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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언·칼럼

한문으로 쓴 글, 누구를 위한 것일까

문헌서원을 다녀와서

추운 겨울도 여행에 대한 열망을 끄지 못했다. 지도를 보고 고민하다가 서천의 국립생태원으로 방향을 정했다. 이유는 한 번도 가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가는 길에 주변도 보기로 계획을 세웠다. 서천군 홈페이지를 통해 서천 8경 안내를 봤다. 문헌서원을 처음 방문할 곳으로 정했다. 서원이기 때문에 가보고 싶었다. 또 가정 이곡과 목은 이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모신 서원이라는 소개에 끌렸다. 이곡과 이색의 이름만으로 충분히 호기심이 일었다.
  

예상대로 문헌서원은 소박한 느낌이다. 주변 편의 시설도 없다. 하지만 산자락 가슴팍에 앉아 있는 서원은 아늑한 분위기가 있다. 시골의 고즈넉한 풍경이 도심의 화려함에 지친 내게 위로를 건넨다. 서원 내의 기와 건물은 선비들의 이야기를 담아온 듯 역사의 시간이 숨 쉬고 있다.
 

문헌서원은 고려 말의 대학자인 가정 이곡 선생과 그의 아들 목은 이색 선생의 사당이 있는 곳이다. 선생들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이곳도 역사와 세월을 거치며 수난을 겪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 의젓하게 자리 잡은 데는 한산 이씨 후손들과 지방 자치 단체의 노력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원은 조선 시대에 성리학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지방에 세운 사학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작은 지방대학쯤 된다. 문헌서원은 4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지방 대학이라고 할 수 있다. 
  

문헌서원 초입 경현루 연못은 공꽁 얼어 있다. 그 앞에는 목은 선생 상이 앉아 있다. 금방이라도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일어서 서원을 누빌 듯하다. 서원 내를 산책하다 보면 몸과 마음의 맑아진다. 시골 동네 놀러와 뒤편에 있는 오래된 학교에 온 기분이 된다.
  

여기저기 걷다가 입구 길목에 자리한 비석에 멈춘다. 비석은 온통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연히 읽을 수 없다. 그 중에 목은 선생 사적변을 보았다. 국한문혼용으로 써 놓았다. 말이 국한문혼용이지 한문이다. 이것을 후세 사람들이 읽으라고 해 놓은 것인지, 아니면 그냥 장식으로 한 것인지 궁금했다. 목은 선생의 사적을 알릴 것이면 우리글로 써야 할 듯하다.



  

지구 반대편 나라에서도 한국어를 배우는 열풍이 분다고 한다. 정작 우리는 우리의 것을 알리면서도 한문으로 글을 써 놓는다. 한문 기록은 문자가 없을 때 한시적으로 썼던 것이다. 이런 폐단으로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셨다. 한글로 써 놓았다면 자세히 읽고 가슴에 새기고 왔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여기만이 아니다. 우리나라 곳곳을 여행하다보면 오래 전에 남긴 유물은 한문 기록물이 많다. 역사적으로 우리글이 없을 때 한문으로 빌려 쓰다 보니 생긴 현상이다. 한문을 보고 외국인들이 우리가 아직도 중국의 속국인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실제로 중국 시진핑 주석이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회담에서 과거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우리 외교부는 반박 성명을 내고 했지만, 우리 국민은 이미 많은 상처를 받았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영어를 쓰다보면 먼 뒷날 미국 대통령이 한국은 자기네들의 일부라고 할지도 모른다.
  

최근에 와서 만드는 역사적 유물에도 온통 한문으로 기록을 남기는데 생각을 바꿔야 한다. 우리글로 남겨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우리글로 남기면 후손들이 읽고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영어 사용을 자제해야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제발 우리 것을 지켜야 한다.
  

교실에서 이곡의 <차마설>과 <죽부인전>을 가르쳤다. 교실에서 가르치다가 산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서 멀리 왔지만 쓸쓸함만 남는다. 우리 문화는 외국인들도 관심이 많다. 한글 기록물로 우리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국민적 노력이 필요하다.  


* 문헌서원[文獻書院](두산백과)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25호로 지정되었다. 한산이씨 종중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1594년(조선 선조 27)에 지방 유림들의 공론으로 이곡(李穀)과 이색(李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졌다가 1610년(광해군 2) 한산(韓山) 고촌(枯村)으로 옮겨 복원하였으며 1611년에는 "문헌(文獻)"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다. 그 후 이종학(李種學), 이자, 이개(李塏)를 추가하여 다섯 분을 함께 모시게 되었다.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해오던 서원들이 1871년(고종 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자 문헌서원이 있던 자리에 단(壇)을 설치하고 분향하여왔다. 그 후 1969년에 지방 유림들의 노력으로 현재 위치에 복원하여 이종덕(李種德)을 추가로 모시고 매년 음력 3월과 9월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서원 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2층 누각으로 된 6칸의 강당, 4칸의 진수당(進修堂), 3칸의 목은영당, 5칸의 재실(齋室), 3칸의 전사청(典祀廳), 3칸의 수호사(守護舍), 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 목은선생 신도비, 이종덕 효행비각 등이 있다.
 

사우에는 이색·이곡과 이종학·이자·이개·이종덕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진수당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토론 장소로 사용하고 있으며 전사청은 제구(祭具)를 보관하는 장소로, 수호사는 관리인의 숙소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목은영당에는 이색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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