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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언·칼럼

그렇게 살고들 싶을까?

달랑 한 장 남은 달력도 이제 며칠밖에 시간이 없다. 새로운 시대의 도래가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영어로 10년 주기의 세월을 Decade 라고 한다. 2010년의 Decade를 보내고 바야흐로 2020년의 Decade를 앞두고 있다. 새로운 무대에 오르면 늘 두렵고 설레며 가슴이 뛰는 것이 인지상정이듯이 이제 새로운 2020년 Decade를 맞이하는 심정은 더욱 남다르다. 그럴 때마다 마음 한편에서는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 하지 않는가.

 

우리 모두 자신과 가족의 삶, 직장에서의 삶, 마을공동체에서의 삶, 그리고 국가적인 삶을 회고해 보는 시간이다. 작은 가슴에 소소한 행복을 찾아서 살아가는 것이 개인과 가족의 삶이라면 직장과 마을과 국가는 그보다 더 큰 관점에서 바라보아 조금씩 달라질 수밖에 없다. 개인의 삶은 크게 만족할 수는 없어도 반대로 크게 후회스러움이 없으면 일단은 평균점은 넘어간 것이다. 가족은 그러한 우리의 보금자리이니 오십보백보라 믿는다. 하지만 국가적인 삶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 아니 최악이다. 특히 정치권과 언론, 종교계는 아예 처음부터 평균을 기대하기는 염치가 없을 정도다.

 

2019년 새해 벽두에 꿈꾸고 다짐하였던 소망과 약속들은 어디에 있을까. 국가는 어찌 이렇게 시끄러울까. 언론은 왜 이리 불신을 자초했는가. 종교계는 어찌하여 참사랑(자비)의 정신을 잃었는가. 지금의 이 소용돌이는 누가 만들었는가.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맨 앞에 선 이들이 저렇듯 싸움판이니 국민의 생각이 편할 날이 없다. 누구 좋으라고 저러는 것일까. 저렇게 지나가면 종국에 나라가 어디로 갈 것인가. 국민의 대변자, 지식인의 집합체, 신의 대리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허구한 날 국민을 걱정스럽게 만들고 민심을 어지럽히고 양분시키니 이 나라의 평화는 과연 누구 책임인가.

 

놀랍게도 책임이 모두 그들에게 있다. 소란을 만들어 북적이는 것도 저들 때문이며, 잠재우고 평온하게 만들 사람도 바로 저들이다. 정치는 바로 그걸 해내야 한다. 언론은 진실을 알려야 한다. 종교는 일치와 사랑을 보여야 한다. 정치는 협상과 토론 그리고 법과 제도를 통하여 나라와 국민에게 안정과 질서, 평화와 복지를 가져와야 한다. 지금은 정치가 실종되었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공정한 취재와 보도가 어둠 속의 국민들에게 알 권리를 세워 주지만 가짜 뉴스, 편파 보도, 진실을 가장한 이념의 기울어진 운동장이 현재의 언론이다. 언론이 진영논리에 휘둘려 누군가의 심부름꾼을 자청한다면, 스스로를 죽이는 꼴이 아닌가. 사실을 토대로 진실을 전하며 국민들이 믿고 찾을 언론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은 양심과 시대정신을 바로 세우는 언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국민을 힘들게 하는 또 하나 집단이 있다. 종교계다. 평화와 화합이 아닌 분열과 다툼을 앞서 외친다면 이는 종교가 아니라 선동이다. 종교계의 거두라 자처하는 한 사람의 증오에 찬 대중 집회와 숨겨진 기도, 신에게까지 나불대며 자신을 드러내는 전횡은 교회의 힘을 빙자해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분열을 조장하는 죄악이다. 그것도 버젓이 신의 이름을 내세워 저지르고 있다.

 

올해 대학교수들이 선정한 사자성어가 공명지조(共命之鳥)다. 함께 살아야 하는 운명공동체인 줄 깨닫지 못하고 서로 싸우고 해악을 끼친 나머지 모두가 공멸하는 어리석은 행위를 뜻한다. ‘이러다 모두 죽는다’는 커다란 각성이 있어야 한다. 생각이 같은 사람은 없다. 방법이 동일한 집단도 없다. 다른 것을 놓고 싸우는 틈에 본래 꿈꾸던 방향을 잃어버리기 일쑤다. 공명지조(共命之鳥)를 경계하며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이루어야 한다. 어렵지 않다. 다르지만 평화롭게 해결하는 지혜를 발휘하면 된다. 세밑에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를 재삼 성찰하는 기회다. 지금처럼 그렇게 살고들 싶을까? 깊은 우려를 금치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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