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1월 산기슭이나 언덕에 들어서면 달콤하고 향긋한 냄새가 밀려올 때가 있다. 노란 꽃송이들에서 나는 향기이고 꽃송이가 요즘 나오는 10원짜리 동전만 한 것이라면 십중팔구 산국에서 나는 향기다.
바람이라도 살짝 불어올 때 산국 향기는 더욱 짙어지는데, 김유정 소설 <봄봄>에 나오는 ‘야릇한 꽃 내가 물컥물컥 코를 찌르고’라는 표현이 생각날 정도다. 산국 꽃송이 사이로 벌들이 부산하게 오가는 것은 전형적인 가을 풍경 중 하나다.
산국은 꽃과 잎이 원예종 노란 국화와 비슷하게 생겼다. 다만 꽃송이가 국화보다 좀 작고, 색도 더 선명해 황금빛에 가깝다. 향기도 더 진하다. 늦가을 청계천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는 것도 대부분 산국이고, 서울 남현동 미당 서정주의 집,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 북한산 구기동 코스 입구, 남한산성 성벽에도 산국이 핀다. 특히 남한산성 성벽에 피는 산국 무리는 세력이 대단해 정말 장관이다. 양지바른 곳을 좋아하고 건조에 강해 고속도로 등 경사지나 절개지에도 많이 심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가을은 국화의 계절이다. 도심에는 이런저런 색깔로 개량한 국화들이 심어져 있고, 전국 곳곳에서 국화 축제를 벌인다. 국화과 식물은 쌍떡잎식물 중에서 가장 진화한 형태로 가운데에 대롱꽃(관상화), 주변부에 혀꽃(설상화)을 가진 형태다.
100원짜리 동전보다 작으면 산국, 크면 감국
국화는 오랜 역사를 가진 꽃이며, 사군자의 하나로 사랑을 받았다. 품종에 따라 꽃의 색·크기·모양이 아주 다양하다. 고등학교 학생들이 국화로 실습을 할 정도로 교배가 쉽기 때문에 알려진 품종만 수천 가지에 이른다. 꽃의 크기에 따라 9㎝, 18㎝를 기준으로 소국(小菊)·중국(中菊)·대국(大菊)으로 나눈다. 일본 사람들도 국화를 아주 좋아해 국화 품종을 많이 개발했고, 일본 왕실은 국화를 왕실 상징으로 쓰고 있다. 미국 사회학자 루스 베네딕트의 책 제목 <국화와 칼>에서 국화는 일본 왕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화단이나 공원에 있는 국화는 개량을 많이 해서인지 인공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요즘 산과 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들국화들은 그렇지 않다. 들국화는 국화의 할아버지뻘인 식물이다. 야생 들국화들을 교잡해 국화를 만든 것인데, 여러 설이 있으나 산국·감국·구절초를 교잡해 만들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기 때문이다.
들국화 중 늦가을 양지바른 곳이나 산기슭·언덕·바위틈 등에 한창 피어 있는 것이 산국이다. 산국(山菊)은 말 그대로 산에 피는 국화라는 뜻이다. 늦가을까지 피는데 더러는 서리가 내릴 때까지 피어 있다. 예로부터 ‘야생 국화’라 해서 꽃을 따서 술을 담그기도 했고, 차로 만들어 마시기도 했다. 산국 하면 뭐니 뭐니 해도 진한 향기가 특징이다. 꿀 향기와 같은 달콤한 냄새다.
