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적으로 애착할 수 있는 대상을 찾는 것은 인간에게 의식주 이상으로 중요한 기본 욕구다. 애착(attachment)은 아이와 아이를 돌보는 양육자 간 정서적 유대를 의미하며, 심리학에서는 애착을 장기적인 인간관계의 근본으로 볼 정도로 중요한 이슈다. 애착을 연구한 심리학자 존 볼비는 유아기의 정서적 박탈이 훗날 인격 형성과 타인과의 관계 방식을 결정하는 주요 요인이라고 봤다. 애착 욕구는 성인기에도 동일하게 중요하다. 놀라운 것은 아동기의 애착형태가 성인기까지 지속되며 삼대를 거쳐 세대에 전수된다는 사실이다.
아이의 심리적 안정은 다양한 표현에 민감하고,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양육자가 가까이 존재하고 있을 때 가능하다. 부모는 아이에게 안전지대(safety zone)가 돼 세상을 자유롭게 탐색하고 소통하는데 필요한 안정감을 제공한다. 즉, 부모는 아이들이 세상을 탐구하는 동안 예기치 않은 두려움이 생길 때 언제든 찾아와 안정감을 회복할 수 있는 따뜻한 안식처다. 부모-자녀의 관계가 안전한 애착대상으로 존재하면, 일시적으로 관계에 균열이 생기더라도 결국 서로에 대한 신뢰로 관계의 균열을 견딜 수 있고, 더 나아가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한다.
법적 이혼을 준비하는 많은 부부들이 이렇게 말한다. ‘어떤 부부들은 파산해서 돈이 없어도, 매일같이 싸워도 사는 데 우리는 왜 이렇게 됐을까요?’ 아무리 싸워도 회복해서 잘 사는 부부가 있는 반면, 자신은 왜 그렇지 못한가 하는 의구심이다. 실제 결혼생활의 파국과 이혼을 야기한 원인으로 생각해왔던 부부갈등이나 이벤트들이 사실은 직접적인 이유가 아닐 수 있음을 종종 목격한다.
부부가 안정적으로 애착하고 정서적 유대를 맺으면, 갈등을 겪더라도 파탄에 이를 정도의 균열은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다툼이 서로의 속을 뻥 뚫리게 하는 과정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안정적인 애착이 부족한 부부에게 싸움은 배우자와의 유대감이 단절되고, 관계를 위협하는 신호다. 사랑하는 사람이 더 이상 안전지대가 되지 못한다고 느끼고, 두려워하며 고립감과 외로움에 빠진다. 감정 조절 및 두려움과 공포에 대한 학습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뇌의 편도체(amygdala)가 의식하기도 전에 ‘위험해!’ 하고 위기 경보를 보내기 때문이다.
매달리고 피하는 패턴을 깨야
안정적인 유대감의 부부는 편도체의 위험신호를 잠시 뒤 흘려보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부는 압도돼 두려움에 빠진다. 이때 배우자 중 한쪽은 위로와 지지를 원하며 상대방에게 매달리고, 다른 한쪽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배우자로부터 멀어지는 선택을 한다. 이런 상태가 지속될 경우, 부부는 상대의 욕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자신의 상처와 두려움을 방어하는데 몰두한다. 그리고 상대의 표면적 행동에만 주목하며 못마땅해 한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의심하고 두려움이 커져 공포가 되면, 관계에서 과도하게 긴장하고 예민하게 집착하거나 정반대로 상호작용을 회피하고 거리를 두는 관계 패턴을 나타낸다. 매달리고 쫓는 사람과 도망가는 사람의 불행한 관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나의 애착 욕구가 좌절됐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배우자의 애착 욕구에 반응해야 한다. 그렇게만 되면 부부의 정서적 유대는 회복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관계 속에서 서로의 좌절된 욕구를 인식하고 접근해야 한다는 말이다.
안정적으로 애착하지 못한 부부는 자신의 진짜 욕구에 직면하고 배우자에게 솔직하게 다가가지 못한다. 대신 상대방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 하나하나를 자신을 배려하지 않고, 비난하며, 마음이 없는 증거로 왜곡하는 등 부정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이 과정에서 단절되고 유대가 깨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두려움은 증폭되고, 스스로 부여한 의미를 확증하게 된다. 부부관계에 불화가 생기면, 주로 남자들은 자신이 존중받지 못하고 실패했다고 느끼며 인생의 의미를 상실하는데 이른다. 반면 여자들은 사랑받지 못하고 외로움을 느끼며 버림받을까 불안에 빠진다.
