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히는 일과 배우는 일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은 ‘학습(學習)’을 ‘배워서 익힘’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풀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학습’을 ‘배워서 익히는 일’로 말하는 것은 마치 음식을 씹어서 먹는 일이 아니라, 먹어서 씹는 일로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사람들은 ‘익히는 일’과 ‘배우는 일’이 어떤 점에서 같고 다른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처구니가 없는 뜻풀이를 하게 된다.
‘학습(學習)’에서 ‘학(學)’은 깨치거나 본받는 일을 통해서 배움이 시작되는 것을 말하고, ‘습(習)’은 깨치거나 본받은 것을 익히는 일을 통해서 배움의 결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말한다. ‘학습(學習)’은 ‘깨치고 익히는 일’ 또는 ‘본받아 익히는 일’을 뜻하는 말이다.
‘학습(學習)’의 뜻을 제대로 알려면, ‘학(學)’과 ‘습(習)’이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 또렷이 알아야 한다. 학문(學問), 학자(學者), 학업(學業)에서 ‘학’은 ‘깨치는 일’을 말한다. 그리고 학생(學生), 학도(學徒)에서 ‘학’은 깨치고 익히거나 본받아 익혀서, 그것이 몸과 마음에 배도록 하는 일을 말한다. 그리고 철학(哲學)과 과학(科學)에서 ‘학’은 어떤 것에 대해서 깨친 것을 갈래를 나누어서 알음알이의 판을 차리는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 때에 허신(許愼)이 만든 <설문(說文)>은 ‘학(學)’을 ‘깨치는 것(悟也)’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청나라 때에 만들어진 <강희자전(康熙字典)>은 ‘학(學)’을 ‘깨치는 것(覺悟也)’으로 풀이하고, 덧붙여서 주자(朱子)가 ‘학(學)’을 ‘본받는 것’으로 말했다(朱子曰:學之爲言效也)라고 풀이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선비들은 주자의 풀이를 좇아서, ‘학(學)’을 ‘본받는 일’로 새기는 일이 많았다. 정조(正朝) 때에 만들어진 <전운옥편(全韻玉篇)>은 ‘학(學)’을 ‘본받는 것’으로 보아서, ‘학(學)’을 ‘효(效)’로 풀이하고, 덧붙여서 ‘학(學)’을 ‘각오(覺悟)’, ‘수교(受敎)’, ‘전업(傳業)’, ‘상서(庠序)’를 두루 일컫는 말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학(學)’은 사람들이 어떤 것에 대해서 깨치거나 본받은 것을 익히는 과정을 거쳐서, 몸과 마음에 배도록 하는 일을 하나로 싸잡아서 일컫는 말이다. 이런 까닭으로 사람들은 ‘학(學)’이 들어가는 낱말을 새길 때, ‘학’의 뜻을 ‘깨칠 학(學)’, ‘본받을 학(學)’, ‘익힐 학(學)’, ‘배울 학(學)’ 따위로 나누어서 경우에 맞도록 풀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람은 ‘학(學)’을 몸과 마음에 배도록 하는 일을 뜻하는 ‘배울 학(學)’으로만 새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학습’을 ‘배울 學’과 ‘익힐 習’으로 새겨서, ‘배우고 익히는 것’으로 말한다.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크게 두 가지 까닭이 있다.
첫째로, 옛날에 한국 사람은 중국에서 가져온 한자(漢字)와 한문(漢文)을 익히는 일을 학문(學文)이라고 불렀다. 한국 사람이 한자와 한문을 익히는 일은 거의 모두가 글자나 문장을 통째로 외워서, 몸과 마음에 배도록 하는 일로써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한자와 한문을 공부하는 이들은 ‘학(學)’을 주로 배우는 일로 보게 되었다.
둘째로, 조선시대에 유학(儒學)이 크게 힘을 떨치게 되자, 선비들이 공부하는 일은 거의 모두가 <사서(四書)>와 <오경(五經)>과 같은 경전을 읽고 외워서, 몸과 마음에 잘 배도록 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경전을 어떻게 배우냐에 따라서, 과거시험에 붙고 떨어지는 일과 정승판서가 되고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그들은 글을 잘 배우기 위해서 수십 번은 물론이고, 수백이나 수천 번을 거듭해서 읽고 또 읽어서 줄줄이 외울 수 있도록 하였다. 그들에게 ‘학(學)’은 경전의 가르침을 몸과 마음에 배도록 하는 일이었다.
