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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fact)는 없다”

‘팩트(fact)’라는 말이 부쩍 많이 쓰인다. 이보다 더 단정하고 의미가 분명한 ‘사실(事實)’이란 우리말을 제 쳐두고, 굳이 영어 ‘팩트(fact)’를 쓰는 것이 이상하다. ‘팩트(fact)’라는 말이 유행 어처럼 횡행하는 데는 우리들 심리의 어떤 성향, 그것의 불편한 진면목이 보이기도 한다. 텔레비전 토론에서 팩트 논쟁이 자주 벌어진다. 정치인들이 패널로 나올 때는 유독 심하다. “지금 말씀하신 것, 팩트 자체가 잘못되었어요!”, “팩트는 그게 아닙니다!”, “듣도 보도 못한 말씀을 하는데, 내가 팩트를 바로잡아 줄까요.”, “팩트를 제대로 알고 말씀하세요!”,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이 팩트입니다!” 대개 이런 식이다. 어떤 토론은 초입부터 팩트 여부를 가지고 싸우다가 시간을 다 보내는 경우도 있다.

 

토론에서 이렇게 ‘팩트’ 싸움이 벌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왜냐하면 패널들이 서로 사실이 아닌 내용 즉,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딱히 의도적인 거짓말은 아니라 하더라도, 무언가 왜곡된 사실을 믿는(또는 사실을 왜 곡하는) 사람들이 토론에 참가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상대가 팩트를 잘못 알고 있다고 말하며, 자기의 말이 팩트라고 하는 사람은, 그는 절대적으로 객관적이며 절대적으로 공정하며, 진실을 잘 대변하는가. 팩트 여부를 두고 토론이 춤추는 장면을 지켜본 사람들이라면 느끼겠지만, 그쪽 역시 신뢰가 가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팩트인지 아닌지를 밝힌다고 바로 진실(truth)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팩트(fact)가 진실(truth)의 편이 아닐 수도 있다. 아니 그런 경우가 의외로 많다. 진실은 수많은 팩트들 간의 자연스러운 호응으로 드러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수많은 팩트 중에서 ‘내가 선택한 팩트’를 중심으로 그 어떤 ‘진실’을 구성하려 한다. ‘내가 선택한 팩트’와 ‘내가 선택하지 않은 팩트’, 그 사이에 는 내가 무조건 믿으려고 하는 모종의 이데올로기가 관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겉으로는 상대방의 팩트 착오를 비판하지만, 그 속마음은 ‘내가 택한 팩트’를 상대가 택하지 않음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하는 셈이다.

 

달리 말하면 ‘내가 선택한 팩트’와 ‘내가 선택하지 않은 팩트’가 분리되는 그 과정에서 나의 주관(subjectivity)이 부각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나는 왜 다른 팩트들은 선택하지 아니하는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양자를 균형있게 취함으로써 ‘사실’에서 ‘진실’로 나아가는 생각의 통로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의(懷疑)하는 지성’이 필요하다. 그러는 과정에서 나의 주장과 인식이 편협해 지지 않았는지 스스로 비판해야 할 것이다. 말은 쉬워도 실제로는 여간 어려운 일 이 아니다.

 

‘라쇼몽(羅生門)’은 일본 근대문 학의 봉우리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1892~ 1927)의 대표작이다. 일본다운 분위기(locality)를 자아내면서도 그 주제는 세계적 보편성(universality)을 잘 담아낸 작품이다. ‘라쇼몽(羅生門)’은 연극과 영화로 만들어져 널리 소통된 작품이기도 하다. 연출가 에 따라 다양한 ‘인간 탐구’의 진경을 보여 준다.

 

이야기는 이러하다. 한 사무라이 부부가 먼 길을 가다가, 사무라이는 죽고 부인은 겁탈을 당한다. 살인죄로 체포된 산적과 사무라이의 아내가 사건을 증언한다. 죽은 사무라이도 그 혼이 무당의 입을 빌려 사건을 증언한다.

 

먼저 산적이 증언한다. 그는 사무라이 부인의 미모에 혹하여 사무라이를 나무에 묶은 뒤 부인을 겁탈했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부인에게 자신과 살자고 했단다. 부인은 사무라이와 산적이 결투를 벌이면 이긴 사람을 따르겠다고 했단다. 그래서 산적은 사무라이와 정정당당하게 결투를 벌여 그를 죽게 했다고 한다. 살인한 것이 아니라 결투를 했다는 것이다.

