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최대의 대재앙 발생
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지 한 달이 넘게 지났다. 지금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대재앙이 점점 잊혀져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도 현지에서는 복구가 한창일 것이고, 여전히 어떻게 복구해야 할지 막막해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일본에서 벌어진 이번 대지진과 대형 쓰나미, 원전 손상은 엄청난 피해를 남겼다. 우리는 일본 대지진과 거대한 쓰나미, 게다가 일촉즉발 원전의 위험까지 고스란히 텔레비전을 통해서 볼 수 있었다. 자연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진 인간 문명의 초라함을 보면서 삶의 겸허함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일처럼 아파할 수 있을까?
가장 가까운 나라인 일본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 일은 아니다. 마음 한편 ‘여기’가 아닌 주변 ‘거기’ 일본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생각되는 마음도 있다.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이란 책을 보면, ‘사람들이 정말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대부분 ‘이미지’로 전달받는다. 거대한 쓰나미가 마을을 덮치는 경이로운 이미지를 보며 사람들은 마치 ‘영화’와 같다고 이야기했다. 실제로 자신한테 일어난 일이 아닌 이상, 모든 고통은 객관화된다. 그래서 우리는 좋든 싫든 고통을 소비하는 관망자가 될 뿐이다. 그래서 수전 손택은 이미지로 전달되는 뉴스를 아무리 주의 깊게 본다고 해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전 지구적 문제들을 결코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아직 비극이 일어나지 않은 장소에서 살아가며 아무도 잘못하지 않은 재앙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무력감을 준다. 피해자들을 보며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함께 아파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수전 손택은 “재앙 앞에서 무력감을 느껴보아야만 세계를 함께 살아가려 하며 연대가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때서야 조그마한 것이라도 같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게 된다고 말한다.
다행히도 일본의 불행에 전 세계 사람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일본을 응원했다. 영국의 한 신문에서는 신문 전면에 ‘일본 힘내라’는 광고를 했고, 각종 스포츠 경기 이전에 희생자들을 추모하기도 했다. 전 세계에서 성금을 모으는 모습을 통해 이번 지진의 피해 이후 많은 세계인들이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공감하기 때문이다. 이해와 공감이 다른 것은 단지 아는 것의 차원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조그마한 행동으로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에 바탕이 되는 능력을 ‘공감능력’이라 부른다.
타인의 불행 앞에서 굳이 냉정할 필요가 있을까?
일본의 불행한 재앙 앞에 우리 국민들도 많이 걱정하며 응원했다. 각계각층에서 일본 대지진을 돕기 위한 성금을 신속하게 모았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그렇지 못한 의견을 나타내기도 했다. 특히 언론이 문제였는데, ‘일본 침몰’이라는 자극적 헤드라인으로 불행을 상품화하며 구경거리로 만들었다. 어떤 신문에서는 일본의 재앙을 통해 우리에겐 어떤 이익이 있는지를 신속하게 분석하기도 했다. 또 어떤 종교인은 재앙의 원인을 종교의 문제로 이야기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일본은 우리와 역사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나라이다. 그래서 인터넷상에서는 ‘천벌을 받았다’는 식의 반응도 많았다. 그리고 역사교과서와 독도 영토문제로 인해, 일본을 도와주지 말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도와줘도 감사해 하지 않을 것이라거나, 한일 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옳고 그르다는 판단을 떠나 냉소적인 태도이다.
불행 앞에서 냉정한 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공감하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물론 우리와 일본은 역사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순진하게 믿어보자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의 현재 고통 앞에서 굳이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며 모든 일에 계산적일 필요는 없다.
일부 청소년들과 이야기해보니 너무 역사교육을 충실하게 받았는지, 과거사가 청산되지 않아서 껄끄러운 앙금이 남았는지, 일본의 불행한 재앙에 쉽게 공감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이런 와중에 역사적으로 일본의 가장 큰 피해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은 재앙의 희생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추모하며 인류애가 더욱 중요하다고 이야기했다.
공감능력이 부족해지는 아이들
최근 청소년들의 공감능력이 떨어지고 있다며 우려 섞인 목소리가 많다. 요즘 청소년 문화를 살펴보면 ‘자기’를 강조하며, ‘타인’을 배척한다. 일상적인 일이 되어버린 왕따현상은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들의 심정을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다. 최근 뉴스에서 보도돼 충격을 준, 애완동물들을 집단적으로 죽이는 청소년들은 동물들이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것을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공감능력을 향상시키는 일은 주로 부모에게 달렸다. 부모와의 의사소통의 양에 따라 공감하는 능력이 달라진다는 것이 학계의 대다수 의견이다. 그러나 부모의 책임으로만 돌리기에는 불충분하다. 부모의 사랑은 아이들의 공감능력을 형성하기도 하지만 지나치게 일방적이면 통제 불능의 개인주의를 야기하게 된다. 특히 대부분 형제나 자매가 없이 홀로 자라는 요즘 아이들에게 지나친 부모의 관심은 과잉보호로 변질되기 쉽다.
