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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라이프&여행] 경주의 고분이 남긴 이야기

- 노동동, 노서동 고분군과 쪽샘지구

 

경주는 유명 관광지다. 예전에 경주를 찾았던 이유가 ‘고적 답사’ 또는 ‘수학여행’이었다면 요즘 경주를 찾는 이유로는 ‘황리단길’과 경주 시내의 아름다운 밤 풍경이 될 것 같다. 최근 교촌마을에 복원한 월정교의 밤 모습은 경주를 찾는 이들이 꼭 들러야 할 곳이다. 경주를 상징하는 장소, 찾아야 할 이유가 달라지긴 했으나 이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독특한 풍광도 있다. 바로 경주의 옛 무덤, ‘고분’이 가득 들어선 시내의 모습이다.

 

예전에 경주 시내의 고분이라고 하면 대체로 ‘대릉원’ 일대를 가리켰다. 황남대총과 천마총을 대표로 23기의 고분이 있어서 고분 사이를 걷는 것만으로도 신라 역사를 체험할 수 있었다. 이 고분 영역은 최근에 넓어졌고 앞으로 더 넓어질 것으로 보인다. 대릉원 북쪽 담장을 낮추면서 경계가 흐릿해지고 그 옆에 있는 노동동 고분군, 노서동 고분군과 연결되는 기분이다. 또 앞으로 대릉원 동쪽의 쪽샘지구 발굴이 끝나고 대릉원의 다른 담장도 안팎의 시선을 통하게 만든다면 고분의 위용은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1971년, 대릉원에 속하는 천마총과 황남대총은 우리 손으로 발굴한 첫 번째 신라 고분이었고, 그 유물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근처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두 개의 공간, 노동동·노서동 고분군과 쪽샘지구도 신라의 역사와 신라 고분의 역사, 그리고 ‘발굴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이들 고분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재발굴 통해 알려진 사연들

 

대릉원 북쪽에 있는 노동동 고분군과 노서동 고분군은 작은 길 하나로 나뉜다. 길 동쪽의 고분군, 길 서쪽의 고분군이란 이름을 얻게 된 배경이다. 이 가운데 노동동 고분군은 모두 4기의 고분으로 이뤄져 있는데 이 가운데 유명한 것은 봉황대로 부르는 고분이다. 봉황대는 하나의 봉분으로 된 고분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커서 아래쪽 직경은 82m에 이르며 높이는 22m 정도이다. 그 옆에는 일반적인 고분의 모습과 달리 윗부분이 잘려 나간 모습의 식리총과 금령총이 있다. 이들 고분의 모습이 이렇게 된 것은 발굴 이후 원형 복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고분 발굴 후에 원래 모습으로 복원한 사례도 있다. 천마총과 황남대총이 여기에 해당한다.

 

건너편 노서동 고분군에는 모두 13기의 고분이 있다. 이 가운데 ‘서봉황대’로 부를 정도로 규모가 큰 고분도 있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금관총과 서봉총, 그리고 호우총이 될 것 같다. 이들 고분군은 모두 고유의 번호로 부른다. 예를 들어 천마총은 155호분이다. 이름이 있는 무덤은 대체로 출토된 유물로 이름을 붙인다. 금관총은 처음 금관이 발견된 곳, 금령총은 발굴 과정에서 금제 방울이 발견된 곳, 그리고 서봉총은 봉황무늬가 들어간 금관이 발견된 곳이다. 그러나 이들 고분을 발굴한 시기가 모두 일제강점기라는 점에서 문제가 많다.

 

가장 큰 문제는 제대로 된 발굴보고서가 없다는 점이다. 1926년에 발굴한 서봉총도 그러한 예다. 서봉총은 신라 고분에서 흔히 보이는 두 개의 고분이 이어져 있는 형태로 낙타 등, 또는 표주박 모양의 고분이다. 이 가운데 북쪽 고분을 1926년에 발굴했다. 당시 한국을 방문한 스웨덴의 구스타프 왕자가 고고학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조선총독부는 발굴에 참여시켰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처럼 화려한 금관을 비롯해 많은 유물이 출토됐다. 특히 이때 발굴된 금관 끝부분에 봉황 장식이 있는 점은 다른 신라의 금관에서 볼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일제는 이 고분의 이름을 스웨덴의 한자 표현인 ‘서전’으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구스타프 왕자가 여기에 부담을 느껴 스웨덴의 ‘서’와 봉황의 ‘봉’을 넣어서 서봉총이 됐다.