한국 사람이 ‘학(學)’을 ‘배우는 일’로 풀이하는 것은 나름의 사정에서 빚어진 것으로서, 그냥 그렇게 봐줄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학습’을 ‘배우고 익히는 일’로 풀이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으로서, 그냥 그렇게 봐줄 수 없다. ‘익히는 일’과 ‘배우는 일’이 헷갈리게 되면, 가르치는 일과 배우는 일이 모두 엉망으로 치닫게 된다.
'익히다'의 옛말은 '니기다'
‘학습(學習)’의 뜻을 제대로 알려면, 한국 사람이 ‘습(習)’을 어떻게 새겼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학습(學習)’, ‘연습(練習)’, ‘훈습(薰習)’, ‘습관(習慣)’, ‘풍습(風習)’에서 ‘습(習)’은 어떤 일을 거듭해서 몸과 마음에 익어서 배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까닭으로 사람들은 ‘습’을 ‘익힐 習’으로 풀기도 하고, ‘배울 習’으로 풀기도 하였다. 중종(中宗) 때에 최세진이 만든 <훈몽자회>는 ‘학(學)’과 ‘습(習)’을 모두 ‘배우는 일’로 풀어서 ‘학’을 ‘배울 學’으로, ‘습’을 ‘배울 習’으로 새기고 있다.
그런데 선조(宣祖) 때에 간행된 <한석봉 천자문(千字文)>에 이르면 ‘학’과 ‘습’을 나누어서, ‘학’은 ‘배울 學’으로, ‘습’은 ‘익힐 習’으로 새기고 있다. <한석봉 천자문>이 나온 뒤로 사람들이 ‘학’을 ‘배울 學’으로, ‘습’을 ‘익힐 習’으로 새기는 것이 굳어지게 되었다.
오늘날 사람들이 ‘익히다’라고 말하는 것을 옛날에는 ‘니기다’라고 말했다. ‘니기다’는 ‘닉다’에 뿌리를 둔 말로서, ‘닉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니기는 일’, 곧 ‘익히는 일’은 어떤 일을 거듭하여 때가 흐르는 동안에 일이 깊어지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열로써 감자를 익히는 것은 감자에 열을 더하는 일을 거듭하여, 때가 흐르는 동안에 감자에 열이 깊게 들어가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사람이 기술을 익히는 것은 기술을 익히는 일을 거듭하여, 때가 흐르는 동안 기술이 몸과 마음에 깊게 들어가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습’을 ‘익힐 習’으로 새겨서 ‘학습(學習)’을 풀게 되면, ‘학습’은 ‘學하고 익히는 일’이 된다. 이런 경우에 ‘학’을 ‘배울 學’으로 새기게 되면, ‘학습’은 ‘배우고 익히는 일’이 되어서, 말이 되지 않는다. 이미 배운 것을 다시 익히는 일은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학습’에서 ‘학’은 ‘배울 學’이 아니라 ‘깨칠 學’이 되어야 말이 될 수 있다. ‘학습’은 ‘깨쳐서 익히는 일’을 뜻하는 말이다.
‘학습’을 ‘깨치고 익히는 일’이라고 말할 때, ‘학습’의 뜻을 제대로 알려면 ‘깨치는 일’이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 또렷이 알아야 한다. 한국말에서 ‘깨치다’는 ‘깨다’와 ‘치다’가 하나로 어우러진 말이다. ‘깨치다=깨다+치다’에서 ‘깨다’는 사람이 잠에서 깨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한다. 사람이 잠에서 깨게 되면, 갖가지 ‘무엇’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일이 절로 일어난다. 이렇게 되면 사람은 갖가지 ‘무엇’을 ‘어떠한 것’으로 ‘치는 일’을 통해서, ‘무엇’을 ‘어떠한 것’으로서 알아보고, 알아듣고, 알아차리는 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한국말에서 ‘학습(學習)’은 배우는 일의 시작과 과정과 결과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학습’은 ‘깨치고 익히는 일’ 또는 ‘본받아 익히는 일’ 또는 ‘깨치고 익혀서 배우는 일’ 또는 ‘본받아 익혀서 배우는 일’을 뜻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