오히려 공감능력은 다른 사회적 관계에 의해서 형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이 다른 사람들과 만나는 경험은 제한적이다. 아이들이 타인과 관계를 맺는 일은 대부분 학교에서 이뤄지는데, 요즘처럼 경쟁이 치열한 환경에서는 학교에서 만나는 친구들이 잠재적 경쟁 대상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감정을 털어놓는 것에 부담을 느낀다. 학교 교사의 경우 한정된 애정을 공평하게 분배하려고 노력하지만 아이들에게 충분한 만족감을 주기에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예전 아이들은 주로 ‘마을’에서 관계 맺는 방법을 배웠다. 마을 안에서 부모님 이외의 다른 어른들에게 사랑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꾸중을 듣기도 하면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달리 공동체가 파괴된 고립된 환경에서 자라는 요즘 아이들은 관계 맺는 것이 상대적으로 서투를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공감능력도 떨어질 수 있다.
요즘 아이들이 이기적이라거나, 개인주의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비판은 지나치게 단순한 평가다. 요즘 아이들만의 특성이라기보다 사회구조의 변화로 인한 결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따라서 최근 일어나는 청소년들의 충격적 범죄를 청소년 개인의 문제나 게임 등의 미디어 때문에 모방한 범죄로 보기보다는, 요즘 아이들이 처한 사회적 구조에서 원인을 찾을 필요가 있다. 후키시마 아키라라는 일본의 범죄심리학 전문가가 쓴 <아이를 죽이는 아이들>이라는 책을 보면, 아이들의 범죄는 복합적 요인에 의해 발생하는 사건이라고 이야기한다. 주로 뇌의 미세 변이, 발달장애나 정신장애와 같은 특수한 요인, 그리고 양육환경과 교육의 영향, 개인의 특이한 성격 등 요인들이 갖춰진 결과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을 쉽게 교화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억압적인 사회분위기는 이러한 청소년 범죄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더 키울 것이라고 진단한다. 이러한 주장을 근거로 했을 때, 청소년범죄는 원인을 단순화 하면 할수록 왜곡되고 ‘충격’과 ‘경악’을 주는 사건들은 끊임없이 재생될 것이다.
공감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
이러한 끝없는 문제의 발생을 막기 위해 사회의 구조를 변화시킬 의지가 없다면 아이들에게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줘야 한다. 범죄란 자신(가해자)과 대상(피해자)을 분리해야만 이뤄질 수 있는 행동양식이다. 그렇기에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면 자연스레 줄어들 수 있다. 아이들이 점점 타인에게 ‘무감각’해지거나 타인과의 관계를 ‘계산적’으로 바라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공감능력을 향상시켜줄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미디어 리터러시와 같이 ‘공감 리터러시(Emphatic literacy)’라는 말이 중요 단어로 등장했다. 미디어를 읽고 쓰는 것만큼, 감정을 읽고 쓰는 능력이 중요해진 것이다.
어른들의 걱정과 달리 청소년들의 ‘공감능력’은 점차 향상될 것이란 기대도 있다. 제러미 리프킨이 최근 쓴 <공감의 시대>에서는 인간 본성은 경쟁보다 협업을 지향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최근 경제체제의 변화와 커뮤니케이션의 변화는 이러한 협업의 모델로 진화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지금 인류는 지구온난화 등 생명권의 붕괴와 함께 세계 경제 침체라는 위기에 직면했기에, 적대적 경쟁보다는 유대감이 필요한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요즘 CEO의 가장 큰 덕목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공감하는 능력이다. 한 개인이 고립 상태에서 홀로 번창하는 것은 한계가 있으므로, 협력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빠르게 확산하는 것이 커뮤니케이션 혁명인데, 요즘 유행하는 SNS(Social Network Service)도 여러 사람들이 ‘공감’하는 능력에 기대하는 서비스이다.
청소년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는 페이스북(Facebook)과 같은 커뮤니케이션 툴도 친구들과 서로의 일상을 나누면서, 공감하기 위해서 활용되기도 한다. 도시화로 인해 물리적인 경계가 있음에도 이를 초월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달로 인해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제러미 리프킨은 미래세대는 전세대의 인류들과 달리 협력을 할 수 있는 인류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한다. 다소 지나치게 낙관적인 견해일지도 모르나, 너무 비관적으로 청소년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반성하게 한다.
이제는 세계시민이 될 미래세대에게 거는 기대
지진이라는 대재앙 이후 전 세계는 일본의 아픔에 함께 공감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것은 기존의 지역적(Local)인 사고를 넘어서 전 세계적(Global)인 고민으로 넘어가는 징후다. 오히려 역사적인 문제 때문에 일본을 도와줘야 하나 고민하는 기성세대와 달리 미래세대들은 인류애의 문제로 접근할 가능성이 더 높다. 어쩌면 이번 사건을 통해서 미래세대들은 기후변화와 환경문제, 대체에너지 문제 등의 국제적 문제를 깨닫고 전 세계적인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성장하도록 우리 청소년들을 교육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
결국 지금 우리 교육이 고민해야 할 것은 한 개인의 능력을 향상시키기에 앞서 미래세대로 하여금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세상임을 깨닫고 타인과 공감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미 아이들은 여러 네트워크를 스스로 만들어내며 나름의 방식으로 소통하고 있다. 또래들과 자신의 고민을 나누려 하며, 끊임없이 소통을 갈구하고 있다. 우리 교육에서 현재 가장 필요한 것은 아이들과 소통하려는 자세이다.
너무나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고 절망할 수밖에 없을 때에도 우리에겐 꿈을 걸 수 있는 미래세대가 있기에 희망이 있다. 그래서 선행세대가 해야 할 일은 앞으로 미래세대들이 인류가 처한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