 

서봉총은 최근 재발굴됐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서봉총에 대한 발굴보고서가 없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의 이유는 당시 발굴 자체가 미흡했다고 봤기 때문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2016년에서 2017년까지 2년에 걸쳐 발굴했다. 발굴보고서 내용 중 특이한 것이라면 무덤 주인공을 위해 귀한 음식을 여러 개의 항아리에 담아놓고 제사를 지낸 뒤 무덤 주변에 묻은 것이다. 여기에서 돌고래나 남생이, 복어, 성게, 청어, 방어 등이 발견됐다. 그리고 이제까지 서봉총 직경이 36m라고 알려진 것과 달리 실제로는 그 규모가 47m에 이른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최근 국립경주박물관에서 특별전을 열었던 ‘금령총’ 역시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1924년에 발굴한 금령총은 소략하긴 하지만 22일 동안 진행된 발굴보고서가 남아 있다. 그런데 이 역시 지금 기준으로 볼 때는 부족해 다시 발굴한 것이다. 2018년부터 2020년까지 3년에 걸쳐 재발굴을 한 결과 원래 알려진 것보다 규모도 크며 새롭게 제기와 물건을 담은 항아리도 발굴했다. 금령총의 특징은 발견된 금관이며 목걸이, 허리띠의 위치로 보아 어린아이의 무덤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또 금관보다 먼저 2개의 금방울이 발견돼 금령총이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이러한 유물을 살펴보면 특별한 사연을 가진 무덤임을 추측할 수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1924년, 금령총 발굴 과정에서 유물이 무려 열차 한 칸을 모두 채울 정도였다고 한다.

 

금령총에서 발견된 두 개의 금령, 곧 금방울은 화려하면서도 세밀한 무늬를 넣은 것으로 푸른 유리로 장식해서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장식품이다. 어떤 면에서 신라를 대표하는 유물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금령총에는 ‘방울’과 관련된 유물이 더 있다. 예를 들어 금령총에서 발견된 금관의 경우 옆 부분에 작은 금방울이 달려 있다. 또 악기로 쓴 것으로 보이는 흙으로 만든 방울도 있다. 이러한 방울의 쓰임을 짐작할 수 있는 유물이 있으니 바로 ‘말 탄 사람 모양 토기(기마인물형토기)’다. 모두 두 개가 발견됐는데, 쓰임새만 놓고 보면 주전자이다. 흥미로운 부분은 토기 두 개의 모양이 조금 다르다는 점이다. 하나는 주인공이 모자도 쓰고 갑옷을 모두 입고 있고 말도 마구를 모두 갖춘 것이 영락없는 귀족의 모습이지만, 다른 하나는 옷도 간단하게 입었으며 말 역시 별다른 장식이 없는 간소한 모습이다. 그런 점에서 귀족 모습의 토기는 무덤의 주인공인 소년을, 평범한 모습의 토기는 하인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노동동과 노서동, 그리고 더 나아가 경주의 고분은 모두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의 바탕은 바로 고고학을 통한 발굴, 역사를 통한 해석이다. 그런 점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발굴은 무엇보다 중요한 과정이라고 할 것이다. 신라 고분의 모습을 이해하기 위한 공간인 천마총도 중요하지만 발굴한 현장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노서동 고분군에 있는 금관총 전시관도 중요하다. 1921년 발굴된 금관총은 일제강점기를 포함해 신라 고분 중에는 최초의 발굴이었다. 이때 금관이 나오면서 신라 고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 공간을 제대로 살펴볼 수 있는 전시관이 최근에 생겼다. 신라 중대의 고분은 돌무지덧널무덤으로 둥근 냇돌을 쌓아서 봉분을 만든다. 다만 돌을 쌓거나 무덤을 만드는 방식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는데 금관총 전시관은 이를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실제 발굴 장면도 볼 수 있어

 

실제 발굴 장면을 볼 수 있는데, 바로 ‘쪽샘지구’의 고분군이다. 고분군 근처에 쪽샘이 있다고 해서 쪽샘지구로 부르는데 44호분은 발굴 현장을 공개하고 있다. 44호분의 경우 고분을 둘러싼 ‘유적발굴관’이 있어서 역사를 찾아가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특별한 곳이기도 하다.

 

이 지역은 2002년부터 이 일대 민가와 사유지를 매입했으며 2008년부터 고분 조사를 시작했다. 지금의 대릉원과 노동동, 노서동 고분군 역시 정비되기 전에는 여러 채의 집이 고분 안팎에 들어서 있었다. 조사 과정에서 150여 기의 고분이 확인됐으며 2014년부터 봉분의 모습을 잃어버린 44호분을 발굴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금동관을 비롯해 금, 은으로 된 장신구와 금동으로 된 비단벌레 장식, 바둑돌 등이 발견됐다. 장신구의 크기와 은장도가 출토됐다는 점에서 미성년 여성이 주인공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곧 ‘바둑을 좋아하던 공주’가 잠들었던 곳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보통 바둑이 남성의 놀이로 알려진 것이라는 점에서 특이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겉으로는 모두 둥근 모습의 비슷비슷한 고분이지만 그 주인공은 모두 다른 사람이니 그들의 이야기를 모은다면 신라의 역사 이야기는 훨씬 풍부해질 것이다. 지금까지 발굴된 고분의 이야기를 찾아가는 것으로도 이전과 다른 경주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이번 경주 여행에서는 대릉원을 비롯해 노동동과 노서동, 그리고 쪽샘지구의 고분들 사이를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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