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뉴스 등 언론 매체를 통해 그려지는 학부모들의 모습은 매우 이기적이고 폭력적이라서,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우리 사회의 교육을 망치고 교실을 붕괴시키는 주범이 꼭 학부모들인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언론 매체를 통해 그려지는 학부모들의 모습은 참으로 다양하지만, 그 대표적인 양상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학생의 권리에 대한 수호자 혹은 대변인으로서 학부모의 모습이다. 언론 매체는 학부모들이 교육현장의 전반적인 인권 수호에 대해 합리적인 활동을 벌이는 일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고, 학부모들의 이의 제기 방법이 폭력적이거나, 이의 제기 과정에서 당황스러운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에 매우 선정적인 방식으로 학부모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2006년 5월 청주의 한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무릎 꿇은 교사’ 사건을 보더라도 언론은 교사가 학부모들 앞에서 무릎 꿇는 일이 발생한 전체적인 정황과 구조적 요인 등에 대해서 심층적으로 다루기보다는 교사가 학부모들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만을 선정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우리 사회에서 교권이 침해되는 것이 모두 ‘지나친’ 학부모들 때문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렇게 학부모들은 흡사 ‘공교육 붕괴’라는 제목의 폭력무협활극 주인공처럼 그려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학부모가 학생의 권리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것 자체가 곧 교권에 대한 위협인 것처럼 연결시키는 논리적 비약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여기서 자칫 잘못하다가는 학부모들이 교육현장의 모든 구조적 문제까지도 뒤집어쓰는 희생양이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둘째는 대학입시의 최전선에서 학생의 전문적인 매니저로서 학부모들의 모습이다. 이들의 모습은 기존 전업주부의 모습이 아니라, 입시의 경향과 대책, 사교육시장에 대한 정보통으로서 준전문가적인 모습으로 묘사된다. 입시 매니저로서 가장 전문성을 지닌 것으로 묘사되는 ‘대치동’의 엄마들은 ‘대치동 신드롬’을 만들어내고, 그에 관련된 책들도 출간되어, 베스트셀러의 대열에 오르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은 이에 뒤질세라 ‘목동 엄마’들도 신드롬 만들어내기에 열중하고 있으니 한국 사회에서 학부모 역할이란 자녀에 대한 책임, 교육현장에 대한 책임과 더불어 부동산 가격에 대한 책임(?)까지도 감당해야 하는 매우 막중한 역할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학부모들의 모습은 언론과 시장의 부추김과 더불어 학부모들 스스로의 욕망이 결합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묘사된 모습 이외에도 학부모들의 모습은 자식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모습으로, 때로는 자식을 위해 새벽기도에도 나가고 천배도 올리는 모습으로, 때로는 사소한 교육문제에까지 민원을 제기하는 모습 등으로 다양하게 그려진다. 하지만 위에서 묘사된 어떠한 모습도 학부모들의 실제를 심층적으로 그리고 있지는 않고, 대개 이기적이거나 천박하게 묘사하고 있다.
경험과 다른 현실에 혼란 가중돼
그러나 실제로 학부모들은 자녀양육이나 교육현장과 관계맺음을 어떤 획기적이거나 선정적인 사건들의 모음을 통하여 경험하기보다는 꾸준히 반복되는 일상성을 통하여 경험하고 있다. 일상성 속에서 경험되는 학부모 역할이란 참으로 수고스럽고 혼란스러워서 대단한 에너지와 노동력이 투입되는 과정이다. 그리고 학부모들이 경험하는 이러한 수고스러움과 혼란스러움은 한국 사회 학부모들의 대표적 정서인 ‘불안감’으로 고스란히 축적된다. 현재 한국 사회의 학부모들이 늘 불안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학부모 역할을 해야 하는지가 혼란스럽다. 전통사회에서는 대가족제도 내에서 부모 역할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들을 조부모 세대로부터 전수받았다면, 현재의 학부모 세대들은 핵가족화된 가족 구조 속에서 부모 역할에 대한 구체적인 교육을 받을 수가 없다. 또한 산업사회에서 가정이란 아무나 함부로 간섭해서는 안 되는 사적인 영역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자녀교육은 부모에게, 실제로는 어머니 혼자에게 맡겨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전 세대보다 자녀의 수가 감소되어 자녀 양육과 학부모 역할에 드는 노동력이 줄어들 것 같지만 이것은 산술적인 수치일 뿐 자녀에 대한 기대감은 이전 세대보다 더 커지고, 한 자녀 혹은 두 자녀를 어떻게 키워내는가가 인생의 가치와 맞물려 평가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학부모들은 상당한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예전에는 자녀들이 많은 형제들 속에서 상호작용을 경험하며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자생력 있게 성장하였는데, 현재 한 자녀 혹은 두 자녀로 이루어진 자녀 세대들은 이전 세대보다 심각한 정서적 빈곤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자녀들에게만 몰입하기에는 학부모 세대 스스로가 짊어져야 할 짐이 매우 무겁다. 생활세계에서의 무한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고, 학부모들 스스로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공부하고 교육받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학벌 위주의 현실도 불안감 키워
둘째, 한국사회의 현실 또한 학부모 역할을 어렵게 만든다. 학부모들 스스로가 사회생활을 경험해보아서 더욱 뼈저리게 느끼게 되지만, 한국사회는 그야말로 ‘학벌사회’이다. 학벌이 곧 사회적 성공의 보증수표이며, 심지어는 학벌이 공공연히 능력과 도덕성을 가늠하는 척도로도 사용된다는 것을 학부모들은 알고 있다. 학부모들 자신이 그것을 여실히 경험하기 때문에, 학부모들은 자식들의 학벌을 관리하고 싶은 욕구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고, 이것이 학부모들 사이의 불안을 무한대로 증폭시킨다.
