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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언·칼럼

사라져 가는 장 담그기

입춘을 지나 우수를 앞두고 있다. 한낮의 햇살은 제법 두터워졌지만 여전히 아침저녁은 겨울 끝이다. 이른 아침 시끄럽던 직박구리는 밤새 한기를 이기느라 털을 잔뜩 돋운 채 나뭇가지에서 미동이 없다. 양력으로 이월 설이 지났지만 음력으론 아직 정월이다.

 

정월 하면 클로즈업되는 것이 장 담그기다. 올해도 장을 사 먹을까 직접 담그 볼까 고민을 한다. 장 담그는 방법은 부모님 생전 어깨너머로 본 게 전부다. 막상 담그 보려고 해도 메주가 없다. 인터넷에 검색하니 장 담그는 방법과 더불어 가족 수에 맞춰 필요한 장 담그기 재료를 보내주는 곳도 있다. 참 편리한 세상이다. 하지만 장맛은 손맛이라 했는데 과연 직접 담근 장이 생전 어머니의 장맛을 재현해 낼 수 있을지 세월의 강을 되돌아본다.

 

가을걷이가 끝난 늦은 가을이면 콩으로 메주를 삶는 냄새가 동네 고샅마다 진동했다. 메주콩은 하루 정도 깨끗이 씻어 물에 불리고 가마솥에 센 불로 끊이다 불을 줄여 콩이 약간 붉은 빛이 될 때까지 삶는다. 뜸 들이기 전 몇 개 넣어둔 고구마도 건져 먹는 등 마땅한 간식거리가 없던 날 콩 삶는 날은 입이 즐거운 날이었다. 어머니 몰래 삶은 콩을 퍼먹기도 하였는데 그런 날은 바깥에 있는 뒷간을 밤중에 너덧 번은 드나들어야 했다.

 

전깃불도 없는 재래식 뒷간, 얼마나 무서웠던지 주무시는 아버지를 깨워서 가곤 했다. 밤하늘엔 차갑게 언 별들만 내려다보고 불어오는 바람이 엉덩이를 스칠 때마다 종이 귀신이 나올까봐 아부지 있나를 몇 번이나 불렀다. 이후 삶은 콩을 절구에 찧어서 네모로 만들어 꾸덕꾸덕 말린다. 이렇게 짝수로 만든 메줏덩어리를 짚을 깐 방에서 2주 정도 띄운다. 하지만 메주가 뜨는 동안 그 퀴퀴한 냄새는 한참이나 힘들게 했다. 이제 메주가 뜨면 볏짚을 이용해 십자로 묶고 짚으로 새끼를 꼬아 끈을 만들어 방의 선반에 매달아 두었다가 이른 봄 장 담그는 시기가 되면 밖으로 내어 햇볕에 쬐어 말린다.

 

맛 좋은 장을 담그려면 시기와 물의 선택이 중요하다. 장은 입춘에 아직 추위가 덜 풀린 이른 봄에 담가야 소금이 덜 들어 삼삼한 장맛을 낼 수 있다 했다. 대개 음력 정월 말날인 오(午)일 또는 그믐 손 없는 날, 병인(丙寅)일 우수에 담그면 벌레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신일(申日)은 피했다. 신일의 음이 시다와 통하기 때문에 불길하다고 여겨서이다.

 

장 담그는 물은 날을 받아 이른 새벽 맑은 물을 길어 준비하고 쳇다리에 큰 시루를 놓고 간수가 다 빠진 소금 한 말을 붓고 큰 동이로 가득히 되어서 붓는다. 정제된 소금물이 얇은 망을 통해 떨어질 때마다 메마른 대지에 단비 내리는 또르르르 소리를 낸다. 이때 중요한 것은 소금물의 농도다. 적당한 진하기는 메주가 일 센티미터 떠오르거나 날달걀이 동전만 하게 보이면 된다. 마지막으로 고추와 숯덩이 몇 개 띄워서 마무리하고 종이나 타월로 주둥이를 감싸고 뚜껑을 닫는다. 이젠 태양과 실바람이 장독간을 넘나들며 익혀줄 일만 남는다. 바로 인간과 자연 기다림의 조화이다.

 

간장 된장 고추장은 우리나라의 전통 조미료라고 할 수 있다. ‘장맛 보고 그 집안 길흉을 안다’는 속담이 있다. 장(醬)이나 간장은 우리의 밥상을 넘어 생활 전반에 깊숙이 영향을 미치는 식생활 문화의 정수(精髓)이다. 온갖 것의 평가 기준이 ‘그 집 장맛’ 이었다. 공들여 담근 장에서 나오는 간장은 오래 묵힐수록 맛이 좋았다고 한다. 오래 묵힌 까만 빛깔의 간장은 ‘씨간장’이라 했는데 그 맛이 무척 좋았었다. 2017년 1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만찬장에 한우 갈비를 올렸었다.

 

그 한우 갈비를 재운 조미료가 씨간장 이었다고 한다. 바로 전라남도 명문가 창평 고씨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360년 된 씨간장을 사용했다는 것이었다. 그 씨간장을 두고 외신들은 미국의 역사보다 더 오래 된 간장이 메뉴로 제공되었다며 큰 관심을 보이기도 했었다. 창평 고씨 집안 간장이 360년을 전해져 왔으니, 250여 년 미국의 역사에 비하면 우리의 전통문화는 얼마나 찬란하고 유구한 것인가?

 

요즈음 도시인들은 물론이고 농촌에서도 자가 생산한 콩으로 메주를 쑤고 장을 담가 먹는 전통적 문화유산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김치는 물론이고 간장과 된장도 공장에서 생산되거나 해외에 수입되는 물품들이 대부분 가정의 식탁을 차지하기 시작하고 있다. 한 해 농사라고 여겨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 오던 우리의 전통문화가 점점 사라지는 현상이 안타까울 뿐이다. 장을 담그는 일 자체는 인간의 육체적 노력을 필요로 한다. 편익과 안락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구는 힘든 일은 싫어하고 내 몫은 더 챙기려 한다.

 

사람에게 진정한 행복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정신적 육체적 조화로운 삶이다. 물질적 풍요와 편익은 인간 삶의 질을 높이는 것 같지만 깊은 장맛에 비유되는 아름다운 우리의 정서와 전통문화는 점점 사라지게 한다. 행복은 물질적 생산과 소비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 바로 장이 만들어지는 과정처럼 사람과 자연의 친숙하고 조화로운 관계에 의해서 행복은 보장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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