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이 오면 생각나는 것들 7-- 쑥떡 만들기 시골에서 가난하던 시절에 설날이 돌아오면 떡을 만들기 위해서 쓸 쌀이 상당한 부담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떡의 양을 늘리기 위해서는 봄철에 산이나 들에서 캐서 말려두었던 나물들을 이용하여 떡을 만드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런 나물로 대표적인 것이 쑥과 번취라는 취나물이었다. 쑥이야 다 아는 것이지만, 번취라는 것은 취나물의 일종인데, 나물 잎의 뒷면이 아주 밝은 흰빛을 띠고 있는 나물로 이것을 삶아서 말려 두었다가, 떡을 만드는데 이용하는 나물이다. 이 번취는 떡을 만들면 색깔이 아주 엷은 쑥색을 띠게 되는데, 번취 특유의 맛이 쑥보다 약간 부드러우면서 향긋한 것이 특징이다. 가난한 집안사람들은 봄철에 산에 가서 나물을 뜯으면서도 이 번취를 더 많이 뜯으려고 애를 쓰고, 좀 형편이 나은 집에서는 번취보다는 취나물을 더 좋아하여서 서로 뜯는 것이 다를 정도로 이 번취에 대한 기호가 달랐던 것을 보았다. 이 무렵에는 봄철이면 산에 가서 온 종일 산나물을 뜯어 오는데 보통 이불 호창이불 싸개용으로 쓰는 큰 천을 가지고 가서 마치 산더미 같은 큰 나물덩이를 만들어가지고 돌아오곤 하였다. 물론 쑥을 캐는 것도 다르지 않았
설날이 오면 생각나는 것들 6-- 떡국용 장조림 떡국에 쓰는 양념장을 무엇을 쓰느냐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고, 지방에 따라 달라지곤 한다. 산골에서는 옛날에는 꿩고기를 장조림을 해두고 떡국을 끓일 때마다 조금씩 넣어서 간도 맞추고 약간의 고기 냄새와 맛이 나도록 하곤 하였다. 귀한 꿩고기를 많이 넣어서 충분하게 먹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바닷가나 평야지대에서는 꿩이 흔하지 않으니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평야지대에서는 닭을 꿩 대신으로 썼으니, ‘꿩 대신 닭’이 된 셈이다. 그렇지만 바닷가에서는 꿩이나 닭보다는 바다에서 나는 굴을 대신 썼다. 그래서 굴을 넣어서 떡국을 써야 하였다. 이렇게 떡국을 끓일 장국의 재료를 준비하는 것은 남자들의 일이었다. 닭을 잡아야하고 그것을 씻어서 잘라주는 것까지가 남자들의 할일이다. 닭 중에서 가장 통통하게 살이 찌고, 크게 자란 놈을 택하여 잡아야 한다. 대부분 미리 잡을 것을 정해두고, 다른 일이 생겨도 이것을 절대로 잡거나 하는 일은 없다. 설날을 2,3일 남겨두고서 닭을 잡는다. 잡은 닭은 반드시 짚불로 그을어서 잔털이 남아 있는 것을 깨끗하게 제거하고, 또한 피하 지방을 피부로 스며들게 하여 줄이는
설날이 오면 생각나는 것들 5-- 떡국대 만들기, 썰기 요즘은 떡국대도 시장이나 떡집에서 그냥 사오면 되지만, 옛날에는 그렇게 만들어 주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각자 자기 집에서 만들어야 했다. 내가 어린 시절에 직접 떡국 대를 만드는 과정을 보고 자라다가, 중학교 시절부터 방앗간에서 떡국 대를 뽑아주는 곳이 생겼다. 그런데 우리 집에서 아버님께서 방앗간을 운영하고 계셨기 때문에 떡국 대를 뽑는 일을 도와야 하였다. 중 2,3 때인 1958,9년의 설날이 다가올 때는 방학 동안이 되어서 이일을 도와드리곤 하였다. 집에서 직접 만들기는 떡쌀을 담가서 그냥 쌀로 고두밥을 지어서 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게 하면 곱지 않다고 가루로 빻아서 익혀서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익힌 밥이나 익힌 가루를 절구에 넣고 곱게 찧어서 잘 찧어진 것을 큰 도마 위에 놓고 길게 늘이면서 비벼서 요즘 기계로 뽑은 떡국 대처럼 만들어서 말려 둔다. 만 하루가 지날 무렵에 썰어야 하는데, 만약이 너무 시간이 이르면 칼에 달라붙어서 썰기가 쉽지 않고, 너무 마르면 손바닥에 멍이 들도록 썰어야 하였다. 이렇게 써는 일이 힘들다 보니 어떤 집에서는 동전모양으로 떡국 대와 직각이 되게 썰어서
