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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개비, 남색 나비가 보트에 앉은 듯

 

박완서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상징적인 식물은 당연히 싱아지만, 이 소설에는 싱아 말고도 많은 식물들이 나옵니다. 7월부터 남색 꽃이 피는 달개비(정식 이름은 닭의장풀)도 그중 하나입니다. 달개비는 소설 앞부분 싱아가 나오기 직전에 나오는데, 먼저 그 대목을 보겠습니다.

 

뒷간 모퉁이에서 뒷동산으로 난 길엔 달개비가 쫙 깔려 있었다. 청아한 아침 이슬을 머금은 남빛 달개비꽃을 무참히 짓밟노라면 발은 저절로 씻겨지고, 상쾌한 환희가 수액처럼 땅에서 몸으로 옮아오게 돼 있다. 충동적인 기쁨에 겨워 달개비잎으로 피리를 만들면 여리고도 떨리는 소리를 낸다.

 

서울 아이들이 알기나 할까, 쫙 깔린 달개비꽃의 남색이 얼마나 영롱하다는 걸. 그리고 달개비 이파리에는 얼마나 고운 소리가 숨어 있다는 것을. 달개비 이파리의 도톰하고 반질반질한 잎살을 손톱으로 조심스럽게 긁어내면 노방(얇은 비단의 한 종류)보다도 얇고 섬세한 잎맥만 남았다. 그 잎맥을 입술에서 떨게 하면 소리가 나는데, 나는 겨우 소리만 냈지만 구슬픈 곡조를 붙일 줄 아는 애도 있었다.

 

달개비꽃이 볼수록 예쁘다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달개비 이파리에 고운 소리가 숨어 있다는 것은 몰랐습니다. 이 소설에 나온 대로, 달개비 잎살을 손톱으로 긁어내고 잎맥만 남겨 한번 불어봐야겠습니다.


이 소설의 싱아가 나오는 부분에도 달개비가 다시 한 번 나오는데, ‘나는 불현듯 싱아 생각이 났다. 우리 시골에선 싱아도 달개비만큼이나 흔한 풀이었다’고 했습니다. 싱아가 엄마 손에 이끌려 상경한 여덟살 소녀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상징하고 있다면 달개비는 그 싱아가 흔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식물로 나오는 것입니다.

 


노란 더듬이를 가진, 푸른 나비를 닮은 ‘달개비꽃’
달개비꽃은 7월부터 피기 시작해 늦가을인 10월까지 필 것입니다. 밭이나 길가는 물론 담장 밑이나 공터 등 그늘지고 다소 습기가 있는 곳이라면 전국 어디서나 만날 수 있습니다. 꽃은 작지만 자세히 보면 상당히 예쁘고 개성 가득합니다. 


우선 꽃은 포에 싸여 있는데, 포가 보트 모양으로 독특합니다. 남색 꽃잎 2장이 부챗살처럼 펴져 있고, 그 아래 꽃술이 있는 구조입니다. 이 모습을 이유미 국립세종수목원장은 책 <한국의 야생화>에서 “마치 노란 더듬이를 가진 푸른 나비를 보는 듯하다”고 표현했습니다. 자세히 보면 아래쪽에 꽃잎이 한 장 더 있지만, 작고 반투명이어서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달개비꽃의 전체적인 모습은 노란 더듬이를 가진 푸른 나비가 보트 위에 앉은 모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꽃잎 아래로 가운데 부분에 샛노란 수술 4개가 있는데 꽃밥이 없어서 곤충을 유혹하는 역할만 합니다. 그 아래쪽에 길게 나온 세개의 꽃술이 있는데, 이중 가운데 것이 암술, 양 옆에 있는 것이 실제 수술이랍니다. 꽃이 지고 나면 생기는 밥알 모양 열매는 어릴 적 소꿉놀이할 때 쌀 대용으로 사용했었지요.