 

부인의 증언은 이러하다. 산적은 자신을 범한 후에 가버렸고, 정조를 잃은 그녀를 바라보는 남편의 눈빛은 그녀를 극도로 모멸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 순간 그녀가 들고 있던 단검에 남편이 찔 려 죽었다는 것이었다. 남편인 사무라이의 혼백은 이렇게 말한다. 산적에게 강간당한 뒤 부인은 산적에게 남편을 죽이고 자신을 데려가 줄 것을 애원했단다. 산적은 그녀의 말에 화를 내고 오히려 사무라이를 풀어주고 사라졌다는 것이다. 명예를 잃은 치욕감과 부인에게 당한 배신감으로 자기는 그 자리에서 자결 했다고 말한다.

 

숲속에서 이들을 몰래 지켜보았다는 나무꾼은 말은 이렇다. 산적은 우는 여자 앞에서 자기와 같이 살면 무엇이든 해주겠다고 하더라. 그러자 여자는 단도를 들고 남편에게 달려가 결박을 풀어주고 남편과 산적 사이에서 울더라. 산적은 결투를 벌여 여자를 얻으려 했지만, 사무라이는 산적에게 이런 여자를 위해 목숨을 걸 순 없다고 말하더라. 그러면서 아내더러 자결하라고 했다. 산적도 떠나려 했다. 여자는 남편에게 산적을 죽이지 못하면 남편의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산적에게는 사랑의 열정이 없음을 탓한다. 이에 두 남자는 결투를 하더라. 산적이 사무라이를 죽이는 사이 여자는 도망을 가버렸다. 나무꾼의 말은 대략 이러한데, 그의 말도 믿을 수가 없다. 진주가 박힌 값비싼 여자의 단도를 훔친 도둑이기 때문이다(김용길, ‘라쇼몽 현상’ 참조, http://cafe.daum. net/cp0128).

 

사건에 참여했던 네 사람은 각기 팩트를 이야기하지만, 그 팩트는 모두 다르다. 인간의 의식 속에 ‘팩트’라는 것이 얼마나 자기 마음대로 자리 잡을 수 있는지를 그 어떤 심리학의 추적보다도 더 예리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사람은 절대 객관의 기억을 가질 수 있을까. 단지 ‘해석된 기억’ 다시 말해서 ‘주관화된 기억’만 있는 것 아닌가. 인간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 이런 속성을 두고 ‘라쇼몽 효과’라는 용어가 생기기도 했다. 새삼 인간의 기억이나 인식이란 것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깨닫게 된다. 이는 아마도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 신이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으로 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팩트는 어디에 있는가. 사건 현장 에 객관으로 존재하는가. 내 마음에 주관으로 존재하는가. 양쪽에다 있는가. 팩트는 객관으로 존재하는 듯해도 주관으로 나타나기 십상이다. 세상에는 진실을 떠받치는 팩트만큼이나 진실을 가리는 팩트도 많다. 그래서 팩트를 무조건 절대시하는 인식은 위태롭다. 인간의 욕망이 편견을 낳고, 편견은 팩트(사실)를 왜곡시키고 싶은 충동으로 인간을 밀어 넣는다.

 

‘사실’이라는 부사를 습관처럼 말머리 에 붙이고 사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이런 식이다. “사실 한국이 멕시코에 패한 건 말도 안 돼요.” 그 반대의 진술도 ‘사실’로 시작한다. “사실 한국이 멕시코에 이길 수 없어요.” 사실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주관적 감정이나 편견이나 욕구를 객관의 진실인 양 늘어놓는다. “사실 돈이 중요하지 사랑이 밥 먹여 줍니까.”, “사실 나는 잘못이 없어요.” 이렇게 ‘사실’ 중독증에 걸린 사람들은 자기가 정말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착각을 한다. 실제로 말머리에 ‘사실’을 상투어처럼 앞세우는 사람들은 그 화행(話行, speech act)이 공격적이고 목소리도 크다. 그렇게 말하는 심리에는 ‘나는 오류가 없는 사람이야!’라는 태도가 들어 있다.

 

팩트에 대한 믿음을 과도하게 가지면, 사실이 아닌 것도 사실로 보려하는 유혹에 끌린다. 그것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기를 바라는 욕심 때문에 자신의 말을 절대화한다. 내가 말하면 사실처럼 된다는 묘한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이는 결국 자기 말에 자기가 속는, 자기 속임으로 빠지게 한다. 자기 속임의 불행은 자기가 속는다는 사실을 본인만이 모른다는 데에 있다. 평상시에 아예 “팩트는 없다”라고 자기 최면을 걸어두는 것은 어떨까. 진정한 팩트를 향해서 더 신중하고 더 성숙한 통찰을 기르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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