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에 느티나무 연둣빛 새잎이 나풀거린다. 그 바람 속에는 아직 떠나지 않은 겨울 숨결이 아침저녁으로 옷깃을 여미게 한다. 간간이 바람이 불 때마다 우리 시대의 훈장처럼 겨울 강풍에 날아와 가지에 걸린 마스크가 벌렁거린다.
코로나19 감염증 확진으로 인한 자가격리 사흘째이다. 방역지침과 거리두기 개편으로 연일 늘어나는 코로나19 확진자가 많아져 걱정이다. 그래도 딴에는 방역지침을 철저히 지키며 생활하였는데 ‘열 사람이 한 도둑을 못 막는다’는 말처럼 그 불똥이 내게 오리라고 어찌 상상이나 하였을까?
처음 당해보는 자가격리라 평소 생활이 더 소중하게 여겨진다. 마치 군중 속의 섬사람이 된 느낌이다. 더구나 초등학교 3학년 담임교사로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을 어린 철부지들을 생각하니 애간장이 탄다. 하지만 이 코로나보다 더한, 교직에 있는 모든 선생님이 힘들다는 3월도 대상포진과 싸우면서도 출근하였는데, 지금 주저앉은 이 모습이 믿기질 않는다. 그리고 사월의 시작과 함께 아이들과 같이 교정 화단에 솟아나는 새싹과 민들레꽃, 할미꽃, 고사리 같은 새잎을 관찰하며 봄을 맞이하려는데 어찌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자신에게 원망을 던진다.
아이들이 눈에 밟힌다. 이곳은 시골 학교 만큼 순수한 아이들과 학부모님들의 믿음이 넘친다. 출근하는 모습을 복도 창문으로 지켜보고 있다가 뛰어나와 서로 손을 잡고 바짓가랑이도 잡는 아이들. “거리 두기야, 떨어지자.”라고 해도 언제 그랬냐 듯이 우르르 몰려든다. 그 아이들의 눈빛과 마음이 얼마나 소중한가?
지난 삼월이었다. 대상포진을 앓을 때 어떤 이는 한 며칠 병가를 내고 푹 쉬면 좋을 텐데 참 고지식하다고 하였다. 낸들 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것은 스스로에게 용납이 되지 않았다. 지금껏 선생님이란 특수한 직업에 대한 사명감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교직에 있어 가르침에 있어 사명감이란 퇴색된 지 오래다. 하지만 나는 아직 버리고 싶지 않다. 삼십 년을 넘게 그렇게 걸어왔고 이 소임이 끝나는 날까지 그 초심을 잃지 않는 그런 선생님의 자세로 살고 싶을 뿐이다.
머무는 방의 환기도 시키고 햇볕도 한 번 쬘 겸 건물 옥상으로 올라간다. 가까운 산, 먼 산은 아래로부터 번져가는 봄꽃의 작은 활화산 번짐이 군무처럼 화려하다. 인근 나지막한 밭 언덕엔 연분홍 복사꽃이 새색시 같은 환한 웃음으로 주위를 밝힌다. 지금쯤 1교시를 마쳤겠지? 낯가림이 심한 통합 반에 가는 아이도 잘 있을까? 우유 급식은 제대로 했을까? 열다섯 명의 아이 얼굴이 하나하나 스친다. 마음은 여전히 좌불안석이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 몇 번의 기침과 가래를 뱉고 한 모금의 물로 자지러짐을 넘긴다. 그리고 있을 때 잘하란 말을 펼치며 평소에 누렸던 모든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표현하지 못한 자신의 모순을 생각한다. 자가격리 중 제일 고마운 사람이 아내다. 자신도 출근과 집안일 하며 힘들 텐데 아침, 점심, 저녁 따스한 밥 한 공기를 쟁반에 담아 2층 방문 앞에 살며시 두고 내려간다. 밥이 뭐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기회가 그런 잘못된 생각을 고쳐준다. 하지만 원래대로 되면 내가 언제 그랬냐 듯이 머리를 치켜들 것이다. 이게 원래 사람의 본모습일까?
이제 자가격리 기간의 반을 넘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아이 하나하나 작은 마음 구석까지 쓰다듬고 좋은 선생님이 되어야겠다. 그리고 항상 옆에서 같이 숨 쉬는 가족에게 말 한마디 손짓 하나라도 생각하는 느긋함이 있는 걸음으로 같이 걷고 싶다.
봄이 한창이다. 화무십일홍이라 했다. 화려했던 자목련 꽃잎의 멍들은 하얀 속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축축 처진다. 씁쓸한 마음이지만 그렇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가만히 살펴보면 꽃진 자리에는 연둣빛 새잎이 돋아나서 더 예쁘다. 꽃은 떨어진다. 떨어져야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변화무쌍한 날씨를 견뎌야 영근다. 코로나19로 인한 자가격리가 지금은 아프지만 살아가는 동안 더 큰 자양분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