한승원은 어머니를 추억한 자전적 소설 <달개비꽃 엄마>에서 어머니를 달개비에 비유했습니다. 작가는 “몇 해 전, 토굴 마당의 잔디밭에서 달개비·바랭이·명아주·비름·환삼덩굴들을 뽑아 동백나무 밑에 쌓아 두었는데, 다른 풀들은 시들어 죽어 갔지만 달개비풀 혼자만 살아남아서 남보라 빛의 꽃을 피워내었다”며 “(어머니는) 달개비 풀꽃처럼 강인하게 세상을 산 한 여인”이라고 했습니다. 작가가 그 많은 잡초 중에서도 탁월한 선택을 한 것 같습니다.

 

 

달개비라는 이름은 꽃이 닭의 볏을 닮았다고 해서 생긴 이름입니다. 이 풀의 정식 이름은 닭의장풀인데, 이 식물이 주로 닭장 주변에 자란다고 붙은 이름입니다. 닭의장풀보다는 달개비가 더 어감이 좋은데 왜 닭의장풀을 추천명으로 정했는지 궁금합니다. 국가식물표준목록은 닭의장풀을 추천명으로, ‘닭개비’만 이명(異名)으로 처리하고 달개비는 이명에도 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국가표준식물록에서 달개비를 검색하면 아무 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식물을 달개비라 부르는데 최소한 이명으로는 넣어놓고 어느 이름이 더 나을지 차차 논의해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닭장 주변에 자라던, 닭의 볏을 닮은 달개비
달개비의 정식 이름을 닭의장풀로 한데 대해 문재인 대통령도 유감을 표명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2012년 대선 때 한국기자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달개비를 화제에 올리며 “신비롭고 예쁜 꽃 달개비를 요즘 식물학자들이 ‘닭의장풀’이라 부르는데, 달개비라는 이름이 얼마나 예쁘냐”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서울 광화문에 있는 음식점 ‘달개비’가) 달개비란 이름을 써서 참 고맙다”고 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2년 12월 대선 단일화 과정에서 안철수 후보와 만날 때마다 서울 광화문에 있는 음식점 ‘달개비’를 이용했습니다. 그 이후 달개비라는 이름이 더 유명해진 것 같습니다. 이 음식점은 지금은 광화문에 있지만, 서울 계동에 있을 때부터 청와대 사람들이 자주 이용한 곳이었습니다. 이 음식점은 화단에 달개비를 키우며 달개비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하는 손님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달개비는 이래저래 참 얘깃거리가 많은 식물입니다.

 

달개비라는 이름은 화단에 흔한 자주달개비, 수생식물인 물달개비 등에 남아 있습니다. 자주달개비는 북미 원산으로 관상용으로 많이 심는 꽃인데, 달개비보다 훨씬 크고 잎은 넓은 줄 모양이며 자주색 꽃잎이 3장인 것이 달개비와 다릅니다. 꽃은 5월쯤 피기 시작하는데, 나팔꽃처럼 아침에 피었다가 오후에 시듭니다. 자주달개비는 꽃의 색깔로 방사능 농도를 알려주는 꽃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자주달개비가 방사선에 민감해 일정량 이상의 방사선을 맞으면 돌연변이가 일어나 꽃색이 분홍색으로 변한다고 합니다.


물달개비는 논이나 얕은 물가에서 자라는 수생식물입니다. 우리나라 전국의 논이나 연못·저수지의 수심이 낮은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부레옥잠은 물에 떠서 살지만 물달개비는 뿌리는 땅에 박고 꽃과 잎은 물 위로 올라와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입니다. 9~10월 잎겨드랑이에서 나온 꽃자루 끝에서 남보라색 꽃이 모여 피는데, 이 꽃이 잎보다 아래쪽에서 달리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비슷하게 생긴 물옥잠은 꽃이 잎보다 위쪽에서 핍니다). 물달개비나 물옥잠은 예전엔 논의 잡초라고 생각할 만큼 흔했지만, 농약 때문인 듯점차 줄어드는 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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