설날이 오면 생각나는 것들 4-- 유과 만들기 설날 차례상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 중의 하나가 유과 유밀과 또는 산자라고 부른다.옛날부터 명절 때나 제사 때 만들어 먹던 우리나라 고유의 과자로서 특히 전남지방 특유한 조리법이 전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만드는 법을 보면 찹쌀과 콩은 5일 정도 물에 불려 곱게 빻는다. 찹쌀가루와 콩가루를 골고루 섞어 따뜻한 물과 술(막걸리, 소주, 청주)을 넣어 반죽한다. 찜통에 면포를 깔고 반죽을 뒤적여 주면서 1시간 정도 찐 다음에 함지나 절구에서 서로 섞이도록 나무방망이로 20여분 간 치댄다. 도마 위에 밀가루를 깔고 반죽을 탁구공보다 좀 크게 떼어 밀가루를 묻혀가며 밀대로 두께 0.3㎝ 정도로 밀어 네모나게 만든다. 따뜻한 방바닥에 네모나게 만든 반죽을 한지 위에 놓고 골고루 건조되도록 뒤집어 주는데, 이때 톡 소리가 나면서 부서질 때까지 3일정도 충분히 건조시킨다. 이때는 아이들은 방안에 얼씬도 해서는 안 된다. 망가뜨리기도 할 염려가 있지만, 먼지나 머릿카락이 날린다고 그 방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을 반대기라하고 이 반대기를 밀가루를 완전히 털어내고 식물기름(들기름 혹은 콩기름 사용)에 튀겨
설날이 오면 생각나는 것들 3-- 조청 단지 설날이 돌아오면 주부들이 하는 큰 일 중의 하나가 조청을 곱는 일이다. 설탕이 귀하던 시절에 시골에서는 설날에 조청을 고우면 이것이 일 년 내내 가족들에게 줄 수 있는 단 것의 재료를 만드는 일이 되었다. 혹시라도 단 ㅈ것을 먹을 일이 생기거나 어르신들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설에 만든 조청을 단지에 모셔두고 일 년 내내 꿀 대신으로 새ㅣ용하곤 하였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 조청을 곱는 일이 보통 큰 일이 아니었다. 가을에 보리씨를 뿌리고 남겨주었던 보리를 물에 불려서 시루에 담아서 놓아두고 하루에도 몇 번씩 물을 주곤 하면 보리가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이렇게 보리 싹이 나오기 시작하면 2,3일 동안 더 싹을 키워서 싹의 길이가 1~3cm정도가 되면 멍석에 널어서 말린다. 이것을 엿기름이라고 하는 식혜의 원료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잘 말린 엿기름을 맷돌에 갈면 엿기름가루가 되는 것이다. 조청을 만들려면 우선 식혜를 만들어야 한다. 엿기름을 물에 불리도록 충분히 물을 붓고 담가두고 나서 고두밥을 한다. 고두밥은 술을 빚을 때 하는 밥을 일컫는데 보통 먹는 밥보다 더 되고 고슬 하게 짓는다. 엿기름을 담가둔 것을
설날이 오면 생각나는 것들 2-- 놋그릇 닦기 이제 설날이 되어가니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서, 그 옛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하자. 그 설날의 추억들 중에서 가장 우리를 힘들게 한 일이 하나 있었으니 설날 준비는 대부분이 어머니의 몫이었지만, 우리 어린 남자들에게 주어진 몫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살날을 맞이하기 위해서 놋그릇을 닦을 때의 일이다. 요즘은 갖가지 재료로 만든 그릇들이 즐비하고 어지간하면 한두 번 쓰고 버리기도 하지만, 어머니들은 한 번 준비한 그릇을 한 평생 쓰시곤 하였다. 이 때 쓰던 그릇은 대부분이 유기라는 놋그릇이었다. [유기는 구리와 주석을 78:22로 합금하여 거푸집에 부은 다음, 불에 달구어 가며 두드려서 만든 그릇. 유기의 종류는 제작기법에 따라 방자(方字)와 주물(鑄物), 반방자(半方字) 등으로 나눈다.] -네이버지식백과- 이 유기는 유해독성을 막아주는 성질이 있어 인체에 유익하며 체내의 독을 제거하여주고, 순동 특유의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세균번식 억제 및 살균효과가 있어 사용하는데 큰 효과를 볼 수 있어서 면역력이 약한 노약자나 허약체질에 적극 추천할만한 용기이다. 다만 구리라는 금속이 쓰인 까닭에 무게가 무거운 것이 단점이
