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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라이프&여행] 가야, 잃어버린 왕국을 찾아서

‘구형왕’의 피라미드형 돌무덤

 

 

낙동강이 흐르는 한반도 남부 지역에 존재했던 고대국가 가야(伽倻). 삼한 중 하나인 변한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세워져 가락(駕洛) 또는 가라(駕羅)라고도 불리며 번성한 나라. 그러나 가야는 서기 562년 10대 왕인 구형왕(仇衡王)에 이르러 그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구형왕은 죽어 망국의 한을 돌무더기로 덮어 둔덕을 이루게 했다. 경남 산청에 가면 나라 잃은 왕의 비애에 젖은 1500년 전 역사가, 그렇게 돌무덤으로 남아 봄빛 속에서 눅어지고 있던 것이다.

 

왕산, 맹호수유형의 명당터

 

우리나라는 왕과 관련해서 이름을 얻은 산이 많다.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 위치해 있는 왕산(王山)도 그중 하나다. 이 산의 북쪽 산기슭에 있는 구형왕릉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 것이다. 옛 이름인 태왕산(太王山)도 마찬가지다. 가락국의 궁궐 태왕궁을 일러 얻어진 것으로 이 산에는 아직도 왕등재, 국골, 깃대봉 등 가락국과 연관된 지명이 각종 기록이나 문헌에 많이 남아 있다. 
 

사적 제221호 구형왕릉은 7단으로 차곡차곡 돌을 쌓아 피라미드 형식으로 만든,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적석총이다. 홍살문 앞에서 왕산의 발원수가 되는 두 골짜기 물이 합수해 유정하게 흘러가는데, 맹호수유형(猛虎授乳形)이라 해 호랑이가 새끼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형상으로 풍수지리에서는 최고의 명당으로 꼽는다고 한다. 
 

원래는 구형왕의 능과 그 능을 수호하기 위해 지어진 왕산사(王山寺)가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왕산사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높이가 7.15m에 이르는 거대한 돌무더기 주변에 어른 허리 높이 정도의 돌담이 둘러 있을 뿐이다. 그리고 ‘여자의 가슴을 넘지 않는 낮은 담장’이라는 뜻의 여첩(女堞)을 연상시키는 돌담에 파르라니 낀 이끼가 금관가야의 유서 깊은 한을 보여주고 있을 뿐.

 

 

가락국 마지막 왕의 무덤 ‘구형왕릉’
    
‘駕洛國讓王陵(가락국양왕릉).’ 삼문(三門) 안으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비석에 새겨진 글귀다. ‘양왕(讓王)’이라는 말은 ‘나라를 바친 왕’, 즉 신라에 항복한 가락국 마지막 왕의 무덤이라는 뜻이다. 이렇듯 후대에까지 치욕이 담긴 이름을 얻게 된 구형왕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일찍이 “나라도 구하지 못한 몸이 어찌 흙에 묻힐까. 차라리 돌로 덮어 달라”는 유언을 남긴 바 있다. 나라를 잃은 설움만큼이나 무거운 돌무더기로 덮어 죽어서도 자신을 짓누르는 벌을 자처한 것이다.
 

김구해 구형왕은 521년 금관국의 왕이 돼 신라 법흥왕에게 532년 나라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재위했다. 왕비와 세 아들, 김유신의 아버지인 손자 서현과 함께 항복한 것이다. 이에 신라는 구형왕에게 예를 갖춰 대접한 뒤, 상등의 직위를 내려 금관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고자 했다. 하지만 구형왕은 포로가 된 군사들을 노비가 아닌 백성으로 받아줄 것을 부탁한 뒤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산청의 왕산사에 머물다 5년 뒤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왕릉 앞쪽으로는 석등 1기를 비롯한 문인석과 무인석, 암수 사자상이 양쪽에 세워져 능을 호위하고 있다. 모두 후대에 조성된 것으로 약 40여 년 정도 된 것들이다. 구형왕릉 주변에는 등나무나 칡넝쿨이 자라지 않고, 까마귀나 참새 등의 새들도 날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다. 이끼며 풀도 자라지 않으며, 낙엽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신비한 전설을 가진 왕의 무덤. 심지어 한일합방 때 일본인들이 도굴을 하기 위해 다가갔다가 천둥번개에 놀라 도망갔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왕릉 4단 정면 부근에는 사각으로 된 작은 구멍이 하나 뚫려 있다. 죽어서도 다음 생이 있다고 보는 가야인들의 세계관이 담긴 것으로, 죽은 영혼이 쓰는 공간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성당 안에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모셔두는 ‘감실’과 같은 것이다. ‘영혼이 드나드는 문’으로 통하는데, 어떤 이들은 후손들이 기도를 할 때 불을 켜두는 공간으로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어 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 
 

비석 하단에는 연꽃문양이 양각돼 있어 가야가 불교국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비석 측면 하단에 새겨진‘왕(王)’자가 원래는 ‘만(卍)’자였다는 얘기도 있다. 후대에 김해김씨 후손들이 교묘하게 고쳤다 하는데, 억지로 고쳐진 듯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다소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이 능이 구형왕릉으로 확인된 것은, 1798년 산청유생 민경원이 왕산사의 궤짝에서 ‘왕산사기’를 발견하면서부터다. 하지만 발굴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이 거대한 돌무덤의 주인이 정말 구형왕인지에 대해서는 사료가 정확하지 않았다. 하여 지금껏 ‘전(傳) 구형왕릉’이라 불리다가 최근에 와서야 ‘구형왕릉’으로 고쳐 부르게 됐다.

