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 20분, 봉화중 3학년 1반 첫 도덕수업.
학생들과 처음 대면하는 설렘과 약간의 어색함사이에서 김태훈 교사의 수업은 ‘약속’으로 시작됐다. 김 교사는 수업의 전체개요와 평가계획을 설명하면서 올해는 1반 학생들의 ‘행복한 성적표’를 작성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 약속 앞에 학생들의 반응은 호기심 반 생소함 반이다.
김 교사의 이 다짐에는 교사와 학생이 동떨어진 관계에서 제3의 지식을 전하는 게 아니라 교사와 학생이 친밀하고 서로에게 관심을 갖는 관계를 형성하여 서로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지식을 전달하려는 숨은 뜻이 들어있다.
‘행복한 성적표’는 A4용지 2~3장으로 김태훈 교사의 빽빽한 글이 담겨있다. 학생 개인을 상대평가나 ‘수우미양가’로 구분하는 일반적인 성적표가 아니다. 한 학기 동안 수업에서 학생이 보여준 모든 것이 기록돼 있는 행복한 성적표를 받아본 학생과 학부모는 개별적이고 상세한 김 교사의 서술평가에 감탄하기 마련이다.
입학사정관제 도입으로 학생들의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수십 장의 대입추천서를 쓰는 교육 현실에서 김 교사는 “시험에 나올 것을 가르치게 되면 무엇을 가르칠지 고민하지 않게 되지요. 단지, 교과서에 나온 내용을 잘 전달해서 학생들이 시험을 잘 치르게 하는 것이 수업의 목표가 될 뿐”이라며 “행복한 성적표는 수업에서 나타나는 학생의 모습을 담담하게 담는 데 주력합니다. 학생들과 만남이 있고, 감동이 있고, 기록할 내용이 있기 위해서는 적합한 수업 방법과 수업 자료를 찾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결국 교사는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합니다”라고 전했다.
행복한 성적표를 기록하기 위해서는 학생 개인을 점수로만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 개별에 대한 관찰과 그 학생에게 필요한 학습방법을 고민하는 과정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학생 개개인의 학습 과정에 대한 서술적 기록2009년부터 행복한 성적표를 나눠주기 시작한 김 교사는 올해 봉화중에서 맡고 있는 9개 학급 가운데 1학기 2개 반, 2학기 2개 반 총 4개 학급에 이 성적표를 나눠 줄 계획이다. 3학년 1반 학생 30여 명 가운데 3분의 2 정도는 그의 수업을 받은 경험이 없거나 행복한 성적표를 받지 못했다. 보다 많은 학생들에게 객관적인 행복한 성적표를 주기 위해서는 평소 관찰과 기록이 필요하고, 무슨 고민을 하고,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학생들과 대화도 많이 해야 한다.
1주일에 한 번 있는 수업 시간마다 강의식 수업에서는 학생명렬표를 활용해 학생의 발표와 수업준비, 수업태도 위주로 간단하게 메모한다. 김교사는 “강의실 수업은 수업과 관찰을 병행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서술적 성적기록이 자칫 수업에 부담을 줄 수도 있죠. 태도의 종류와 날짜를 적어 서술적 기록의 근거를 확보해요”라고 설명했다.
조별수업에서 ‘모둠좌석형 수업상황 기록표’를 따로 만들어 본격적인 관찰을 한다. 학기 초에 그룹별 탁자에 학생들이 앉는 대로 이름이나 번호를 적어두고, 다음 수업부터 간단한 기호를 이용해 표시한다. 모둠활동을 열심히 하는 학생은 P, 준비물을 잘 준비해온 학생은 M, 산만하여 조별 활동에 협조를 안 하는 학생은 B, 리더십 있게 조별 활동을 이끌어가는 학생은 L 등으로 표기하여 서술적 성적표를 기록할 때 기초자료로 활용한다.
특히 김 교사는 학생들이 제출한 수행평가 과제에 대한 서술적인 기록을 주된 자료로 삼는다.