설날이 오면 생각나는 것들 1-- 설빔 짓기 나는 시골에서 자라서 설날에 대한 추억이 유난히 많다. 이제 설날이 되었으니, 그 설날의 추억들을 차례로 적어볼까 한다. 가장 먼저 설날을 맞이하는 어머니들이 해야 할일이 베를 짜서 아이들의 설빔을 만드는 것이었다. 벌써 한 달 전쯤부터 어머니들은 아이들에게 줄 옷을 만들기 위해서 열심히 베를 짰다. 지금처럼 옷을 사다가 입히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6.25 전쟁이 시작되어서 휴전이 되고 공비토벌 등으로 시끄럽던 그런 시절을 산골에서 보내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집에서 어머니의 손으로 다 해야 하는 시절이었다. 그 후로 거의 10년이 지나서 초등학교 4학년1955년 무렵에야 겨우 옷감을 사다가 옷을 지어 입을 수 있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전의 이야기를 해보자. 가을 농사가 끝나면 어머니들은 밭에서 딴 목화를 가지고 솜공장으로 가서 목회 솜을 만들어 오셨다. 이때부터 사실은 설빔을 짓기 위한 일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목화솜을 가져다가 기다란 요즘 길거리에서 파는 어묵꼬지처럼 길게 말아서 고치라고 하는 것을 만든다. 이것 고치를 가지고 물레에서 가느다란 실로 뽑아내는 것이다. 물레의 가느다란 가
-‘이런 사람이 되어라‘ 시 한 장씩으로 격려 해주었던 그 많은 아이들은?- 나는 교직 생활 중에 유난히 6학년 담임을 많이 한 경우에 해당한다. 42년 총 교직 경력 중 학급담임을 하였던 것은 27년이었고, 그 중에서 10년을 6학년 담임을 하였으니 좀 많은 편이라 하겠다. 이 11번의 6학년 담임 기간을 별나게 보낸 기록들이 많다. 중학입시를 위해서 아이들과 함께 200일간 교실에서 합숙을 하면서 입시 공부(67)를 시켰는가 하면, 졸업사진까지 다 찍고 나서 전근(72)이 되어서 비담임으로 전락하기도 하였고, 아이들이 이발을 손수 해주면서(77) 보내기도 하였고, 방학동안 마을별 마을공부방을 운영하여 전국적으로 알려지기도(78)하였었다. 경기도로 전입한 뒤로는 첫 번째 학교에서 3년 연속 6학년만 담임을 하기도 하였고, 다음 학교에는 아이들과 함께 박태기나무의 씨앗을 심어 가꾸어서 졸업식날(84) 모두 3포기씩 꽃나무를 선물로 안겨 주기도 하였다. 교감으로 발령을 받은 뒤로부터는 근무하던 학교마다 매년 졸업생들에게 학교문집을 만들어서 졸업기념문집으로 안겨주었었다. 그러나가 내가 교장이 되면서 부터는 학교문집과 함께 졸업하는 어린이들에게 그들이 희망을 실어
날마다 날으는 연습을 하는 아이 아람이는 오늘도 학교가 끝나기 무섭게 집으로 달려갑니다.엄마가 밥상에 차려 놓은 점심상 앞에 주저앉아서 밥을 퍼넣고서는 밥상을 밀어 놓은채, 방바닥에 엎드려 선생님이 내어 주신 숙제를 얼른 끝냅니다. 코를 훌쭉여 가면서 숙제를 끝내고서 방바닥에 책과 공책을 널부려 놓고 그대로 집을 나섭니다. 아람이는 오늘도 땡볕이 내리 쬐어서 숨을 제대로 쉴 수도 없는 무더위 속에서 함께 놀아줄 친구도 없이 한나절을 보내야 합니다. 그래서 이골목 저골목을 혼자서 헤매고 다니다가 이 즐거운 놀이터를 찾아낸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 그날은 유난히도 무더워서 정말 숨이 턱에 닿을듯한 더위에 지쳐서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던 아람이는 마을의 아이들이 모여서 놀고있는 골목 어귀에서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아람이네 골목의 아이들이 서넛이 모여서 공깃돌 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람이는‘이 아이들이 나를 친구로 받아 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생각을 했지만 차마 자기도 함께 놀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곁에서 들여다 보다가 아뭏소리도 못한채 골목을 벗어나서 큰길가로 어정어정 걸어 나갔습니다. 통일로를 달리는 차들이 쉴사이 없이 꼬리에 꼬리
