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저마다 새로운 꿈을 품고 총총히 걸어가는 신입생들을 바라보자니 문득, 학교는 ‘나무와 숲, 그리고 이들을 가꾸는 사람이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교육자로서 학교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우선 학생들이 학교가 신체적·물리적으로 안전한 장소로 느껴지도록 해야 한다. 나무가 튼튼히 자라기 위해서는 양질의 토양이 필요하듯이, 친구들과 서로 어울리며 우정을 느낄 수 있는 즐거운 곳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서로 다른 나무들이 어우러져 건강한 숲을 이루듯이 각자 다른 특성을 가진 학생들이 소외되지 않고 존재감을 느낄 수 있도록 개개인이 존중되는 환경과 교육적 배려가 있어야 한다. 나무는 뿌리가 견딜 만큼만 자란다. 학교가 ‘안전한 장소, 즐거운 장소, 각자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인식된다면, 그래서 학교가 늘 행복한 나를 꿈꾸는 ‘가고 싶은 곳’이 된다면, 학교는 학생들에게 각자의 뿌리를 튼튼히 내리게 하는 양질의 토양 역할을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올바른 역사관과 국가관의 바탕 하에 편견 없는 기본적이고 표준적인 지식이 제공돼야 한다. 자신들의 편협하고 비뚤어진 이념적인 역사관을 학생들에게 심으려 하는 것은 자라는 나무를 갉아먹는 해충의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나무를 삐뚤어지게 자라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서로 다른 두뇌 특성을 가진 학생들을 모두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교육적인 다양성이 제공돼야 한다. 지금의 교육환경은 언어 중심의 교육과 평가, 그리고 학과 성적 중심의 좌뇌 편향적인 교과과정으로 구성되어서 비언어적, 시공간적, 창의적이고 정서적인 우뇌형의 학생에게는 불리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교사의 절대다수가 좌뇌형 교사로 구성되어 있어 우뇌형 학생의 마음을 이해하기엔 한계가 있다는 것도 현재 교육환경이 처한 문제이다. 그래서 교사의 다양성도 재고되어야 할 부분이다.
학교에서 마저 소외되고 좌절되고 상처받는다면, 이는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크나큰 손실이다. 학교나 사회가 성적이 좋은 학생들만 존재감을 느낄 수 있게 한다면 이는 특정 나무만 자라게 하고 나머지 나무들은 시들고 말라죽게 방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학교가 각자의 특성에 맞는 교육적 환경을 제공한다는 것은 특징이 있는 서로 다른 나무들이 모두 잘 자라 건강한 숲을 만들게 하는 것이다.
더불어 학교는 자라지 못하고 시들어가는 나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치유의 역할도 해야 한다. 성적 위주와 학벌주의, 그리고 선거에 당선되면 교육감 자신의 존재감을 심기 위해서 기존에 자라고 있는 나무들을 갈아엎어 버리고 자신들의 나무를 심으려고 하는 행위들은 건강한 숲을 망치는 자연 파괴 행위이나 다를 바 없다.
다시 한 번 생각한다. ‘교육자는 건강한 숲을 만들고 가꾸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누구를 위하여 교육하는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