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격히 부각된 ‘창의성’ 2010년 1월 교육과학기술부는 ‘창의와 배려의 조화를 통한 인재 육성-창의 인성교육 기본방안’을 중점 과제로 발표했다. 일선 학교에서는 당장 내년부터 창의적 체험의 활동시간을 늘려야 하기에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겼다. 회사원부터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에서 창의성이 강조되더니, 이제 교육에서도 창의성은 중요한 덕목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교육에서 창의성이라는 말이 등장한 것이 최근 일은 아니다. 교육목표로써 창의성 함양이 문서화된 때는 지금으로부터 50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간다. 1955년 제1차 교육과정 보건체육과에서 ‘창의성을 기른다’는 지도 방침을 수립한 이후부터, 모든 제도권 교육기관의 교육과정 총론에서는 창의성을 언급해왔다. 이는 창의성이 예전부터 이미 중요한 교육 지향이었음을 말해준다. 물론 그렇게 반복적으로 거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창의성 교육이 달성되지 못했기에 근래의 가장 절실한 교육목표로써 대두된 것 또한 알 수 있다.
요즘 ‘창의성’이 크게 부각된 이유는 분명하다. 앞으로 먹고살기 위해서는 ‘창의성’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미래학자가 21세기에는 창의적 인재가 필요하다고 하고, 기업에서도 창의적 인재가 국가 경쟁력을 강화시킨다고 이야기한다. 한 기업 CEO는 ‘창조적인 소수의 인재가 미래를 먹여 살린다’고 까지 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창의적인 것으로 회자되는 인물은 미국 애플사의 스티브 잡스다. 스티브 잡스는 아이폰, 아이패드 등의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고, 앱스토어라는 새로운 IT 생태계를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대의 가장 혁신적인 창조자로 그를 떠올린다.
애플의 제품 덕분에 우리나라 하드웨어 업체와 정보통신 업체는 위기상황을 겪고 있다. 그래서 한국인 중에서도 스티브 잡스 같은 인물이 나와야 한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온다. 한 설문조사에서 대학생이 꼽은 국내 최고의 창의적인 인물로 안철수 카이스트 교수가 뽑혔다. 스티브 잡스와 안철수 모두 현재 경제체제에서 어려움을 겪으면서 혁신을 만들어냈다는 점이 닮았다.
창의성을 저해하는 우리나라의 교육 창의성에 대한 요구는 시대적인 절박함에서 나왔다. 그러나 아직까지 ‘창의성’의 개념조차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상태다. 창의성의 정의는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제각기 다르다.
여러 환경에 접목되는 창의성은 문제들을 뚝딱 해결해 줄 수 있는 도깨비 방망이처럼 이야기되기도 했다. 창의성이란 말이 너무 일상적으로 많이 쓰이면서 식상해진 것도 사실이다. 창의성이란 말만 많았지,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창의성이 증진됐다는 뚜렷한 증거도 없다. 오히려 한국에서 창의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우리 사회는 “창의성을 저해하거나 억압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말한다.
특히 교육 · 사회적 요인들을 많이 언급한다. 교육적 요인들은 주입식 교육, 평준화 교육, 창의성을 무시하는 교육 등이고, 사회적 요인들은 관료주의 성향, 고착되고 경직된 사회 분위기, 개방성 부족 등이다. 기존 체제로는 우리 사회에서 도저히 창의성을 길러 낼 수 없을 것 같다. 한 논문에서는 아예 동양과 서양의 교육을 비교하면서, 동양의 교육방식이 창의성을 저해하는 교육방식이라고 이야기한다.
아시아 대부분 국가의 교육방식은 노력, 인내, 끈기를 강조하는 기술습득 교육이다. 좋은 성적을 위해 반복과 암기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게다가 감정을 억제하고, 작업과 놀이를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도록 한다. 반면 미국의 경우는 탐구, 조작, 실험, 위험 감수, 개방적 과제, 사고의 수정 등 교육에서 새로움과 다양성, 기회 제공을 강조한다.
