 당신의 학문에 대한 믿음도 있으셨을 것이다…(중략)… 복시(覆試)를 당당히 지나신 공은 선조 임금께서 친히 임하시는 전시(殿試)에 이르러서도 막힘이 없었다. 정대(庭對, 대과의 최종 시험인 전시에서 답하는 책문)의 말을 올리는데 그 뜻이 매우 간절하고 곧아서 감탄한 시관(試官)이 장원으로 뽑고 임금께 올렸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책문을 보신 선조가 공이 장자의 말을 인용했다 하여 과방(科榜)에서 이름을 빼게 하고 파직까지 명하셨다. 그 뒤 여러 해 공은 벼슬 없이 지냈으나 선조 36년에 다시 대신의 추천이 있어 의령현감으로 나가셨다. 그러다가 선조가 돌아가시자 공은 다시 한 번 과장(科場)을 찾으셨다. 광해군 원년 공은 쉰여섯의 연치(年齒)로 문과에 급제(합격)하시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그때 이미 공은 벼슬살이가 싫어지셨고 광해조의 난정이 조짐을 드러내자 미련 없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셨다.”(89~95쪽) 운악은 선조 때 장자의 말을 인용해 과거시험에 불합격된 토정 이지함처럼 그 역시 불합격 당한 것이다.
선조는 장자를 무척 싫어한 것 같다. 당시 선조는 “유교경전에도 인용할 말이 많은데 어찌 장자의 밝지 못한 내용을 인용하느냐”며 토정을 불합격시킨 적이 있었는데 운악 역시 토정과 같은 신세가 된 것이다. 그렇지만 운악은 이에 굴하지 않고 무려 56살에 과거시험에 다시 도전해 합격했다. 이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자녀교육에 귀감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운악은 벼슬길에 나아가기 위해 과거시험에 다시 도전한 것이 아니라 선조에 의해 억울하게 낙방했기에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한 방편이자 자녀들에게 귀감을 보이기 위해 다시 과거에 나섰을 것이다.
조선 최초로 ‘여중군자’ 칭호 받아
석계는 운악의 셋째 아들로 퇴계의 정통 학맥을 이은 인물인데, 병자호란 때 나라가 치욕을 당하자 경북 영양 석보에 은거하며 살았다. 이 가문은 석계에 이어 그의 아들 갈암 이현일, 갈암의 아들 밀암 이재 등 3대에 걸쳐 퇴계학맥을 잇는 학자를 배출하면서 영남의 명가로 우뚝 서게 된다. 여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로 석계의 부인인 정부인 장씨(1598~1680, 아들인 갈암 이현일이 대사헌과 이조판서를 지내 정부인의 품계를 받음)가 회자되고 있다. 계모로 들어와 전처소생의 1남2녀 등 모두 7남3녀를 키운 장씨는 효행, 학문, 예술 등을 고루 갖춰 신사임당에 버금가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상은이 쓴 〈사임당의 생애와 예술〉이란 책 서문에도 정부인 장씨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우리 역사상에서 가장 모범적이요 대표적인 부인 한 분을 말하라 하면, 두말없이 율곡선생의 어머님 사임당 신씨 부인을 내세울 것이요, 혹시 어진 어머니를 말하라 하면, 저 신라 때 김유신의 어머니 만월(萬月), 또 어버이에게 효도한 여성을 헤아린다면 신라 때 지은(知恩), 그리고 다시 학문이 높고 시문에 능한 부인을 찾는다면 고구려의 여옥(麗玉), 글씨를 잘 쓰시었던 경당 장흥효(敬堂 張興孝)의 따님 장씨 같은 이들을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장씨는 퇴계 학맥을 이은 경당의 외동딸로 아버지에게 〈소학〉 등을 배워 시문과 경사에 능했다. 그렇지만 여성으로 벼슬길에 나갈 수 없었던 장씨는 집안에서 그 역할을 찾았다. 특히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고 있던 석계에게 후진양성에 힘쓸 것을 적극 권유했다고 한다. 자칫 산촌에 은거하며 여생을 보낼 수 있었던 석계는 부인의 내조에 힘입어 학자로서 거듭났을 뿐만 아니라 자녀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장씨는 아버지와 남편, 아들과 손자 등 4대에 걸쳐 정통 퇴계학맥을 잇게 한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소설가 이문열은 바로 석계의 넷째 아들인 항재 이숭일의 12대손이다. 그는 <선택>에서 이문열 자신을 있게 한 장씨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그리고 있다.