또한 아이를 낳아 잘 키우고 싶은 욕구가 있다고 해도, 보육과 교육에 대해 한국사회에서는 사회 전체의 문제로 보기보다는 모두가 부모들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기 때문에, 아이를 낳아 양육하고 교육하는 일이 여유롭고 행복한 일이기보다는 굉장히 팍팍한 일이 된다. 한국사회에서 출산을 꺼리게 만드는 가장 주된 이유라는 사교육은 그 시장이 점점 확대되어 학부모들의 무한한 지출만을 기다리고 있다. 동시에 한국사회는 현재 저출산, 고령화 사회에 진입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사회적 대책은 없고 전체적인 복지의 수준은 일천(日淺)하다. 학부모들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자녀의 사교육에 대한 부담과 더불어 자신의 노후에 대한 부담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이와 같이 한국사회에서 학부모로 살아간다는 것은 비상구가 없이 앞뒤로 꽉꽉 막힌 미로에 갇힌 것과 같다.
셋째, 공교육과의 조율 없이 이루어지는 대학입시제도의 변화방향도 학부모들에게는 큰 혼란거리이다. 자녀교육 문제와 관련하여 학부모들이 현실적으로 가장 민감한 부분은 바로 대학입시와 관련된 부분일 터인데, 교육정책이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양상도 학부모들로서는 따라잡기가 힘들다. 대학입시제도는 변화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그것이 장기적인 숙고 속에서 공교육 제도와 조화를 이루며 이루어지는 것인지가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08학년도 대학입시제도는 항간에서 ‘죽음의 트라이앵글’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는 2008학년도 대학입시제도가 수학능력시험과 내신 성적, 논술시험의 반영 비율을 비슷하게 균형을 이루도록 함으로써 이전의 대학입시제도와는 달리 수험생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공교육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내신 성적의 반영비율을 높이는 것이나, 논술시험을 강화 혹은 통합논술의 형태로 변형하여 창의적 사고력이 뛰어난 인재를 선발하겠다는 취지는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수학능력시험과 내신 성적, 논술시험의 반영비율을 비슷한 수준으로 조정한다는 것도 탓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까지 공교육 제도를 통해 논술시험을 준비할 수가 없었고, 오히려 폭넓은 독서와 토론, 창의적인 사고와 글쓰기 등이 공교육 제도에 적응하기에 방해가 되어왔던 것이 한국교육의 현실이다. 공교육의 현실과 동떨어져있는 입시제도는 결국 사교육에 대한 의존이라는 당연한 해결방안을 불러오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학부모들은 자녀들과 더불어 굉장한 불안과 혼란, 수고스러움을 통하여 교육현장을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 실제로 학부모들은 언론에서 그려지는 것처럼 거칠고 아무 생각이 없거나, 기득권의 유지를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는 스캔들 속에 있다기보다는 고단한 일상 속에서 묵묵히 불안을 걷어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학부모 둘러싼 환경의 지각 변동
그렇다면 학부모들의 실제 생활과 학부모들에 대한 이미지 사이에 이러한 간극이 발생하는 것은 왜인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과장된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무언가 서서히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기에 그 변화가 감지되는 것인가?
이러한 혼란스러운 질문 속에서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학부모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규정해나가야 하는 과도기에 있다는 것이다. 학부모들의 자기이해에 영향을 주는 힘들은 여러 각도에서 작용하고 있지만, 그 핵심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학부모들의 변화에 가장 광범위한 영향을 주는 것은 ‘교육 수요자’로서의 자기이해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교육에 시장경제논리가 도입되기 시작하면서, 교육을 인격적 관계의 측면으로 보는 입장과 더불어 서비스의 공급과 수요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입장이 저변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1995년에 ‘5·31교육개혁안’이 발표된 이후로 교육개혁의 방향이 ‘수요자 중심교육’으로 설정되면서, 학부모들이 스스로를 교육 수요자라는 정체성을 통해 인식하게 되었다.
