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은 서로 마주보는 ‘관계’에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교사와 학생, 부모와 자식, 친구와 친구 사이의 관계가 중요해진다. 특히 저출산-저성장 시대를 맞아 인성교육은 가정보다 학교의 책임이 무거워졌다. 학생의 올바른 인성교육은 거울이 되어주는 ‘교사’와의 관계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교사의 존재가 인성교육의 내용이자 방법이 된다.”
안양옥 한국교총 회장의 자전적 에세이 <인성을 가르치는 학교>의 한 문장이다. 인성교육을 얘기하면서 그를 빼놓을 수 있을까. 발로 뛰고 가슴으로 확인하며 한국의 인성교육 교과서를 다시 쓴 사람, 안양옥.
그가 지난 12월 15일 서울 서초구 우면동 한국교총회관에서 인성교육을 재조명하고 한국교육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2016년 병신년(丙申年) 새해를 맞아 인성교육과 교육감직선제 헌법소원, 교원 사기진작 등 교육현안에 대한 입장과 한국교총의 발전 방안 등을 들어봤다.
공무원연금개혁,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누리과정 예산 등 격동의 2015년을 보낸 소회는. 그 어느 때 보다 치열한 1년을 보냈다. 특히 7개월 여 간의 공무원연금 대타협기구, 실무기구 구성과 여·야 정치권의 합의 등의 경험은 힘들었지만 좋은 자산이 됐다. 공무원연금법 협상을 놓고 두 차례(2014년 11월, 2015년 3월)에 걸친 대규모 집회 등 다양한 장외투쟁과 7개월간의 협상 투쟁을 통해 전국 50만 교육자와 연금수급 교원의 권익보호와 노후보장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다행이 최악의 공무원연금법 개정은 막았다. 무엇보다 ‘교원 및 공무원의 인사정책 개선 방안 협의기구(인사혁신처 설치) 통해, 그동안 해결 못한 교원의 보수?인사 정책의 개선을 이룬 점은 성과로 평가하고 싶다.
지난해 말 헌법재판소가 교육감 직선제 헌법소원에 대해 각하 결정을 내렸다. 헌재가 1년 3개월 여간 심리 끝에 국민의 기본권 및 평등권, 공무담임권 침해 여부만 판단하고 정작 헌법 제31조4항에 규정된 교육의 자주성과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헌법적 가치와 교육감 직선제 폐해에 대한 심리는 전혀 다루지 않은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헌재의 헌법소원 각하 결정을 두고 언론이 교육감 직선제 합헌이라고 보도한 것은 명백한 오보다. 실제로 헌재는 이례적으로 기자들에게 설명자료를 내고 ‘교육감 직선제 헌소 선고 결과를 합헌으로 해석하고 보도하는 것은 오류’라고 바로 잡은 바 있다. 헌재가 내린 ‘각하’ 주문은 적법 요건이 갖춰져 있지 않다는 뜻으로, 합헌 또는 위헌이라는 판단의 전 단계에서 이뤄지는 헌재 결정의 한 유형일 뿐이다.
교육감직선제 헌법소원 각하 유감…‘합헌’ 보도는 오보
헌재는 교육감 직선제가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학교 제도는 본질적으로 공화주의적 관점에서 만들어 진 것이다.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바라 볼 게 아니다. 학교는 교육하는 곳이다. 때문에 학생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본질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기본권 확대’라는 잣대를 학교에 적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군대도 마찬가지다.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학교나 군대는 일정 부분 기본권을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반 시민사회에서 요구하는 기본권 잣대를 있는 그대로 학교에 적용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본다.
교육감 직선제를 바꿔야 한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나. 그렇다. 교육감 직선제는 그 자체가 주민 참여의 지방자치 원리만 적용해 민주성 부분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교육감도 교육의 공화주의적인 측면과 그 직(職)이 가지고 있는 고도의 전문성을 고려한다면 검찰총장이나 대법원장처럼 임명제로 가는 방향이 옳다. 그래야 헌법 제31조 4항에 규정된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이라는 헌법적 가치가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새누리당이 교육감 직선제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만큼 함께 공조해 20대 국회에서는 법률 개정을 이끌어 낼 것이다.
