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2024.11.19 (화)

  • 구름많음동두천 5.0℃
  • 구름많음강릉 10.3℃
  • 구름많음서울 7.0℃
  • 맑음대전 8.5℃
  • 맑음대구 8.9℃
  • 구름많음울산 10.1℃
  • 구름많음광주 7.6℃
  • 구름많음부산 13.0℃
  • 구름많음고창 8.4℃
  • 제주 14.6℃
  • 구름많음강화 4.8℃
  • 맑음보은 8.6℃
  • 맑음금산 8.0℃
  • 구름많음강진군 12.6℃
  • 구름조금경주시 10.5℃
  • 흐림거제 12.5℃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라이프

플라톤의 이데아와 책상 위 빨간 사과

‘책상 위의 사과는 빨갛다’라는 명제는 경험적 진리이다. 왜냐하면 저 사과가 오랜 시간이 흘러가면서 마르고 시들어 썩어 버리면 더는 ‘빨갛다’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험적 진리는 믿을 수 없는 우연적 진리이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니 기쁘지 아니한가?
플라톤(Platon)은 세상을 크게 두 개로 나누었다. 하나는 감각적이고 변화무쌍한 현실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 세계 저 너머에 있는 변화하지 않는 참된 진리의 이데아(Idea) 세계이다. 그래서 플라톤에게 참된 진리의 세계는 이데아 세계이다. 눈앞에 보이는(현실 세계에 있는) ‘책상 위에 있는 빨간 사과’는 세월이 가면 썩어서 모습이나 맛이 바뀌게 되는 사과이기 때문에 참된 진리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진짜 사과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 사과는 머릿속, 이데아 세계에 있다. ‘이데아’ 하면 어려운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 영어로 생각(idea)이란 단어의 유래로 보면된다. 자, 그럼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사과를 생각해보자. 머릿속에 둥그런 사과가 떠오를 것이다. 빨갛고 새콤달콤한 이 사과가 가진 속성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실 속 사과는 시간이 지나면 썩어서 모습과 맛이 변하지만, 사과의 속성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다.

경험적 진리와 구별되는 진리가 선험적(a priori) 진리이다. 선험(先驗)적 진리는 ‘2+3=5’와 같은 수학적 진리이며, 이는 우연적일 수 없고 반드시 꼭(必) 그러한(然) 필연적 진리이다. 선험적 진리는 또한 공리(axiom, 公理)를 의미한다. 공리란 어떠한 증명도 할 필요 없이 항상 참으로 받아들이는 명제를 말한다. 즉, 스스로 자명(自明)한 분명한 진리이다.

이성의 눈은 언제나 아름답다
우리 이성은 항상 자명하게 열려 있어야 한다. 칸트(Kant, Immanuel)는 실천원칙들이 자기 나름의 많은 실천규칙들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이 실천원칙들은 주관적이며, 이를 준칙(Maximen)이라 한다. 그리고 주관들이 이성적으로 타당하면 즉, 객관적이면 법칙(Gesetze)이 된다. 우리의 모든 이성적 존재자는 ‘법칙’이어야 한다. 정언명법(定言命法)일 때 인간을 목적 그 자체로 대하게 되고, 삶이 윤택해지기 때문이다.

데카르트([Descartes, Rene)는 확실한 앎을 위해 모든 것을 의심해보는 ‘방법적 회의’를 사용한다. 데카르트가 제일 먼저 의심해보는 것은 감각적이고 경험적인 것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칫 거짓된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의심하더라도 절대 의심할 수 없는 딱 한 가지가 있다. 바로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다. 모든 것을 의심하는 과정에서도 ‘생각하고 있는 나’가 없다면 의심 그 자체도 의심을 받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ergo sum)’라는 위대한 명제가 탄생한다.

감각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을까? 눈앞에서 나를 현혹하는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을까? 감각을 완전히 배제한다면 무감각적인 사람이 되어 맛과 멋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 때문에 가슴을 울리게 하는 사고적 감각도 필요하다. 단, 우리가 주의할 점은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는 사실이다.

관련기사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