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학교폭력 문제가 전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대구 한 학교에서는 두 명의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광주에서도 왕따를 당하던 학생이 결국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어제오늘의 비극이 아니다. 매년 되풀이되고 있다.
가해자나 피해자의 연령도 낮아지고 있다. 초등학교의 경우 2000년대 초반 학교폭력 발생빈도가 약 8.5%에서 지난해 17.8%로 크게 늘었다. 중학생들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초·중·고를 합한 전체 학교폭력의 약 70%가 중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실제로 2008년~2010년까지 3년 동안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에서 심의한 학교폭력 사건은 2만2,241건이었다. 이 중 69%에 해당하는 1만 5,311건이 중 학교에서 발생했다.
이런 특성은 전문가들의 연구에서도 잘 나타난다. 영국 런던대 인지신경학연구소의 보고에 의하면 청소년기에는 난폭한 운전, 음주, 폭력 등 위험한 활동이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주변 연령대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만 14세가 되면 정점에 이르는데 우리로 보면 중학교 2~3학년에 해당하는 시기다.
또한 이때는 신체적으로 급성장하면서 물리력에 의존하려는 욕구가 가장 큰 때다. ‘거침없는 중2’ 때문에 북한이 남침을 못한다는 농담이 나온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말 그대로 ‘질풍노도(疾風怒濤)’의 시기다.
학교폭력은 복합적 문제의 결과물
폭력에 대한 원인은 매우 다양하다. 구조적인 문제와 개인적인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학교 대형화(giant school)의 문제도 있다. ‘자이언트 스쿨화’는 필자의 진단이다. 경제적 양극화, 가정의 해체,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와 같은 사회·환경적 변화도 영향이 크다.
입시경쟁도 물론 한 몫을 한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과거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대학 진학률은 24%에 불과했다. 하지만 경제성장과 더불어 먹고 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자 대학진학에 대한 열망이 높아졌다. 여기에 대학의 숫자가 급증하면서 대학 졸업자들에 대한 사회적 평가도 달라졌다. 이제는 너도나도 대학에 진학하는 상황이 된 만큼 과거처럼 대학졸업 여부가 관건이 아닌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가 더욱 중요한 사회적 평가가 되었다.
실제로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지방대학들이 어느 정도 평가를 받았지만 현재는 사회적 시선을 받지 못하고 있는 예들이 이런 분위기를 잘 방증하고 있다. 대학진학에 대한 양적 기회는 늘었지만 질적인 부분에서는 과거에 비해 더욱 경쟁이 치열해졌다는 것, 바로 이런 변화도 학교폭력을 더욱 심화시키는 또 하나의 기제가 되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학교폭력은 학교울타리 안에서 발생한 것일 뿐 실제로는 학교 밖의 다양한 원인들이 얽혀 발생하는 ‘폭력의 종합세트’인 셈이다.
‘관계관리’ 잘 하는 교사 돼야
교육학자 매니스와 멜저(Manis & Meltzer)에 의하면, 학교생활은 교사와 학생 간의 계속되는 협상으로 이루어진다. 그 속에 확인, 해석, 계산, 선택과 같은 상호적인 역동성이 존재한다. 그런데 학생들과의 협상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교사들이 학생들을 장악의 대상으로만 여기기 때문이다. 어렵지만 학생들을 파트너로 인정해야 협상이 가능해진다.
공지영과 지승호의 책 <괜찮다. 다 괜찮다>에 나오는 “남들 눈엔 비뚤어져 보여도, 벌레 먹어 보여도 괜찮다. 넌 어느 순간에도 원본이야.” 바로 이런 인식을 지녀야 관계관리가 가능해진다. 이런 시각에서 아이들과 협상하지 않으면 백전백패(百戰百敗)하고만다. 더 정확히 말하면, 교육적인 지도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사춘기를 겪는 시기란 점도 인식해야 한다. 사춘기는 에너지가 넘치는 시기다. 말릴수록 에너지는 더욱 들끓는다. 끓는 기름을 식히기 위해 물을 부어보라. 생각하지 않아도 결과는 뻔하다. 그러므로 협상과정에서 울타리를 크게 치는 것이 중요하다. ‘울타리 있는 방목’으로 생각하면 의외로 쉽게 풀린다. 참고로 ‘울타리 있는 방목’, ‘관계관리’란말은 필자가 담론에서 사용하는 조어다.
교사의 공감적 리더십도 필요하다. 공감적 격려는 학생의 감정과 정서를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면의 세계는 어떤지, 인지 심리학적 특성은 어떤지를 우선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이를 위해 ‘공감’, ‘경청’, ‘이해’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관계관리 기술의 핵심이다. 최근 교육현장에서 강조되는 공감리더십도 이런 것 아니겠는가.
아이들 내면에 집중하자
과거 우리의 경험이 그랬듯, 아이들은 교사에게 쉽게 다가가지 않는다. 자신의 고민과 내면을 말하고 싶지만 용기가 없는 경우도 많다. 이런 부분들을 교사가 선제적으로 살펴야 한다. 아이들을 집단 이데올로기 속에서 보지 않고 개인으로 보면 문제가 보인다. 누가 속으로 곪아 가는지, 누가 힘들어 하는지 살필 수 있다. 세심한 눈으로 아이들의 내면에 집중한다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폭력적인 아이들은 폭력이 이미 내면화되어 있다. 이런 아이들에게 체벌 중심의 물리적 지도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식의 지도는 폭력을 확대 재생산시키는 부작용을 낳는다. 실제로 스포츠계의 폭력이나 군대 폭력이 대물림 되는 것은 이런 일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으로 폭력에 대한 무감
각을 키운 탓이다.
문제 아이들은 일면 마음의 환자들이다. 마음의 상처가 폭력이란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학교폭력은 학생들의 내면을 살피지 않고는 해결되지 않는다.
결국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관심과 애정이다. 아이들이 이를 느끼는 순간 변화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아이들과 감정적으로 교류해야 한다.
사랑의 소통·밀착지도가 최우선
학교폭력이 어제오늘 발생하는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사회적 환경이 과거에 비해 크게 달라지면서 발생빈도가 높아지고 있다. 이런 속에서 중요한 숙제는 학교폭력을 어떻게 예방하고 대처할 것이냐의 문제다. 학교폭력은 일단 발생하면 교사들이 지도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다. 사후처리도 쉽지 않다. 교사들의 예방·선제적 개입이 중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다면 ‘예방적 개입’의 기본은 무엇일까? 바로 교사들의 밀착지도다. 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학생들과의 관계관리를 통한 소통도 중요하다. 이로써 아이들 내부의 역학관계나 학생 개개인에 대한 상황파악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
폭력 없는 학교를 만드는 것, 결코 불가능한 현실은 아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상처 받았다는 입장에서
상처 주었다는 입장으로 가는 것
상처 준 걸 알아챌 때
우리는 비로소 어른이 된다
노희경의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중에 나오는 말이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소통이라면, 소통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다. 일회성 지도가 아닌 지속
적인 관찰과 집중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