예컨대 동서양을 막론하고 강조하는 ‘일기쓰기’만 보아도, 동양권에서는 주제의 적합성, 도덕성, 근면성과 조화 등을 강조하지만, 서양에서는 풍부한 상상력과 독창성에 강조점을 둔다고 한다. 결국 아이들의 창의성을 길러주기 위해서는 기존의 우리 교육환경 전반을 바꿔야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아이들에게 새로운 스트레스가 된 ‘창의성’ 문제는, 교육당국이 창의성을 기르자는 선언만 했을 뿐, 아직까지 별 변화를 모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많은 교육학자들은 앞으로 창의성마저도 주입식으로 교육시키지 않을까 우려한다.
실제로 몇 년 전부터 강남을 중심으로 창의성 교육을 한다는 사설 학원들이 성황을 이루고 있다. 창의성을 기르기 위해서는 다양한 체험활동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쉬는 시간을 줄여가면서 창의적 체험활동을 하게 해 학생들은 더욱 피곤해졌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기록하고 평가해 대학입시에 반영한다고 하니, 아이들에게 창의성이란 새로운 스트레스와 고민거리가 되어버렸다.
일반적으로 창의성 연구에서 강조하는 것은 호기심, 몰입, 개방성, 독자성, 위험 감수, 실패와 장애에 대한 인내심, 모호함에 대한 인내심 등이다. 창의적 체험활동으로 아이들에게 창의성을 발현할 기회를 제공하고, 교실 안에서도 보상과 칭찬 등을 통해 아이들의 창의성을 키워주는 것이 목표다.
그러나 정작 아이들은 이러한 경험들이 낯설다. 그동안 아이들에게 호기심이란 갖추어야 할 덕목이 아니었다. 암기 위주의 수업에 익숙해진 아이들에게 호기심은 스스로를 더욱 피곤하게 만들 뿐이다. 그래서 교육현장에서는 질문하는 아이들이 많지 않다. 아이들은 질문이 잘 생각나지도 않거니와 왜 질문을 해야 하는지 이유조차 모른다. 어차피 알아야 할 것은 선생님과 교과서가 알려주고, 아이들은 그것을 잘 외우기만 하면 된다. 오히려 아이들 사이에서는 질문이 수업시간을 연장하는 눈치 없는 행위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또한 어떤 질문이라도 통용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는다. 아이들은 선생님들이 원하는 질문을 해야 할 것이라는 강박관념을 가진다. 그래서 잘못된 질문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 교사의 의도와 상관없이 아이들은 질문시간이 되면 경직된다. 질문을 하는 아이는 튀는 아이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이렇게 아이들은 질문하는 모험을 꺼리게 된다.
모험 기피, 안정된 삶을 꿈꾸는 아이들 창의성은 모험심으로 시작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새로운 시도 속에서 창의성이 발현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러한 실패를 용인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았다. 경쟁이 심화되고 사회적 안전망이 더욱 축소되는 사회에서 실패란 곧 죽음으로 인식된다. 아이들은 실패하면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한다.
그래서 오히려 ‘혼자 튀는 것’보다는 집단 안에서 동질감 유지에 몰두한다. 친구들과 다른 생각을 하기보다는 친구들과 비슷한 생각과 경험을 공유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친한 친구들을 따라하는 동료문화가 청소년기에는 더욱 발달하게 된다. 심지어 그 문화적 속성이 경쟁이라고 하더라도 아이들은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아이들은 학원에 가는 것을 선호한다.
학원은 대부분 단기간 빠르게 지식을 암기하여 성적을 향상시키는 것을 학습 원리로 활용한다. 이 안에서 배움에 대한 인내심이 발휘될 여지는 없다. 오로지 학원 강사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수동적으로 암기하는 교육과정을 선호한다. 모순적이게도 경쟁적인 분위기가 숨 막히게 답답하지만 오히려 편안하기도 한 것이다.