자신의 재주 숨긴 채 명문가 이뤄
장씨는 조선조 500년을 통틀어 유일하게 ‘여중군자’ 소리를 들었던 여성이다. 당시 사대부들이 이름도 불려주지 않았던 여성에게 그들의 이상형인 군자 칭호를 부여한 것은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가문경영에 일가를 이룬 장씨를 현대 기업경영에서 보자면 최고의 인재를 키워낸 뛰어난 ‘인재전략 컨설턴트’로 금녀의 벽을 뛰어넘은 최초의 여성 CEO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인 장씨는 문화관광부에서 시(詩), 서(書), 화(畵)에 능하고 자녀 교육에 귀감을 보였다며 ‘이달의 문화인물(1999년 11월)’로 선정하기도 했다. 장씨의 아버지 경당은 퇴계의 수제자인 학봉 김성일의 학맥을 잇는 유학자로 장씨를 직접 가르쳤다. 무남독녀로 부친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란 장씨는 남자로 태어났다면 입신양명에 나설 자질을 지녔다고 한다.
경당이 자신의 집에서 가르친 제자 중의 하나가 석계 이시명이었는데, 경당은 그를 훗날 사위로 삼은 것이다. 이시명은 당시 27세로 남매를 둔 홀아비였는데, 경당은 이 제자에게 19살 외동딸을 재취부인(再娶夫人)으로 시집보냈던 것이다. 석계의 자녀들 중 존재 이휘일과 갈암 이현일은 외조부인 경당에게서 배워 퇴계 학맥을 이었다. 장씨는 병자호란으로 수치를 당하고 벼슬에서 물러난 남편에게 “공께서 세상을 버리고 숨으셨으니 마땅히 시와 예로써 자손들을 가르치셔야 하는데 어찌 세월을 그냥 보내십니까? 아이들에게 학문을 강론하고 예의를 익히게 하여 앞날을 밝히시고 뒤를 열어주는 일을 어찌 하지 않으십니까?”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남편은 그 말을 듣고 후학들을 힘써 지도했다. 남편과 자식을 통해 여성인 자신이 이루지 못한 길, 즉 학문에 정진하고 후학을 기르는 일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장씨는 어린 시절 부모님의 칭찬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고 시를 지어 손자를 칭찬하기도 했다. 장씨는 자신의 재주를 숨긴 채, 한 가정의 평범한 가정주부면서도 자녀들을 대학자로 키웠다. 그렇지만 자녀들에게는 늘 “너희들이 비록 글 잘한다는 소리가 있지만 나는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선행을 했다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기뻐하여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퇴계의 학문을 잇는 부친의 가르침을 받은 장씨 역시 과거시험 공부보다 〈소학〉의 본질을 하나라도 몸소 실천하기를 더 바랐던 것이다. 퇴계의 가르침대로 장씨 역시 근본이 없으면 학문이나 재력, 명성 모두 모래성에 불과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자녀들에게도 공부보다 먼저 행동거지를 중요하게 여기도록 했다.
