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는 능력과 윤리가 분리 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윤리보다는 능력을 갖추는 것을 강조하는 참으로 근시안적인 담론이 성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능력과 윤리를 분리해서 생각한다면, 윤리보다 앞선 능력이 결국 누구를 이롭게 하는 일에 쓰인단 말인가? 학부모는 상생과 소통, 사유의 윤리를 교육현장에 대한 참여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 학부모 스스로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지원의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
어떤 사회이건 그 사회에서 빈번히 이야기의 주제가 되는 말이 있다면, 필시 그것은 그 사회 혹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간절히 원하는 무엇일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를 간절히 원한다는 것은 그 무언가가 일상적으로 만족스러운 수준보다는 희소하거나 희박하다는 것을 동시에 의미하기도 한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윤리’라는 말은 대단히 자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말이며, ‘공직자의 윤리’, ‘교사의 윤리’, ‘전문직의 윤리’ 등 모든 직업, 모든 사람들의 윤리가 문제되는 것을 보면 한국 사회는 참으로 윤리에 목마른 사회인 것 같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학부모들에게 윤리가 요구되기 시작한 것은 다른 교육 주체들에 비하여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교사나 교육 행정가들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그들의 역할에 대하여 윤리가 기대되고 요구되어 왔지만, 학부모들에 대하여 윤리를 기대하기 시작한 저간의 변화는 교육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종의 지각변동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사회가 어떤 사람들에게 윤리를 기대하는가를 살펴보면, 그 의미가 보다 명확해진다.
우리는 이성적 사유가 불가능한 사람들에게 윤리를 기대하지 않는다. 동시에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 사회에 대하여 아무런 영향력이 없을 때, 그들에게 기대되는 윤리는 최소한의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커질 때, 그들의 행동이 결정적이거나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정도로 파괴력이 커질 때, 그들의 전문성이 일정한 수준 이상이 되어 자기재생산 능력을 가질 때 우리는 특정한 사람이나 사회에 대하여 보다 윤리적이 될 것을 요구하게 된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면, 학부모들에게 윤리가 요구된다는 것은 학부모들에게는 다소 부담스럽고 번거로운 일일 수 있으나, 동시에 그만큼 학부모들이 교육현장과 사회에 대하여 지니는 영향력이 커졌다는 것과 학부모가 명실상부한 교육현장의 주체로 여겨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부모는 더 이상 학교와 교사, 교육 행정가들에게 교육에 대한 결정권을 위임하고 그 결정에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교육에 참여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체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었고, 학부모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이제는 이러한 변화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윤리가 부재한 사회가 개탄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학부모들에게 윤리가 요구된다는 사실은 필자 자신 학부모로서 매우 자긍심이 느껴지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윤리적 요구에 대하여 기꺼이 고민할 수 있는 것이며, 즐거운 마음으로 ‘학부모의 윤리’라는 짐을 질 수 있는 것이다.
학부모가 지녀야 할 윤리적 역량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커질수록 윤리에 대한 기대도 커진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도 이야기하였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능력과 윤리가 분리 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윤리보다는 능력을 갖추는 것을 강조하는 참으로 근시안적인 담론이 성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능력과 윤리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다면, 윤리보다 앞선 능력이 결국 누구를 이롭게 하는 일에 쓰인단 말인가?
따라서 필자는 윤리가 역량(competency)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관점에서 학부모의 윤리를 논의할 것이다. 학부모는 상생과 소통, 사유의 윤리를 교육현장에 대한 참여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어야 하며, 이와 같은 학부모의 윤리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하여 학부모 스스로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지원의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
1) 보편적 권리 의식을 통한 상생의 윤리
학부모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윤리는 상생(相生)의 윤리이다. 무한경쟁주의가 주도하는 한국의 학교에서 ‘서로를 살린다’는 것은 참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윤리는 바로 이 서로를 살림에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에, ‘상생’이라는 출발점 없이 윤리를 논의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만다.