 

 

‘수로왕’을 낸 건국난생설화 이야기

 

가야(伽倻)는 한반도에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 구도가 완전히 정립되기 이전의 또 다른 세력이었다. 한반도 남부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경상도 서부지역을 발판으로 번성한 것이다. 변한(弁韓) 12국에서 발전한 부족이었는데, 일연의 ‘삼국유사’ 기록에 3세기 중반 이후 변한지역의 12개국 가운데 일부 국가들이 가야연맹체를 형성하면서 ‘가야’라는 명칭을 사용했다고 나온다. 
 

가야의 임금은 왕이라 하지 않고 신라와 마찬가지로 애초 ‘간(干)’이라고 불렀다. 부족의 추장과 같은 개념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전하는 가야의 건국설화에도 ‘9간(干)이 추장이 돼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을 때, 구지봉(龜旨奉)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구지가(龜旨歌)를 불렀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그때 하늘로부터 보랏빛 줄이 내려와서 보니, 금함에 알 6개가 들어 있었다. 9간 중 한 명인 아도간이 집으로 가져다 놓자, 알들이 모두 어린아이로 변했다. 가장 먼저 태어난 아이에게 ‘수로(首露)’라는 이름을 주고 금관가야의 왕으로 추대했다. 이로써 부족국에서도 하늘에서 정해준 왕림지로써 당당하게 ‘왕’이 탄생해 삼국시대 주역들과 어깨를 견줄 수 있게 된 것이다. 
 

김해 지역에 위치한 금관가야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일찍부터 질 좋고 풍부한 철을 바탕으로 국력을 기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로왕이 사춘기가 지나 혼인할 나이에 이르자, 멀리 고대국 ‘아유타’라는 나라에서 하늘의 계시를 받고 아유타의 공주가 시집을 오게 된다. 오던 중에 풍랑을 만나 사흘 만에 다시 뱃머리를 돌려 돌아갔다가, 탑을 부숴 배의 바닥에 깔고 공주의 오라비가 되는 대사 장유화상과 더불어 오니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이때 아유타국에서 공주가 혼수품으로 가져온 것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불교와 철 제련기술이었던 것. 당시 철은 화폐로 쓰일 만큼 매우 중요한 자원이었다. 교통의 중심지였던 금관가야는 지리적 여건이 좋아 중국 군현에서는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 경상도 내륙의 여러 국가나 왜나라 등지에는 철 중계무역을 통해 이익을 보면서 가야연맹체를 형성해 주도해나갈 수 있었다. 

 

 

찬란했던 금관가야의 쇠락

 

번성을 이루던 금관가야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쉽게 복구하기 힘든 타격을 받게 된다.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왜‧가야세력과 동맹을 맺자 신라는 이를 저지코자 고구려와 관계를 맺는다. 신라를 공격한 왜 세력을 격파하기 위해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경자대원정’을 결정해 가야로 진격해 들어오면서 백제는 패배하게 되고, 가야 또한 직접적인 피해를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신라는 이미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도 될 만큼 성장해 있었다. 그래서 가야에 전쟁을 일으켜 자신들의 힘을 떨칠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가락국기’는 “신라 제23대 법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가락국을 치니 왕은 친히 군졸들을 지휘했으나, 저편은 군사가 많고 이편은 적어 맞서 싸울 수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로써 찬란했던 금관가야는 멸망하고, 구형왕이 들어가 묻힌 거대 돌무덤과 함께 역사로 남게 됐다. 
 

현재 구형왕릉 곁에는 왕릉을 참배하기 위해 만든 호릉각(護陵閣)과 능을 지키는 ‘고지기’가 살던 요사채가 딸려 있다. 지금은 텅 빈 요사채로 남겨져 있지만, 왕릉 앞에 살라놓은 향냄새가 짙게 배어 신기하게도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지는 듯하다. 
 

묵직하게 다가오는 가락국 옛 향기를 맡으며 왕산을 돌아 나오는 길, 산 아래께에서 김유신이 활쏘기 연습을 했다는 사대비(射臺碑)를 만났다. 나라를 망하게 한 원흉이었던 신라인으로 살면서, 제게는 증조할아버지가 되는 구형왕이 잠든 능 곁에서 김유신은 얼마나 큰 울음을 삼켰을까. 안타까움과 달리 그 위로 속절없이 봄은 오고 가고, 또 한 계절이 연둣빛 싹처럼 돋아나고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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