서울시 서대문구(구청장: 문석진)에서는 지난해부터 시작한 기후변화교육에 대한 평가가 예상 외로 좋다고 보아서, 금년부터는 환경교육의 영역을 5개 영역으로 확장하여서 대폭 강화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지난해에는 기후변화 한 영역에 대해서만 8명의 강사가 활동을 하였는데, 금년부터는 지난겨울에 양성한 13명의 새로운 강사들을 투입하여서 21명의 강사가 관내 초등학교와 유치원을 대상으로 기후변화, 에너지, 자원 순환 및 재활용, 바른 먹거리, 홍제천 생태교육 등 5개 영역으로 확대하여서 실시하기로 하였다. 오늘은 신년도의 계획에 대한 협의를 하는 매월 월례회로 그 동안 추진하여온 환경교육센터의 교육프로그램이 완성 되어감에 따라 2월 중순부터 3월초까지 매주 4일씩 잇따라 5개 전 역역을 골고루 재학습하고 보충 수업을 받기로 하였다. 수업은 초등교육을 위한 준비가 15시간이고, 유치원 수업을 위한 강의가 9시간으로 짜여져 있으며, 실습과 자료 활용 위주로 이루어져 현장수업에 당장 필요한 정보를 재충전할 계획이다. 이 강사교육은 바로 현장 수업에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되고, 현장 수업의 자료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되므로 전원 빠짐없이 참석하여야 한다
오늘 헬스를 마치고 나오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친구가 “오늘 사범님한테 칭찬 들었어! 이 나이에도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고 탁구가 더 잘 되던데…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더니.”하면서 좋아하는 것을 보았다.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에게는 칭찬만큼 좋은 보약은 없다. 이렇게 좋은 보약을 모르고 질책을 해야 잘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교장을 발령이 나기 직전에 근무하던 학교에서 이런 문제로 교장 선생님과 교감인 나의 생각이 달라서 가끔은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았었다. “교감선생님은 도무지 선생님 편만 들어주고 있으니 학교가 제대로 돌아갈 수가 있어야지. 제발 싫은 소리도 좀 하고 나무라기도 해야지 나만 나쁜 사람이; 되지 않아.”하시는 교장 선생님은 직원들을 나무라지 않는다고 나를 꾸짖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생각이 아니어서 늘 이런 경우가 되면 “제가 잘 타이르고 따로 이야기하렵니다. 앞으로 더 잘하게 할게요.”하고는 곤란한 자리를 넘기곤 하였다. 물론 교장선생님이 지적한 선생님과 따로 만나서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선생님, 교장선생님이 화가 나신모양이에요. 그걸 그렇게 하셔서 지적을 받으면 선생님도
우리 사회에서 젊은이들에게 가장 묵직한 짐이 되는 단어가 은퇴, 퇴직 등의 직장을 그만둔다는 단어일 것이다. 그 만큼 우리 사회에서 직장을 가진다는 것이 어렵고 또 그것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본다면, 은퇴라는 말은 참으로 잘 못된 말이 아닌가? 은퇴라는 말은 사전적인 해석으로는 다음과 같다. 은퇴 -[명사] 직임에서 물러나거나 사회 활동에서 손을 떼고 한가히 지냄. 그러나 요즘 우리 사회에서 퇴직하거나 은퇴를 하였다는 사람이라도 이 말의 뜻처럼 한가하게 지내는 경우가 그리 흔하지 않다. 더구나 사회적인 활동까지 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비록 지금까지 활동을 하던 일에서 물러나더라도 다른 사회적인 활동을 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록 돈벌이가 안 되는 일이거나, 오히려 돈을 소비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사회적인 활동까지 손을 떼어 버리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다는 말이다. 본래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람이 살다보면 자기가 종사하던 현직에서 물러나서 그 직에서는 물러났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다른 일이나 활동을 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대표적으로 직장에
