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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강마을에서 책읽기-반시대적 글쓰기, 이옥

<심생전>, <글쓰기와 반시대성, 이옥을 읽는다>

초여름이 시작되었습니다. 뭉게뭉게 산줄기를 타고 피어나는 희뿌연 밤꽃과 구름이 가득 펼쳐진 무논 사이로 백로가 느릿느릿 움직입니다. 비닐로 지어진 하우스에서 철 이른 과일과 채소들을 생산하였던 대지는 골조를 이루었던 무거운 쇠막대기를 걷어내고 있습니다. 그 자리는 금방 무논으로 변해 어린 모가 심어질 것입니다.

 

세상의 시간이 바쁘게 지나갑니다. 현대인의 삶에 맞추어진 대지의 시간도 점점 빨라 지고 있습니다. 철을 앞당겨 출하되고, 조금 더 단맛이 깃들게 하고, 더 고운 색으로 물들인 과일과 채소들은 시장에서 소비자를 유혹합니다. 첫여름이 감싸는 강마을의 시공간에서 조선시대 문체반정의 정점에서 자신의 글쓰기를 고집하였던 불우한 문인, 이옥을 만납니다.

 

18세기 조선이라는 시공간은 문화의 소용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호학 군주 정조가 있었고, 유목적 지식인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를 통해 깊은 사유와 탁월한 문장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리고 다산 정약용은 변치 않는 신념과 일관성으로 박학과 신실함의 대명사 <여유당전서>라는 압도적 지식을 보여주었습니다. 일개 성균관 유생 이옥은 정조 16년 10월 19일 <조선왕조실록>에 처음으로 이름이 등장합니다. 정조가 유생들에게 내린 <시경>에 관한 물음에 그가 쓴 응제문은 '문체반정'의 서막을 알리게 됩니다. 그 후 소품체 문체의 수난으로 충군(조선시대에 죄를 범한 자를 군역에 복무하도록 한 형벌)과 과거 낙제처리 등의 조치를 당하며 10년을 떠돕니다. 그는 결국 과거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의 글을 씁니다. 그의 글은 주류에는 속하지 않지만 섬세한 촉각이 포착하는 미세한 욕망과 새로운 감수성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의 글쓰기는 시대에 대한 저항이 아니었을까요.

 

이옥이 전하는 최고의 러브스토리는 <심생전>입니다. 약관의 준수한 양반가 청년 심생이 길거리에서 업혀 가는 여인을 뒤따르다 서로 눈이 맞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버들잎 같은 눈 속의 별빛 같은 눈동자 네 개가 서로 부딪혔다!" 기가 막힌 표현이 아닐까요. 청춘남녀가 서로 반하는 첫 순간의 짜릿함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심생은 곧 사라진 그녀를 찾아 동네 사람에게 정보를 얻고, 친구네 집에서 밤새겠다는 핑계를 대고 여인의 집을 찾아가 몰래 훔쳐봅니다. 이를 눈치챈 여인은 스무날 지나자 방에 들입니다. 중인 집안의 딸과 양반가 자제의 혼인은 당시로는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당돌한 여인은 심생을 방으로 들이더니 부모를 불러와 그간의 일을 고하고 동침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계속되기 어려웠습니다. 심생의 거짓말을 안 부모가 북한산성으로 보내어 이별하게 됩니다. 이후 심생이 전해 받은 것은 그녀의 유서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남편이라 부르지 못하고 며느리 대접도 못 받고, 손수 옷 한 벌 못해 입히고 병을 얻어 죽게 되니 한스럽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심생은 공부를 접고 무관이 되어 벼슬까지 했으나 그 역시 일찍 죽고 말았다는 후일담으로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한눈에 반하는 만남, 신분의 차이, 원하지 않은 이별, 죽음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로맨스입니다. 덧붙이는 말에 이옥이 어린 시절 스승으로 부터 들은 이야기라고 전합니다.

 

​이옥은 성리학적 질서가 준엄한 18세기에 <심생전>을 비롯한 파격적이고 다양한 소재의 글을 창작합니다. 유연한 사고로 표현하는 새로운 문장은 정조의 강한 문체정책에 막혀 억울한 피해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함에도 쓸 수밖에 없었던 그의 글은 새로운 시대의 조짐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이야기가 되어 지금 우리에게 다가섭니다. 조선 문단의 이단아, 왕의 말을 거역하고 자신의 글쓰기를 고집한 이옥, 그의 글을 읽습니다.

 

『심생전』, 정환국 지음, 전국국어교사모임 기획, 2019, 휴머니스트

『글쓰기와 반시대성, 이옥을 읽는다』, 채운 지음, 2013, 북드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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