자신을 교육 수요자라고 인식하는 학부모들은 학생들과 더불어 최고의 만족을 주는 교육을 소비하고자 하는 욕구를 지니게 된다. 이것은 학교에서 경험하는 교육의 질 뿐만 아니라, 학교의 생활공간, 전체적인 복지와 배려의 수준 전체에 대한 평가를 포괄하게 된다. 학부모가 스스로를 교육의 수요자로 이해할 때, 학부모는 교사를 포함한 교육 전반에 대해 평가할 권리를 가지게 되며, 동시에 다양한 교육서비스 중 만족스러운 교육서비스를 선택할 권리를 요구하게 된다. 그리고 만족스럽지 못한 교육서비스에 대해서는 민원을 제기하거나 이의를 제기하거나, 항의를 하는 등 불만을 표현하게 된다.
둘째, 학부모들이 자신을 권리의 주체로 인식하는 ‘인권의식’의 확대이다. 199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서도 인권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미흡한 수준이나마 인권의식이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전체적인 인권과 교육권, 학습권 등의 개념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학부모들은 학생의 보호자라는 측면에서 학교생활에서 학생의 인권이 보호되도록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우리 사회의 학부모들이 가진 권리의식이 성숙하고 균형 있게 자리 잡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에, 과도기적인 문제점들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우리 사회의 학부모들은 아직 자신의 권리 주장과 더불어 타인의 권리 존중에까지 이르지 못하는 측면이 있고, 동시에 성숙하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권리를 주장하는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는 문제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다수의 학부모들은 그들이 학생들에게 주어야 할 최선의 것이 입시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실은 학부모들이 학생들의 존엄성을 가장 심하게 훼손하는 역할을 하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이율배반적인 측면도 지니고 있다.
셋째, 학부모들이 공식적인 통로를 통하여 학교교육과 교육제도 전반에 관여하게 되었다. 이제 학부모들은 사친회, 육성회, 어머니회 등과 같이 학교의 행사에 조력하는 형태와 달리 학교운영위원회를 통하여 학교의 일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다양한 학부모 단체들을 통해 교육현장에 대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학부모들이 교육현장의 조연이 아니라 주연으로서 비전과 안목을 가지고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학부모들은 교육현장의 문제를 개인적 차원이 아닌 연대의 차원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경험하고 있다.
과도기에 접어든 학부모의 역할
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학부모들이 스스로를 교육 수요자와 권리의 주체로서 이해하게 되었다는 점과 교육 참여의 통로가 공식화되었다는 흐름들은 서로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관통하는 하나의 맥락이 있다. 그것은 바로 모두 학부모들에게 이전보다 큰 권한을 부여한다는 점이고, 이러한 경향은 앞으로 보다 강력해질 전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를 관찰해보면 권한을 나누어야 할 시점이 오면 항상 어김없이 사회에 큰 진통이 있었다. 양반과 상민, 귀족과 노예, 백인과 흑인, 남성과 여성이 그들의 권한을 나누기 시작할 때 갈등과 폭력, 혼란과 분쟁, 투쟁과 대립, 가해자와 피해자, 선구자와 희생양이 꼭 발생하곤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을 겪더라도 권한의 나눔은 늘 인간을 보다 인간답게 하였다.
우리 교육현장에도 이제 예상된 혼란이 진행될 것이다. 교육에 대한 권한을 나누기 위한 혼란이다. 이제까지 교육현장에서는 사실 교권(敎權)이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이제 학생과 학부모들이 이러한 신성불가침의 영역을 함께 나누기를 요구하고 있다. 어쩌면 ‘무릎 꿇은 교사’와 같은 일들이 앞으로 더욱 많이 발생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 우리가 ‘교육 3주체’에 대해 논의를 해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아마도 예견되는 갈등을 지혜롭게 풀어나가기 위해서일 것이다. 2007년에는 교사들이 스스로 권위주의를 해체하고, 학생과 학부모에게 다가가는 진정한 의미의 교권(敎權)이 확립되기를, 학생들이 자신의 권리와 더불어 스승의 권위를 존중함으로써 진정한 배움이 생동하기를, 학부모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학생의 삶을 살리고, 교사의 기(氣)를 살리고, 학교의 생동감을 살리고, 교육현장의 평화를 일구어내는 진정한 의미의 상생이 넘치기를 기대해본다. ‘교육 3주체’가 권한을 평화롭게 나눔으로써 우리 교육이 보다 인간화되기를 기대해본다.
한국사회의 현실도 학부모 역할을 어렵게 만든다. 우선 학벌 위주의 현실이 그렇다. 학벌이 능력과 도덕성을 가늠하는 사회를 경험한 학부모들은 자연스럽게 자식들의 학벌을 관리하게 된다. 또한 보육과 교육을 부모들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사회적 분위기와 공교육과의 조율 없이 이루어지는 대학입시제도의 변화 방향도 학부모들에게 큰 부담이 된다. 학부모로 살아간다는 것은 복잡한 미로 속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