실제로 불화 부부를 상담해보면, 상대에 대한 불만들은 아주 일상적인 행동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각자가 부여한 중요한 의미가 내포돼 있다. 가령, 힘들게 야근하고 들어온 남편은 아내와 맥주라도 한잔하면서 피로를 풀고 싶지만, 먼저 자고있는 아내를 보는 순간 ‘이렇게 살면 뭐하나,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데…’, ‘애들에게 매어 안중에도 없고 나는 그냥 돈 벌어오는 기계에 불과하구만’ 하며 다른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한편, 늦게까지 독박육아를 한 뒤 지쳐 잠자리에 든 아내는 ‘이렇게 혼자서 아등바등 외롭게 살 거 뭐 하러 결혼했나. 결국 나는 혼자’라며 한숨과 눈물로 잠든다. 여느 가정에나 있을 법한 아주 흔한 상황이 이렇게까지 확대되는 것이다.
만일 남편과 아내가 좌절된 자신의 진정한 욕구를 인식했다면, 그래서 배우자의 좌절된 욕구에 반응해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내가 잠든 침실로 들어가 같이 잠을 청하거나, 다음 날에라도 아내에게 야근 후 들어올 때는 함께 맥주라도 한잔하며 피로를 풀고 싶다고 제안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내도 외롭고 힘든 결혼생활의 피로를 남편과의 맥주 한잔으로 풀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서로의 좌절된 욕구 알아주기
결혼 만족에 관련된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부부간의 의사소통기술이다. 부부관계 연구에 저명한 거트만 박사는 부부의 의사소통기술이나 방식이 이혼을 예측하는 요인이라고 했다. 앞서 언급한 부부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남편이 아내에게 ‘여보~ 어제 피곤했나봐? 당신이랑 맥주 한잔하면서 쉬고 싶었는데 자고 있어서 아쉬웠어~’, 혹은 ‘아이들 돌보느라 피곤하겠지만, 야근하고 올 때는 좀 기다려주면 좋겠어. 당신이랑 맥주 한잔하면서 이야기하면 피로가 풀릴 것 같거든~’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아주 좋은 의사소통을 한 것이다.
이 표현에는 ‘당신과 맥주 한잔하며 피로를 풀고 싶다’는 자신의 욕구와 ‘먼저 자지 말고, 같이 시간을 보내면 좋겠다’는 상대방에 대한 기대가 담겨있다. 좌절된 욕구를 배우자를 비난하는 방식으로 표현하지도 않고, 배우자와의 대화를 단절하거나 거리두기를 함으로써 부부관계를 더 악화시키지도 않는다. 이렇게 효과적으로 의사소통할 수 있다면 부부가 싸울 일이 어디에 있을까.
아주 간단한 행동임에도 하기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 애착의 중요성을 다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아동기에 불안정하게 형성된 애착이 성인기 부부관계에서 재현되면, 부부들에게 효과적인 대화법을 아무리 교육해도 적용하기 어려워한다. 존재 의미의 상실에 대한 불안과 사랑받지 못하고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반사적인 공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안정 애착 부부는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상적인 일에 자기도 모르게 의미부여를 한다. 이는 자신의 진짜 욕구를 찾기도 어렵고, 그것을 배우자에게 말로 표현하는 것도 어렵게 한다. 효과적인 의사소통은 상상하기도 힘들다.
이와 달리, 정서적 유대를 맺은 부부들은 싸우더라도 일정 시간의 휴지기를 가지고 나서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방의 행동 때문에 좌절된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를 가감 없이 표현할 수 있으며, 갈등 상황을 하나의 일상적 에피소드로 가볍게 소화한다. 또 마음에 들지 않았던 배우자의 행동 이면에 좌절된 욕구를 이해하고, 상대방의 욕구에 반응할 수도 있다. 이렇게 상대방으로 인해 좌절된 자신의 욕구에 적절히 반응할 기회를 허용하면 부부는 서로를 통해 욕구를 충족하는 관계로 나아가 더 깊은 정서적 유대를 형성할 수 있다.
우리 부부가 이렇게 저렇게 해봐도 같은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고 느낀다면, 배우자의 일상적인 행동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고 버림받게 될까 두렵고 불안하다면 자신 혹은 배우자의 애착 문제를, 그리고 부부의 애착 패턴을 살펴보기를 권한다. 부부관계는 가정의 분위기를 좌우한다. 부부의 불화는 부모-자녀 관계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
임상현장에서 보면, 갈등의 골이 깊은 부부는 양육에서도 첨예한 갈등이 드러난다. 또 그런 분위기에 노출된 자녀들은 부모의 부부관계, 그리고 부모와 자신들의 관계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부정적으로 이해하고 예측하며 부정적으로 반응한다. 부부도 그렇지만, 아이들도 얼마나 혼란스럽고 불안하겠으며, 얼마나 조심스럽고 긴장되겠는가. 가족이 건강하게 사는 비결은 부부의 안정한 애착과 깊은 정서적 유대에 있다. 김민녀 임상심리전문가·교권침해 교사상담, 반디상담센터 부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