산국과 비슷하게 생긴 꽃으로 같은 노란색 들국화인 감국이 있다. 꽃잎에 단맛이 있어서 감국(甘菊)이라 부른다. 야생화 공부를 시작할 때 부딪히는 문제 중 하나가 이 산국과 감국을 구분하는 것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꽃송이 크기를 보는 것이다. 작으면 산국, 좀 크면 감국이다. 기준점은 지름 2㎝다. 산국(약 1.5㎝)은 요즘 나오는 새 10원짜리, 감국(약 2.5㎝)은 500원짜리 동전 크기이기 때문에 100원짜리를 대보아 이보다 작으면 산국, 크면 감국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잎이 감국은 좀 두껍고 둥글게 보이는 편이고, 산국은 얇고 톱니가 날카롭게 보인다. 감국은 향이 산국만큼 진하지 않기 때문에 향기가 강하면 산국일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감국은 줄기 하나에 4~5개의 꽃이 달리지만, 산국은 더 많이 무더기로 달려 우산 모양을 만드는 것이 다르다.
그러나 자라는 환경에 따라 꽃 크기가 달라질 수 있어 실제 산과 들에서 만나는 노란 꽃이 산국인지 감국인지 구분하는 것은 정말 힘들다. 야생화 사이트나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를 보면 산국인지 감국인지를 놓고 옥신각신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산국은 주로 중부 이북에 피고, 감국은 남쪽지방이나 바닷가 쪽에 피기 때문에 서울 근교 산에서 국화잎처럼 생긴 노란 꽃이 있다면 산국일 가능성이 높다.
산국이면 어떻고 감국이면 어떠하리
사람들이 흔히 들국화라 부르는 꽃에는 산국·감국 외에도 연보라색인 벌개미취·개미취·쑥부쟁이, 흰색이나 연분홍색인 구절초가 있다. 여기에다 꽃이 연보라색이면서 바닷가에서 자라는 해국(海菊)이 있다. 바다를 배경으로 만개한 해국은 야생화 애호가들이 꼭 한번 담고 싶어 하는 것이다. 들국화는 가을에 피는 야생 국화류를 총칭하는 말이기 때문에 ‘들국화’라는 종은 따로 없다. 이런 들국화 무리 중에서 노란색 작은 꽃송이를 가진 것이 산국·감국이다.
산국·감국은 주변에 흔하기 때문에 문학작품에 등장하지 않을 리 없다. 양귀자 장편소설 <모순>은 여주인공이 정반대 성격인 두 남자를 놓고 고민하는 내용이다. 두 남자 중 한 명은 야생화 사진작가다. 그는 여주인공에게 구절초를 알려주면서 “쑥부쟁이 종류나 감국이나 산국 같은 꽃들도 사람들은 그냥 구별하지 않고 들국화라고 불러 버리는데, 그건 꽃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꽃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그 이름을 자꾸 불러 줘야 해”라고 말한다.
감국은 소설가 김연수의 책 <청춘의 문장>에서 보았다. 이 책에 ‘때로 쓸쓸한 가운데 가만히 앉아 옛일을 생각하면 떨어지는 꽃잎처럼 내 삶에서 사라진 사람들이 하나둘 보인다. 그 빈자리들이 그리워질 때면 두보의 시 ‘뜰 앞의 감국 꽃에 탄식하다’를 읽을 만하다’고 쓴 대목이 있다.
처마 앞 감국의 옮겨 심는 때를 놓쳐
중양절이 되어도 국화의 꽃술을 딸 수가 없네
내일, 쓸쓸한 가운데 술에서 깨고 나면
나머지 꽃들이 만발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
- 두보 ‘뜰 앞의 감국 꽃에 탄식하다’ 전문
김연수는 이 시를 두고 “꽃이 떨어질 때마다 술을 마시자면 가을 내내 술을 마셔도 모자랄 일이겠지만, 뭇꽃이 무수히 피어나도 떨어진 그 꽃 하나에 비할 수 없다는 사실은 다음날 쓸쓸한 가운데 술에서 깨어나면 알게 될 일”이라고 했다.
산과 들에 핀 야생 국화들을 그냥 들국화라고 부르기엔 좀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국화를 닮은 노란 들국화가 산국이면 어떻고 감국이면 어떤가. 이름을 몰라도 노란 들국화와 눈을 맞추어주면 들국화는 진한 향기와 가을 정취로 화답할 것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