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현대 교육사에 있어서 평준화 제도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는 말도 드물다. 이 제도가 도입된 지 30여년이 지났지만, 평준화 제도는 여전히 우리나라 교육을 규정하는 가장 강력한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산업화 시대에 도입되어 지식 정보화 시대에 접어든 오늘날에도 평준화 제도는 우리나라 중등 교육을 지탱하는 근간이 되고 있다. 이처럼 평준화 제도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교육 현실에서 학교선택권 확대 정책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선순환적 학교배정을 위해 지난 2월 27일 서울시교육청이 발표한 학교선택권 확대 계획의 핵심은 지난 30여년 이상 큰 변화 없이 시행되어온 고등학교 학생 배정 방법을 교육청의 일방 배정에서 선지원·후추첨 배정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환은 단순히 배정 방법의 개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육 시스템 전반에 걸친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전망하고 있는데, 일각에서는 학교 서열화 등의 부작용을 우려하고 있기도 하다. 어쨌든 서울 교육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기 위한 학교선택권 확대 방침이라는 화살이 시위를 출발하였다. 그 목표점을 보다 명확히 하여 새 정책 방향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1995년 5월 31일 대통령 자문기관으로 설치된 교육개혁위원회에서 ‘세계화·정보화 시대를 주도하는 신교육 체제 수립을 위한 교육개혁 방안’의 하나로 학교선택권을 도입하는 방안이 제안되었다. 이 해 12월에 교육법시행령 개정령에 학교선택권 확대 규정이 삽입되었다. 당시 법개정 이유를 살펴보면 학생 배정 방법을 선지원·후추첨 배정 방식으로 개선함으로써 학생의 학교선택권을 확대하여 교육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있다고 밝히고 있다. 서울시교육청에서는 교육개혁위원회의 권고와 법 개정에 근거하여 1996학년도에 선지원·후추첨 배정 방식을 도입하는데, 서울시 전역에 일괄 적용하기에 앞서 학교수에 비하여 학생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도심공동화 지역인 서울시청 반경 3㎞ 이내에 있는 23개교를 대상으로 시범운영하게 된다. 오늘날 서울의 학교선택권 범위는 서울시청 반경 5㎞ 이내의 37개교로 확대되어 시행되고 있다.
이번에 발표한 ‘학교선택권 확대 계획’은 서울시 전역의 모든 고등학교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간 시범운영과는 양과 질적인 측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단순히 학생 배정의 기술적인 보완이 아니라 학교선택권이 가지는 학교교육 경쟁력을 견인하는 본질적인 차원에서 접근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학교선택권 확대 정책이 학교교육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정책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고 현장의 참여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납득이 필요하다고 본다.
학교교육 경쟁력을 구성하는 요소는 다층적일 수밖에 없다. 학생구성, 교원조직, 교육재정, 학교시설, 교육과정 등 어느 일면으로는 규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학교선택권 확대 정책이 도입되었을 때, 학교별 차이는 있겠지만 이들 요소 중 특정 요소들이 강화되어 학교 교육력을 강화시키는 데 일조할 수 있다고 본다. 그 이유를 학생 배정과 연관 지어 살펴보면 쉽게 납득이 간다. 현행 학생 배정은 학교가 노력하지 않아도 교육청에서 일률적으로 학생 정원을 배정해 주었다. ‘학교가 노력하지 않아도’라는 말은 듣기에는 매우 추상적인 것 같지만 그러한 학교는 대개 별반 다르지 않은 교육과정 편성·운영, 교수·학습 방법 개선 노력 미흡, 낙후된 교육시설, 좋은 학교 만들기에 대한 관심과 참여 부족, 학교 공동체 구성원 간의 의사소통 결여 등의 공통적인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학교에 학생을 배정하면 매번 학생·학부모의 민원이라는 심한 몸살을 앓곤 한다.