최근 대학생들은 스펙 관리라는 경쟁을 통해서 자기 증명을 한다. 그 과정에서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현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있지만, 고시, 토익시험 등의 점수를 통해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그 안에서 정체성을 찾아간다. 경쟁에 중독된 아이들에게 창의성이란 뜬금없는 이야기일 수 있다. 입시라는 틀 자체가 변하지 않는 한, 아이들에게 창의성은 국 · 영 · 수 중심으로 공부하기도 바쁜데 또 갖춰야 할 새로운 종류의 스펙에 불과하다.
아이들은 굳이 스티브 잡스가 되려는 꿈을 꾸지도 않는다. 최근 아이들의 직업관을 살펴보면 공무원, 교사 등 안정적인 직업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부모세대에서부터 시작한 경제위기 경험과 선배 세대(현재 20대)의 스펙 경쟁을 지켜보는 아이들에게는 가장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이다.
이러한 직업관 속에서 창의성이란 불필요하거나, 상관없는 남의 이야기가 된다. 창의성을 일반적인 직군에서도 발휘되는 보편적인 능력이라기보다는, 특이한 직종에서 발휘되는 능력으로 치부한다. 그래서 과거에는 창의적인 롤모델의 성공사례를 제시하면 그러한 롤모델을 닮기 위해 추종했지만, 요즘은 오히려 그러한 롤모델은 나와 다르다며 분리한다. 창의적이라고 말하는 선배 세대들의 노력과 열정은 자신과는 무관한 이야기일 뿐이고, 그러한 롤모델처럼 고생하고 싶지도 않다.
그냥 편하게 살고 싶은 아이들에게 창의성은 경쟁에서 뒤처지게 하는 요인이라고 생각하거나 쓸모없는 모험을 강요하는 것일 뿐이다. 아이들에게 창의성은 ‘별 일 없이 살고 싶은’ 자신들에게는 걸맞지 않는 공포스러운 능력이다. 그러나 변화의 주기가 점점 더 짧아지는 불안한 사회에서 창의성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누구나 창의적일 필요가 있을까? 그렇다고 모든 아이들에게 굳이 창의성을 강요할 필요는 없다. 창의성은 인간의 여러 능력 중에 하나일 뿐이지 모든 능력을 대신해주지는 않는다. 모두가 창의적일 필요는 없다. 누구나 창의성을 기를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만들어지면 되는 것이다. 만약 이런 환경이 만들어지면, 중요한 질문은 ‘과연 어떤 창의성이 더욱 필요한 것인가’일 것이다.
창의성 연구의 선도적인 연구자 중 하나인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교수 연구팀은 ‘훌륭한 전문직업인 되기 연구 프로젝트(The Good Work Project)’에 참여하면서부터 창의성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훌륭한 직업인이란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일을 질적으로 매우 높은 수준(High quality)로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앞선 스티브 잡스나 안철수 같은 기업 경영인의 경우 자신의 분야에서 더 높은 이익을 얻기 위해 창의성이 필요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일이 사회적으로 책임감(Socially responsible)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람들의 예로 마하트마 간디, 마더 테레사와 같은 사람을 든다.
칙센트미하이는 연구의 취지문에서 창의적인 젊은 영재들이 앞으로 사회적인 책임감, 가치관, 목적을 갖고 훌륭한 직업인이 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이 목적이라 밝혔다. 즉, ‘인간으로서 도리를 다할 수 있는 창의성(Humane creativity)’을 발휘하도록 해야 한다는 교육적 사명감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결국 우리가 아이들이 창의성을 기르기를 바란다면, 창의성의 시초에 대한 고민부터 해야 한다. 점점 무기력해지고 자신감을 잃어가는 아이들에게 창의성을 기르라고 윽박지를 것이 아니라, 창의성이 왜 필요한지부터 함께 고민할 필요가 있다. 창의성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과 같은 새로운 능력이 아니라, 이미 아이들 안에 내포되어 있는 잠재성이라는 것을 바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에게 어떠한 창의성을 길러 주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교사로서의 고민을 시작해야 할 시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