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개미취는 이르면 7월부터 연보라색 꽃을 본격적으로 피우기 시작해 8월에 가장 볼만한 꽃이다. 원래 벌개미취는 심산유곡에 사는 야생화였다. 햇빛이 잘 들고 습기가 충분한 계곡이나 산 가장자리가 벌개미취가 좋아하는 서식지다.
그러나 요즘은 산보다 서울 등 도심 화단이나 도로가에서 더 흔히 볼 수 있다. 연보랏빛 꽃잎과 노란 중앙부의 꽃망울이 크고 풍성한 데다 자생력도 강하고, 이 나라 특산종이라는 것이 널리 알려지면서 전국으로 퍼졌기 때문이다. 한 번 심으면 뿌리가 퍼지면서 군락을 이루어 따로 관리가 필요 없다는 점도 장점이다. 촘촘한 뿌리가 경사진 곳 흙이 무너지지 않게 막아 주기 때문에 금상첨화다.
벌개미취는 다 자라면 키가 50~80㎝ 정도다. 진한 녹색 잎 사이에서 줄기와 가지 끝에 한 송이씩 피는 꽃이 시원하다. 벌개미취는 한두 포기가 아닌 군락으로 피어야 더 아름답다. 개화 기간도 길어 7월부터 10월쯤까지다. 벌개미취가 피기 시작하면 곧 가을이 온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벌개미취를 ‘가을의 전령’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가을의 전령, 벌개미취
벌개미취가 전국으로 퍼진 계기는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이었다. 당시 두 가지 국가 중대사를 앞두고 전국적으로 국토 가꾸기 사업이 벌어졌다. 도로변에 루드베키아·페튜니아·메리골드·샐비어 등 외래종들을 심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김창렬 한국자생식물원장은 기왕이면 우리 고유의 꽃으로 도로를 장식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떠올린 꽃이 벌개미취였다. 두 행사가 모두 가을에 열렸는데, 벌개미취가 대표적인 가을꽃인 점도 감안했다. 김 원장은 경남 지리산 자락에서 벌개미취 씨앗을 얻어 증식했다.
김 원장은 1985년 대관령 싸리재에 벌개미취 무리 5만 본을 처음 대규모로 심었다. 가을이 오자 이 일대는 연보라색 장관을 연출했다. 한 야생화 전문가가 싸리재에서 이 벌개미취 무리를 보고 “야, 우리 꽃 중에도 이런 꽃이 있구나!”라고 감탄할 정도였다. 그 길은 많은 사람이 일부러 찾는 꽃길로 유명해졌다. 이어 강원도 태백시가 1987년부터 벌개미취를 시 외곽 길가 60㎞에 조경화로 심어 적응시키는 데 성공했다. 벌개미취는 해마다 새로 심지 않아도 자연 번식하기 때문에 별다른 관리가 필요 없어서 가로(街路) 조경용으로 안성맞춤이었다.
태백시 성공 사례가 널리 알려지면서 벌개미취 무리는 전국적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전국에 피어 있는 벌개미취 무리 중 상당수는 한국자생식물원에서 분양받은 것이다. 자생식물원이 벌개미취의 친정 또는 종가인 셈이다.
벌개미취가 서울시에 대규모 진출한 것은 2013년 봄 355만 가구에 꽃과 나무를 심자는 ‘서울 꽃으로 피다’ 캠페인이 계기였다. 이때 서울 7개 한강시민공원과 안양천·양재천·중랑천 등에 벌개미취 무리 200만 본을 심었다. 이제는 강원도 평창 휘닉스파크 등 벌개미취가 대규모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도 전국에 한두 곳이 아니다.
벌개미취는 햇빛이 잘 드는 벌판에서 자란다고 벌개미취라는 이름을 얻었다. 취는 어린 순을 나물로 먹을 수 있다는 뜻이다. ‘개미’라는 이름이 왜 붙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땅에 사는 개미와는 관련 없는 것이 확실하다.
벌개미취의 학명 ‘Aster koraiensis Nakai’ 중에서 속명 ‘Aster’는 희랍어 ‘별’에서 유래했다. 꽃 모양이 별 모양을 닮았다고 이런 속명이 붙었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벌개미취를 별개미취라고 부른다. 벌개미취를 고려쑥부쟁이라 부르는 지방도 있다. 우리나라 특산종이라 영어 이름이 자랑스럽게도 코리안 데이지(Korean Daisy)다.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에는 벌개미취가 제주도와 경기도 이남에 분포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서 ‘전남과 경남 지리산 지역에서 경기·강원 지역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산림이 안정된 지역에 자생한다. 강원도 지역에서 왕성한 생육상을 보이는 것을 보아 중부지방 이하로는 어느 곳에서나 잘 자랄 것으로 보아진다’고 써 놓고 있다. 자생지에서 보면 도심 화단에서 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러나 아직 필자는 자생지에서 벌개미취를 보지 못했다. 야생화 고수들에게 물어보아도 벌개미취를 자생지에서 본 적은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얘기하고 있다. 개나리처럼 한국 특산이면서도 자생지를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걱정도 든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들국화는…
사람들은 흔히 벌개미취를 들국화라 부른다. 들국화라 불러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들국화라는 이름을 가진 식물은 없다. 참나무라는 나무가 없듯이 들국화도 야생의 국화를 통칭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가을에 산이나 공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보라색 계통의 들국화는 벌개미취와 쑥부쟁이, 구절초가 대표적이다. 이 셋만 잘 구분해도 가을 산행이나 나들이할 때 눈이 밝아질 것이다.
셋 중 구절초는 대부분 흰색인 데다 잎이 쑥처럼 갈라져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구별하기가 쉽다. 벌개미취와 쑥부쟁이는 둘 다 연보라색인 데다 생김새도 비슷하다. 잎을 보면 쉽게 구별할 수 있다. 벌개미취는 잎이 길고 잎 가장자리에 ‘잔’ 톱니가 있지만, 쑥부쟁이는 대체로 잎이 작은 대신 ‘굵은’ 톱니가 있다. 가을 야생화의 보라색은 진하면 진한 대로, 연하면 연한 대로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다.
들국화라고 부르는 꽃 중에는 노란색 무리도 있다. 산과 들에서 피어나는 노란 들국화 중에서 꽃송이가 1~2㎝로 작으면 산국(山菊), 3㎝ 안팎으로 크면 감국(甘菊)이다. 이렇게 다섯 가지가 대표적인 들국화다.
출퇴근길이나 공원을 걷다가 반가움과 함께 깜짝 놀라는 경우가 적지 않다. 땀 흘려 찾아간 심산유곡에서 본 꽃인데 공원 화단에 심어져 있는 것을 볼 때다. 돌단풍·매발톱·할미꽃·금낭화·자란 등도 이제 도심 화단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꽃이다. 벌개미취처럼 야생화에서 관상용으로 성공적으로 변신한 꽃들이다.
어떻든 벌개미취는 늦여름부터 가을까지 가장 사랑받는 꽃이다. 이제 7~8월 공원이나 화단에서 벌개미취를 찾은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벌개미취가 30년 만에 야생화에서 관상용으로 가장 성공적으로 변신한 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우리 땅에는 역시 우리 꽃이 가장 적합하다는 사실을 벌개미취가 증명하기도 했다. 어느새 외래종 코스모스 대신 자생종 벌개미취가 가을꽃을 대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