학교선택권 확대는 배정 시스템을 바로잡는 데 1차적인 목적이 있다. 학생, 학부모는 다니고 싶은 학교를 선택하고 학교는 선택을 받기 위하여 노력하는 선순환 구조의 시스템을 구축하자는 것이다. 학교는 학교의 여건과 교육수요자의 요구를 반영하여 학교 교육 내용을 보다 매력적으로 생산하고, 교육수요자는 자신의 구미에 맞는 학교를 선택함으로써 공급자와 수요자 모두가 만족하고 상생(Win-Win)하는 새로운 교육의 틀을 갖추자는 것이 학교선택권 확대 정책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다. 학생·학부모가 선택하지 않는 학교는 당연히 그 요인에 따른 내재적·외재적 노력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사회 통합적 교육 기능 확대 미국에서 1960년대 인종차별 철폐 정책의 일환으로 흑인 거주지 학구와 백인 거주지 학구의 학생들을 서로 혼합하기 위하여 ‘버싱(Busing) 제도’가 강제 시행되었다. 교육이 사회 통합의 디딤돌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어린이는 어른보다 융합이 빠르기 때문이다. 역사·시대적인 배경이 다른 미국의 버싱 제도를 우리나라에 대입하는 것 자체가 무리가 있겠지만 현행 추첨배정 제도에 참고할 만한 점이 있다. 현행 입학추첨 배정 제도가 거주지 중심으로 이루어져 학습 집단을 계층적으로 분리하여 지나치게 동질화하고 있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소위 강남 ‘8학군’이라는 말도 특정 지역을 분리하는 심리적인 용어로 변질되어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과거 평준화 시대 이전에는 학생의 학업 능력이 학교를 선택하는 기준이 되었지만 현행 제도에서는 부모의 거주지에 따라 진학하는 학교가 결정되어 특정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 거주지를 이전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고 거주지를 이전하지 못하는 경우 위장전입이라는 편법이 동원되기도 한다. 학교선택권 확대 정책은 학습 집단을 다양화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1단계에서 학생들은 서울 전역의 어느 학교든 선택 지원할 수 있고 모집 정원의 20~30%를 추첨 배정한다. 2단계에서는 거주지 학교군 내의 어느 학교든 선택 지원할 수 있고, 모집 정원의 30~40%를 추첨 배정한다. 이러한 배정 방식은 현행 방식에 비해 학생 배정 지역을 광역화하고 학습 집단을 다양화할 수 있다.
학습 집단의 다양화는 지역·계층 간의 교류 확대 및 상호 이해의 폭을 넓히는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 미래의 지도자에게 통합적 지도력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그러한 경험 기회를 제공하는 일은 교육이 담당해야 할 중요한 몫일 것이다. 다양한 학습 집단이 갖는 효과는 사회 통합 이외에도 교육의 본질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학습집단의 다양한 구성이 동질적인 학습집단 구성보다 교육적으로 더 나은 학습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Peer group effect)은 교육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선택폭 넓혀도 평준화 해체되지 않아 평준화 체제는 많은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학부모의 학교 선택권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는 점과 학교가 노력하지 않아도 교육청에서 일방적으로 학생을 배정하고 있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 배정된 학교의 건학이념, 종교, 교육과정의 특성, 전통과 역사 등은 학생 본인의 희망과 전혀 무관한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시스템이 30여년 이상 큰 변동 없이 시행되어 왔다. 그 동안 학생·학부모의 교육적 필요나 요구가 철저히 무시되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학교선택권 확대는 교육 수요자의 입장을 존중하는 정책이다. 내가 다니고 싶은 학교, 배우고 싶은 과목을 선택하게 함으로써 학교선택과 배정 단계에서 학생·학부모의 교육적 필요와 욕구를 최대한 충족시켜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학교선택권 확대 추진이 평준화 체제의 해체를 가져올 것이라는 시각에는 대체로 자유주의 시장 경쟁 논리가 도입되어 학교 간 서열화 및 양극화를 낳을 것이라는 인식을 드러낸다. 즉, 특정지역·특정학교로의 쏠림현상이 발생하고 이에 따라 학교 간 학력 격차가 심화될 것이라는 논리이다. 또한 대학 진학률이 학교선택의 주요 기준이 되어 입시위주의 파행적인 교육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교선택권 확대 추진 계획을 정확히 이해한다면 결코 평준화 정책과 배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준화 제도의 해체라고 하면 으레 1974년 이전의 학교별 학생선발 체제를 떠올리게 되는데, 학교별 선발체제와 학교선택권 체제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전자가 학생 경쟁을 통한 선발이었다면 후자는 학교 경쟁에 의한 선지원·후추첨 배정체제이다. 학교선택권 확대 체제에서의 학교 간 경쟁은 무한 경쟁이 아니라 학생의 선택을 받기 위한 양질의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하려는 경쟁을 의미한다.