상생이 왜 윤리의 출발점인가 하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공동체 속에서 태어나서 공동체 속에서 자라고 자기를 실현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공동체의 생존이 불가능해지면 결국은 개인 모두가 존재의 터 자체를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동체 안에는 항상 개인의 무한대의 자유를 규제하면서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만든 약속과 규약이 생기기 마련이고, 이를 지키도록 요구하는 것이 윤리이다. 이렇기 때문에 설령 도적떼의 무리라고 하더라도(도적떼의 공동체가 지속되어야하는가 아닌가는 논외로 치더라도) 그 안에서 개인이 자기만을 살리는 일에 몰두하여 공동체의 생존을 위한 조직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는 와해되고 만다. 공동체가 와해되면 그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개인의 존립 근거 자체가 없어지며 이는 결국 개인의 이기적인 이익의 관점에서도 손해가 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따라서 어떠한 공동체이건 결국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공동체 속에서 서로를 살려야만 하는 것이 모든 윤리의 출발점일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보면, 학부모의 입장에서는 내 아이에게만 향하던 관심을 학급으로, 학교로, 지역사회로, 사회 전체의 교육 문제로 확대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학부모는 자신의 모든 행동에 대하여 “이 행동이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억누르게 되는가?”라는 관점에서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즉 “내가 이 책을 학급문고로 기증하는 것은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가?”, “내가 교사에게 촌지를 주는 것은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억누르게 되는 일인가?”와 같이 자신의 행동이 주게 될 긍정적 영향력과 부정적 영향력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양서를 학급문고에 기증하는 것은 모두를 살리는 일이 된다. 그러나 교사에게 촌지를 전달하는 것은 교사와 학부모 사이의 암묵적인 불신을 형성하게 만들고, 학부모들 사이의 경쟁의 분위기를 조성하여 불안감이 팽배하도록 만든다. 결국 이로 인하여 학부모 자신과 자녀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학부모는 나의 행동이 내 자녀가 포함된 교육공동체를 살리는 일인가, 죽이는 일인가를 엄정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학부모의 상생의 윤리는 자신의 자녀만 특권을 누리게 하려는 특권의식이 아니라 모든 학생들의 보편적 권리라는 관점에서 접근되어야 하며, 학부모의 역할은 자신의 자녀의 특권이 아닌 모든 학생들의 보편적 권리를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집중되어야 할 것이다. 즉 나의 자녀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아이들을 함께 키운다는 태도로 나의 자녀가 속한 교육의 현실을 개선시키는데 자신의 역량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2) 경청과 참여를 통한 소통의 윤리
학부모가 갖추어야 할 두 번째 윤리는 소통의 윤리이다. 학부모는 교육현장에서 직접 가르치고 배우는 교사나 학생과는 달리 그들과의 관계를 통하여 존재 의미가 성립되는 독특한 성격을 지닌 교육주체이다. 따라서 관계성을 통하여 존재하는 학부모에게는 소통의 윤리가 그들의 존재 이유이며, 동시에 그들이 가장 잘 감당해야 하는 역할이 바로 관계망들 사이에서의 소통일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학부모가 관련된 교육현장의 갈등 사례가 대폭 증가하였다. 갈등이 발생한다고 해서 무조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는 없겠지만, 이와 같이 교육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들 중의 대부분이 소통의 부족이나 미숙함으로부터 발생한다.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교육주체들 간에는 오해가 증폭되기 쉽고 이로 인하여 갈등이나 폭력사태까지도 이루어질 가능성이 많다.