“한 학기에 3~4차례 있는 수행평가는 지금까지 점수만 기록했으나 이제는 주의 깊게 살펴볼 수 있는 평가기준을 추가로 생각한 다음, 그 기준에 맞게 명렬표에 구체적인 사실을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말하기 평가를 할 경우 학생의 장단점을 보다 구체적으로 적고, 특기사항을 한두 가지 추가하여 서술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예전에는 말하기 평가를 학생 A는 7점, B는 8점으로 끝냈다면 A는 논리성 4점에 적극성 3점, B는 논리성 4점에 적극성 4점과 같은 방식으로 한 줄씩 더 기록한다. 이것만으로도 학생을 이해할 수 있는 훌륭한 자료로 남는 것이다.
진정한 교육적 만남과 학생·학부모의 무한신뢰김 교사는 한 학기가 끝나면 학생들로부터 수업평가서를 받는다. 수업 평가서에 교사의 수업에 대한 의견과 함께 자신의 수업 과정에 대한 장단점을 적게 한다.
“학생들이 수업평가서에 적은 내용을 요약하여 행복한 성적표의 자기평가란에 옮깁니다. 행복한 성적표가 학생의 성장과 발전을 위한 자료가 되므로 학생의 자기 평가를 싣는 것은 의미가 크죠. 놀라운 사실은 학생들은 성적이 높든, 낮든 의외로 자신의 한 학기 수업 상황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반 30여 명에 대한 행복한 성적표를 기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7~10시간. 학생평가, 행정업무, 생활지도 등으로 바쁜 학기말에 이만큼의 시간을 할애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터. 몇 줄 안 되는 생활기록부를 작성하는 데도 힘이 드는 상황에서 김 교사는 변함없이 행복한 성적표를 작성한다.
“학생들에게 이 성적표를 나누어 줄 때 가장 행복합니다. 서로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확인받는 느낌이 들어요. ‘내가 이렇게 너희에게 관심이 많다’라는 느낌이 들고, 학생도 ‘선생님이 이렇게 나에게 관심이 많았음’을 느끼면서 순간적으로 신뢰의 느낌이 공명됩니다. 이때가 참 좋습니다. 경쟁에 매여 있는 교육이 아니라 보람 있는 가르침을 한다는 기쁨이 느껴지지요.”
행복한 성적표에 대한 학부모의 반응 역시 뜨겁다. ‘장단점을 세밀히 관찰하여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주시려는 열의와 노고,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그대로 전해져 옵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말
씀하신 대로 방학동안 독서를 열심히 할 수 있도록 같이 힘쓰겠습니다.’ 행복한 성적표로 연결된 진정
한 교육적 만남이 교사와 학생에서 학부모로까지 이어진다.
학생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진정한 ‘멘토’교사가 학교에 출근하여 수업을 위한 고민에만 집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교육환경은 학급당 과다한 인원수, 과중한 행정업무, 담임의 무한 책임부담 등으로 어렵기만 하다. 이러한 현실에도 김 교사는 “학생은 교육을 받기 위해 교사에게 맡겨졌습니다. 교사로서 나에게 맡겨진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내가 가르치는 교과에 대한 개별적인 진단과 처방이 필요합니다”라고 강조했다.
김 교사는 좋은교사운동과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바람직한 교육에 대한 동기부여를 받고 있다. 행복한 성적표를 나눠주는 것만으로 학습과정에 대해 교사와 학생이 더 가까워지고, 서로를 신뢰하며 교사가 말 한 마디를 전해도 학생이 받아들이는 깊이가 달라진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문제아로 낙인찍힌 아이들이라고 해도 그 아이의 곁모습만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성격상의 특징과 성장과정에 관심을 갖기 때문에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긍정적인 영향이 나타납니다. ‘저 선생님은 내가 신뢰할 만한 분이야. 적어도 저 선생님의 말은 들을 필요가 있어’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이죠.”
행복한 성적표에서 보여준 신뢰와 관심을 통해 학생들의 성장을 지지해 주는 김태훈 교사. 김 교사가 지난 5년간 학생들에게 나누어 준 행복한 성적표는 입시와 경쟁으로 치닫는 학교를 ‘진짜 학교’로 바꾸기 위한 씨앗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