학교선택권 체제에서 학생 배정 과정을 보면 평준화 제도에서 시행하고 있는 입학추첨 배정제도가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학생 성적에 의한 학교 간 서열화는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확신한다. 3단계 배정에서 모집 정원의 30~50%를 현행 방법과 동일하게 추첨 배정하는데, 학교 간 서열을 인정한다면 3단계 배정의 정당성은 상실될 것이다. 정책연구를 주도한 동국대 박부권 교수는 이 제도를 ‘의사선택(擬似選擇)’ 제도라고 표현하여, 완전 경쟁체제에 의존하고 있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다만, 이 시점에서 우리는 장점이 많은 평준화 제도가 왜 위기에 직면해 있는지에 대해서 반성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극심한 입시 경쟁을 없애고 학생들의 정상적인 성장을 도모한 평준화 제도가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 이상의 노력이 경주되어 왔어야 한다. 첫째는 학교 간의 교육격차가 없어야 한다는 점이고, 둘째는 이질적인 학습 집단에 맞는 교육내용과 방법에 대한 고민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어야 한다는 점이다. 학교 간의 교육 격차는 교육외적인 요인이 작용하므로 논외로 치더라도 평준화 체제에 부응하는 교육과정 편성, 수준별 이동수업 등이 활성화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수월성 교육이 미흡하다는 지적도 다양한 프로그램의 개발과 활용이 미흡했다는 지적이 가능하다. 이러한 것들은 학교 구성원의 노력 정도에 따라 충분히 만들어 갈 수 있는 환경이다.
따라서 학교선택권 확대 체제에서 학교는 학생·학부모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 다양하고 특성화된 교육과정과 교육프로그램을 마련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수학교과군을 집중이수하는 학교, 예체능 과목을 집중이수하는 학교, 학생 수준에 따라 능력별 수업을 잘하는 학교, 제2외국어 교육이 장점인 학교, 통합논술 지도를 잘하는 학교, 방과 후 학교 프로그램이 잘 운영되는 학교 등 학생·학부모가 선택할 만한 매력적인 ‘무엇’이 다양할 때, 평준화 체제는 해체가 아니라 더욱 공고화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교육과정 특성화 등 학교 노력 필요 제도 변화의 궁극적인 도달점은 학생이다. 그간 많은 교육정책이 입안되고 시행되어 왔지만 학생·학부모를 중심에 두고 추진된 사례는 많지 않았다. 더러 교육 수요자를 존중하는 정책이 발표되었지만 구체성과 실효성이 미흡한 경우가 많았다. 학교선택권 확대 정책의 최대 수혜자는 학생·학부모이다. 희망하는 학교에 진학할 확률을 살펴보면 최대 90% 이상에 이를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50~70%(1단계 : 20~30%, 2단계 : 30~40%)의 학생들이 희망하는 학교에 배정될 것이고, 설령 1, 2단계에서 탈락했다 하더라도 거주지 주변의 학교를 지원했다면 3단계에서 다시 배정될 확률이 상당히 높아진다. 다니고 싶은 학교에 배정된 경우 학교생활 적응도와 만족도는 향상될 것이다.
학교의 입장에서 보면 선택을 받아야하기 때문에 다소 부담이 될 수 있으나 학교공동체 구성원의 참여 속에 학교의 교육목표와 건학이념을 새롭게 확립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학교의 선호도를 높이려면 무엇보다 선생님들의 동참과 노력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에서도 우리 지역에 좋은 학교를 만들기 위한 관심과 지원이 확대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 제도가 2010학년도부터 시행되므로 3년의 준비기간 동안에 학교는 나름대로 학교발전을 위한 전략을 수립하여 추진해야 한다. 무엇보다 선택체제에 부응하도록 학교 교육과정을 Brand(특성화)화하고 다양한 교수·학습 방법 개선을 위한 자료 개발 등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교육청에서는 학교간 선호도 격차를 해소하기 위하여 잠재적인 비선호 학교들에 대한 지원을 강화할 계획이다. 학교의 자구노력과 교육청의 지원에 의해 학교·지역 간 균형발전을 통해 2010학년도 새 제도가 순조롭게 시행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2009년 중3 학생들의 손에 모든 고등학교의 교육 정보를 수록한 학교 안내서가 쥐여져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그들은 ‘선택’ 앞에서 현재의 중3 학생들보다 어른스러운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어느 학교를 선택하여 지원해야 하는가?’ 그들은 자신의 적성과 진로를 고려하여 가고 싶은 학교의 교육 프로그램을 샅샅이 탐색하고, 부모와 선생님과 친구와의 대화를 늘려나갈 것이다. 우리는 그 자체를 성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고민과 선택과 꿈을 무엇으로 채워줄 것인가이다. 그 해답은 역시 학교이다. 학교가 그들의 선택에 부응하는 길은 변화의 모색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 변화의 출발점이 학교선택권 확대 추진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교육은 어느 한 방향에서 고정되어 있지 않고 언제나 변화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그 변화의 중심은 학생이고 선생님이다. 학교선택권 확대 정책이 선생님들의 참여 속에서 성공적으로 추진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