학부모가 교육현장에서 소통의 역할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적극적 경청과 참여의 태도가 필요하다. 학부모는 자녀를 비롯한 학생들, 교사, 다른 학부모들, 교육 행정가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이에 대하여 자신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전달하여 교육현장을 중심으로 한 의사소통이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소통이라는 것은 그저 말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생각, 감정, 정보, 자원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를 통한 ‘더불어 생각하고 더불어 살기’를 통해 인식의 향상과 최선의 문제해결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학교나 학급이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경우도 많고, 학부모들이 참여할 수 있는 자원봉사의 통로도 다양하게 열려있으며, 학교운영위원회와 같은 공식적인 기구도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때로는 학부모 역할이 한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고 자녀가 교육현장에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학부모가 한 개인으로서 소통하기에 어려운 경우도 있다. 이럴 때에는 주변의 학부모들과 의견을 모으거나 학부모 단체 등을 통하여 합리적이고 제도적인 문제해결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는 점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학부모는 다양한 소통의 통로를 통하여 의사표현과 의사결정에 참여함으로써 교육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
3) 맹목성을 넘어서는 사유의 윤리
이제는 학부모들의 평균적인 학력도 매우 높아지고, 학부모들이 교육에 대한 준전문가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대학입시에 관한한 학부모들은 교사들보다 훨씬 전문가인 경우가 많아서, 학부모들이 가진 ‘정보력’에 대한 신화들은 그 중심에 서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가지게 할 정도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보력에도 불구하고 학부모들이 가진 전문성에는 무언가 아쉬운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학부모들의 무서운 정보력이 지향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보통의 학부모라면 당연히 자녀의 최선의 행복을 지향하고 있을 터인데, 그러한 목적을 찾는 과정과 방법이 목적에 부합한가에 대해서는 보다 깊은 생각이 필요하다.
교육소설 『에밀』을 쓴 루소(J. J. Rousseau)의 관점에서 보자면, 현재 우리 사회의 학부모들은 너무나 ‘적극적’이다. 적극적인 것이 무슨 문제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학부모의 계획과 바램이 주도하는 적극성은 때로 맹목성을 불러일으키기도 해서, 자녀의 행복을 구하면서도 실은 자녀의 행복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에너지를 소진시키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즉 자녀가 행복하게 자아를 실현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일단은 모든 적극적인 노력 이전에, 자녀를 ‘관찰’하고 자녀가 가진 특성을 이해하고 자녀의 성장가능성을 신뢰하며 자녀의 고유한 성장발달의 속도에 따라 이를 조력하는 ‘소극적 교육’(negative education)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깊은 생각이 학부모의 윤리인 까닭은, 학부모가 ‘정보력의 신화’, 무한경쟁의 논리에 파묻혀, 자녀를 ‘한줄세우기’에 바쁠 때 학부모는 학부모 역할을 가능하게 하는 본연인 부모로서의 책무를 잊게 된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의 대상이 아닌 ‘존재’하는 주체이며, 부모는 ‘…하기 때문에’의 사랑이 아닌 ‘…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을 통하여 다음 세대의 생명을 길러내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부모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정보’에 휘둘리기보다는 자녀라는 확고한 중심점을 통하여 자녀를 관찰하고 그들의 소질을 찾아내고, 특성을 발견해 내며, 그 중심으로부터 잠재력을 확장시켜 나가는 민감성과 판단력을 갖추어야 한다.
윤리적인 학부모가 가장 힘 있는 자
참으로 공교육을 살릴 수 있고, 교육현장을 변화시킬 수 있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역량 있는 학부모는 바로 학부모로서의 윤리를 ‘머리-가슴-손’을 통하여 생각하고 느끼고 실천할 수 있는 학부모이다.
그렇지만 학부모의 윤리가 반드시 교육현장에 관련된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학부모는 그 자신이 한 인간이며, 사회의 시민이다. 따라서 학부모의 윤리는 한 인간으로서의 윤리와 시민으로서의 윤리와의 통합성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학부모 역할은 교육현장을 변화시키는 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를 향상시키는 일에도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사회의 변화 없이 교육이 변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학부모의 윤리에 대한 사회적 지지가 없으면 윤리적 학부모가 되는 것이 학부모의 삶을 풍요롭고 품위 있게 하는 일이 아니라, 보상도 없는 무거운 짐을 지도록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 따라서 학부모의 윤리는 삶의 영역의 다양한 측면에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학부모의 윤리 뿐 아니라 모든 윤리의 본질이 그렇지만, 윤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것이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잣대’가 아니라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거울’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학부모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변화시켜 교육현실에 참여할 수 있을 때 학부모의 윤리는 참다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