재물이 아닌 의리 중시하는 교육
장씨도 요즘 어머니들처럼 같은 고민을 했다. 요즘 대부분 어머니들은 행여 아이의 기를 꺾을까봐 아이의 행실이 잘못되어도 꾸짖지 않는다. 그렇지만 장씨는 먼저 아이에게 존귀한 것이 있음을 먼저 가르치고, 이어 아이의 기상을 길러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이의 기를 꺾을까봐 과잉보호에 나서면 결국 버릇없는 아이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아이의 기상을 기른다는 것은 그 꿈을 다듬고 북돋아주는 일이다. 그런데 요즘의 젊은 어머니들을 보면 그 둘을 모두 혼동하고 있는 듯하다. 존귀한 것이 있음을 가르치는 것이 아이의 기를 죽이는 것으로 잘못 알아 겁나는 것이 없는 아이를 길러놓는다. 아이의 욕구를 무턱대고 받아들이는 것만이 아이의 꿈을 키워주는 것으로 믿어 절제할 줄 모르고 참을성 없는 심성을 부추긴다. 그래서 겁나는 것 없고 욕구를 절제할 줄 모르는 아이들이 공공의 장소에서 안방처럼 휘젓고 다니며 소란을 떨고 남을 불편하게 만드는데도 제 아이 기 살아 있는 것만 좋다고 웃는다. 기껏 나쁜 버릇만 길러놓고 기상을 길렀다고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164~165쪽)
장씨는 또 아이들에게 재물을 쫓다보면 인간관계를 해치게 된다는 것을 가르쳤다. 이는 오늘날 강조되는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사람이 몸을 가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게 재물이나 물고기는 향기로운 미끼 때문에 죽고 선비의 아름다운 이름은 재물로 상한다. 재물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떠나서는 값이 없다. 남이 모두 넉넉할 때 내 재물이 많은 것은 자랑과 여유가 되지만 남이 모두 없는데 홀로 많이 가짐은 재앙일 뿐이다. 남이 모두 굶는데 홀로 가득한 곳간은 마침내 화를 부르는 문이 될 뿐이니 너희는 그 이치를 알아 재물을 대하도록 하라. 의리는 무거운 것이고 재물은 가벼운 것이니, 재물은 지금 없다 하더라도 뒷날에 다시 생겨날 수 있으나 의리는 한번 깨어지면 되살리기 어려운 까닭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찌 무거운 것을 버리고 가벼운 것을 취하는가.”(168~169쪽)
운악의 셋째 아들인 석계는 부인 장씨의 자녀교육에 힘입어 다시 일가를 이루어 분가를 하게 된다. 현재 운악 가문은 이용태 삼보창업자가 종손이고, 분가한 석계 가문은 이돈(李燉)씨가 13대 종손으로 일가를 이루어오고 있다. 석계가의 종가도 석계가 태어난 경북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가 아니라 그가 은거했던 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에 있다. 이곳에는 그의 후손인 이문열이 세운 광산문학관이 있다. 수많은 명문가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가문의 토대를 쌓는 이른바 ‘가문주식회사의 CEO’의 존재 여부이다. 가부장적 신분사회에서 대부분 명문가의 경우 그 역할을 남성이 맡았다. 하지만 남성중심의 사회 속에서도 수많은 여성들이 주역 못지않은 조연역할을 했다. 정부인 장씨가 바로 그러한 인물이다.
창밖에 소소히 내리는 빗소리 / 소소한 그 소리 자연의 소리(窓外雨蕭蕭 / 蕭蕭自然) 자연의 소리를 듣고 있으니 / 내 마음도 자연 그대로 일세(我聞自然聲 / 我心易自然)
이 시로 인해 정부인 장씨는 후대인에게 ‘부인 중에서 현명한 유학자(閨閤中賢儒)’라는 평가를 받았다. 즉, 여중군자라는 것이다. 또 장씨는 우리나라 최초로 요리책을 쓴 여성으로 알려져 있는데, 1673년에 요리책 〈음식지미방(飮食知味方)〉을 썼다. 이미 10살 때 ‘소소음(蕭蕭吟)’이란 시를 쓴 정부인 장씨는 요즘으로 보면 요리에 정통한 전업주부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시인이자 자녀교육의 CEO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