정치 권력화 된 교육감…최장 12년 장기집권 폐해 간과 말아야
교육감 선거제도가 왜 문제인가. 교육감이 과거에는 행정 권력이었지만, 이제는 선거에 의해 이뤄진 정치적인 부산물로 최장 12년까지 장기 집권이 가능한 정치권력이 됐다. 5년 단임 정부보다 더 큰 정치권력의 중심이며, 교육청 자체도 일종의 선거 조직화돼 간다는 것은 큰 문제다. 그런 점에서 교육감 직선제는 ‘폭풍의 눈’이나 다름없다. 눈 안에 있는 순간에는 다가오는 폭풍을 예측하지 못 하는 법이다. 이럴 때는 폭풍의 눈을 자극시켜야 하는데, 교육감 직선제의 폐해를 지적하고 나서는 것이 이슈파이팅이라고 생각해서 거듭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교육감은 과연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국민들이 고민해 보게 하자는 것이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교육감만큼은 교육자이자, 행정가가 돼야 한다. 정치 교육감에게 ‘교육’은 언제나 정치적 수단일 뿐이다. 이걸 막아야 한다.
교육감직선제는 세계적으로 미국의 13개주를 제외한 세계 어느 나라도 채택하지 않고 있다. 영국은 지방의회 임명제, 독일과 핀란드는 지방자치단체장 임명제, 프랑스는 대통령 임명제, 일본은 지방자치단체장이 임명한 교육위원회에서 교육감을 선임하고 있고, 미국도 50개중에서 점차 축소해 13개주만이 주민직선제로 교육감을 선출하고 있다.
전국 현장교육연구대회가 승진을 바라는 일부 교원의 점수 따기 용도로 전락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현장 연구대회 전국 1등급에게 부여되는 ‘푸른기장증’은 오랜 기간 ‘연구하는 교사’의 상징으로 대한민국 교원들의 자발적인 연구와 이를 통한 재교육을 담당해왔다. 현장연구대회는 교사 재교육의 출발점이었고, 그것은 대단히 자부할만한 역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좋은 취지가 ‘승진점수’만을 위한 것으로 왜곡되면서, 전남교총 사건까지 벌어져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아놀드 조셉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가 이야기한 ‘도전과 응전’을 떠올리게 된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사무국도 변화하고, 과감히 패러다임을 바꾸는 등 새롭게 태어나야 할 것이다.
전국현장교육연구대회는 한국교총이 교직의 전문성 신장, 즉 교원들의 자질향상을 통해 교육발전을 구현하고자 6.25 전쟁 중인 1952년부터 시작해 59년 동안 운영돼 오고 있다. 신뢰회복을 위한 과감한 혁신이 필요해 보이는데. 우선 충격을 받았을 교육계와 국민들에게 깊이 사죄하며, 불관용 원칙아래 철저한 진상 규명과 비위(非違)자 처벌은 물론 초강도의 혁신적 재발방지책을 마련, 신뢰를 회복해 나갈 것이다. 현재 17개 시도교총의 연구대회를 재정비하고 있으며, 박남기 광주교대 교수를 위원장으로 한 ‘현장교육연구 혁신위원회’에서 자료전, 연구대회 운영의 혁신방안을 마련 중에 있다. 내년에는 달라질 것이다. 장기적으로 연구대회는 교원들의 ‘셀프 스터디(Self Study)’로 발전해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직접 교사 자신이 연구방향을 세우고 연구에 매진하게 되면 교육력 상승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지난 11월 교육부와 50여 개 항에 대해 단체교섭을 체결했다. 담임·교감·보직 등 제반 수당 인상, 교원자율연수휴직제 도입, 학교폭력 가산점 대폭 완화 등이 교육부와의 교섭 합의로 타결된 것은 교원의 자긍심 회복과 사기진작 측면에서 의미 있는 성과다. 다만 교육부와 교섭이 단순한 교섭이 아닌 확실한 이행조치가 뒤따라야 하는데 이점이 좀 아쉽다. 교섭 이행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학교현장의 조그마한 사안도 상시적으로 논의하는 교섭이 더 활성화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교육부의 톱다운 정책 추진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교섭을 하면서 대한민국이 실험주의 공화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5년 단임 정권의 특성상 정권마다 다른 정책들이 나오다 보니 ‘실험주의 공화국’이 돼 버린 느낌이다. 실험은 ‘톱다운(top down)’ 방식이고 실천은 하나로 뭉치는 힘이 필요한 것으로 ‘보텀업(bottom up)’ 방식이다. 이제는 ‘실험주의 공화국’이 아닌 ‘실천주의 공화국’으로 패러다임이 바뀌었으면 하는 소망이다. 그래야 교육이 살아난다.
‘안양옥’하면 ‘인성교육’이란 단어가 떠오를 만큼 브랜드화 됐다. 왜 인성교육 인가. 몇 년 전 대구 중학생 자살 사건 때 쓴 그 학생이 남긴 편지를 보고 가슴이 아팠다. 변해버린 학교의 모습과 가르쳤던 제자들 생각에 눈물이 났다. 학교는 지식을 배우는 곳이 아니라 공통체적인 삶, 사회적인 삶을 배우는 예비 교육장소가 돼야 하는데. 학교뿐 아니라 학부모, 정책당국 등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