오늘 드디어 67회 헌혈대에 누웠다. 내일부터 헌혈하고 인증 샷을 날리면 이벤트에 응모할 수 있는데, 하루가 빨랐지만 시내에 나온 김에 하고 가야 하니까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처음 헌혈을 시작 할 때에 요즘처럼 헌혈의 집이 흔하지도 않았고, 헌혈에 대한 생각들이 별로 활발하게 권장도 되지 않았던 1980년대의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정확한 말짜를 알기 위해 헌혈증명서 발급을 신청하고 있지만 얼른 출력이 되지 않아서 찾을 수가 없다. 다만 1985년 1월 12일 방학 동안에 용기를 내어서 적십자혈액원을 찾아갔다. 나는 서대문구 홍제동에서 마포에 있던 혈액관리본부당시는 혈액원을 직접 찾아가서 첫 헌혈을 시작하였다. 헌혈을 할 시간이 거의 없어서 기회를 갖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경기도 파주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왕복 3시간이상이 소요되는 출퇴근 시간 때문에 헌혈을 할 시간에 도착하기란 거의 불가능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방학 중에 수원 교육위원회나 교총경기도지부에 출장을 가는 날이면 수원 역전의 헌혈의 집을 찾아서 헌혈을 하곤 하였다. 그러니 1년에 한 두 번이 고작이었다. 방학 때나 출장이 걸려야 헌혈을 할 수 있었으니 기회가 잘 생기
젊은 선생님들, 특히 여선생님들 시부모님께서 정성들여 해드린 음식을 잡수시다가 "음식이 맛이 없다." "제 맛이 아니야." 하시는 말씀을 들으시면 섭섭해 하지 마세요. 다음 글을 읽으시면 이해가 될 거예요. 부모님의 음식타박 대처법 이런 비밀이 시니어세대들이 자녀나 며느리들에게 음식 타박을 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음, 맛이 있다. 그런데 옛날 맛이 아니야!” 시부모님이 이렇게 말을 하셨다면 그 말을 들은 며느리나 자녀들은 얼마나 속이 상할까? ‘정성껏 해드렸더니 옛날 맛이 아니고, 맛이 없다니?’ 하면서 은근히 부아가 날것이다. 그러나 그 말씀은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말이니, 걱정할 것이 없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면 무슨 말이냐고 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노화의 원리를 안다면 바로 해결이 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노화하면서 모든 기관의 기능이 쇠퇴하게 마련이다. 그중에서 맛을 느끼는 미각세포인 미뢰는 30세부터 매년 1%씩 감소하게 되어 있다. 만약에 지금 어르신의 연세가 70세라면 이미 40% 이상의 미뢰가 사라져 버린 상태이다. 그런데 이미 60% 밖에 느낄 수 없는 미각으로 옛날의 맛을 찾는다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1951년9월 1일에 전남 보성군 율어국민학교에 1학년에 입학을 하였다. 왜 9월 입학이었느냐고 묻겠지만, 1951년에 우리나라에는 9월 학기제가 시행되었던 같다. 그것도 1951년만이고 1962년에는 4월 학기제로 바뀌었다는 것을 내가 다니던 모교의 연혁을 보면 알 수 있다. 1951년 7월 18일에 모교의 제4회 졸업식이 있었고, 1952년3월 22일에는 제6회 졸업식이 있었으니 이 사이에 학기가 4월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되어서 9월에 입학을 한 나는 교실도 없는 학교에 가서 운동장에서 모래밭에다가 막대기로 ㄱ, ㄴ, ㄷ...을 쓰고, 1,2,3...을 쓰고 다니다가 공비토벌이 시작되어서 온통 전쟁터가 되어서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집에서 놀고 있었다. 지리산의 공비를 토벌하기 위해 국군과 경찰력이 동원되어서 지리산의 자락인 벌교의 존재산태백산맥의 초기 무대가 되었던 산으로 부터 조계산으로 몰아서 지리산으로 작전 구역을 좁혀가는 과정에서 내가 살던 율어면은 존재산의 전투 현장이 되었었기 때문에 학교에 다닐 수가 없었다. 집에서 쉬고 있던 동안에 우리 집은 동네의 가장 뒤편에 위치하여 있을 뿐만 아니라, 규모가 가장 큰 5칸 접집10칸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