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교육이 백년지대계라고 말을 하는 사람은 없다. 혹 그런 사람이 있다면 정치용 발언이라 보면 된다. 대부분 교육을 거창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치고 교육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각 당의 대선후보들이 정해졌다. 대선후보들은 대통령이 되면 이런저런 정책을 펼치겠다며 다양한 공약들을 내놓고 있다. 그 공약들 중에 교육과 관련된 정책들도 있다. 그런데 유독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내놓은 교육정책에 대해 말들이 많다. 정치권만 아니라 교원단체나 시민사회단체에서도 비판의 말을 쏟아내고 있다. 왜 많은 이들은 이명박 후보의 정책에 성토를 하는가. 어쩌면 그가 내놓은 정책들이 모든 국민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일부 계층을 위한 정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의 교육정책이 많은 사회적 혼란과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허면 이명박 후보가 내놓은 정책들 중 무엇이 문제인가. 사교육비 줄이기 위해 특성화 고교 만든다? 지난 9일 이명박 후보는 발표한 교육공약에서 아주 솔깃한 발언을 했다. ‘교육을 통해 가난의 대물림을 끊겠다.’고 한 것이다. 이 말은 가난한 자도 열심히 공부하면 부자가 된다는 말과 같다. 허면 지금까지
“그린다는 것은 무엇이냐?” “그린다는 것은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움은 그림이 되고, 그림은 그리움을 부르지요. 문득 얼굴 그림을 보면 그 사람이 그립고, 사 그림을 보면 그 산이 그리운 까닭입니다.” 생도청에서의 첫 만남에서 이루어진 홍도와 윤복의 대화이다. 윤복의 답에 홍도는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그건 자신의 내면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것을 윤복이 다시금 일깨워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을 능가할 한 천재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그림의 두 천재인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은 이렇게 운명적으로 만난다. 그리고 그 운명의 끈은 스승과 제자의 모습으로, 사랑하지만 사랑한다고 말을 할 수 없는 애절함으로, 때론 서로에 대한 경원의 모습으로 엮어진다. 두 명의 천재, 단원과 혜원 그리고 또 한 명의 천재 정조 사랑을 모르는 자가 사랑을 그릴 수는 없다. 아픔과 슬픔을 모르는 자가 아픔과 슬픔을 그릴 수가 없다. 또 쓸 수도 없다. 비록 그리고 썼다 할지라도 그건 영혼이 없는 화려한 껍데기에 불과하다. 이정명의 을 읽는 내내 줄곧 이런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왜 그럴까? 아마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말하는 세 사람(홍도, 윤복, 정조)의
시인이나 소설가에게 소원이 무엇이냐 물으면 뭐라 대답할까? 아마 평생 동안 세상에 길이 남을 명작 하나 남기는 것이라고 답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명작을 남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작가라 할지라도 어떤 사람은 유명세 타기를 좋아하는 이도 있고, 남의 글 비판만 하다가 자신은 글을 못 쓰는 이도 있다. 또 베스트셀러 몇 권을 내곤 거기에 안주하거나 자만에 빠져 자신의 일을 소홀히 하는 사람도 있다. 반면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도 있다. 그건 글쓰는 사람만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장애아를 위해, 또 어떤 사람은 의자 만드는 일에 온 정성을 바친다. 그 정성 속엔 사랑이라는 것이 담겨 있다. 인간에 대한, 일에 대한 따스한 숨결이 담겨 있다. 그 각기 다른 사랑의 그릇들을 김혜리는 여섯 개의 단편 동화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몇몇 작품을 살펴보자. 세상에 명작 하나 남기는 게 소원이에요 첫 번째 동화 는 한 동네에 살고 있는 작가들의 이야기다. 우거진 숲과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마을을 사람들은 이라 부른다. 이곳에 글을 쓰는 작가 네 명이 살고 있어서이다. 아야 씨는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그가 쓴 책은 내용을 가리지 않
아버지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묵묵함? 엄함? 아님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불철주야 일하는 사람? 어느 하나로 단정할 수 없다. 자식들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사람마다 환경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해서 아직은 아버지의 모습이 자식들에게 안길 수 있는 존재로 다가오기는 쉽지 않다. 물론 요즘은 아버지의 모습도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머니만큼은 친근한 존재는 아닌 것 같다. 며칠 전 학부모와의 진로 설명회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여섯 명의 어머니들과 상담을 하고 있는 동안 그 어머니의 아이들이 복도에 서서 엄마를 기다렸다. 가끔 창문을 열어보며 눈을 마주치곤 미소를 주기받기도 했다. 상담 중에 웬 불경한 행동이냐고 하겠지만 내겐 그 모습이 참 예뻐 보였다. 한 시간 삼십 분 동안 어머니들과 이야기가 끝나고 복도를 나오자 아이들은 일제히 자기 엄마를 찾아 팔짱을 꼈다. 어떤 아이는 등에서 껴안고 어린양을 부린다. 그 중엔 ‘우리 엄마 별로 안 좋아요.’ 하고 말을 했던 아이도 있었다. 암튼 열두 명의 모녀가 나란히 팔짱을 끼고 저녁 어스름 속으로 걸어가는 아름다운 모습에 나 또한 잠시나마 행복했었다. 이틀 후, 또
예전에 누군가가 시는 어떻게 읽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시의 언저리에 한두 번 맴돌았던 필자에게 시를 어떻게 읽느냐 하는 질문은 시가 무엇이냐 하는 질문과 다름없이 막연한 물음이었다. 그때 그 친구에게 뭐라 대답했는지 기억은 없지만 요즘은 있는 그대로 읽으라고 말한다. 자신이 시인이 되어보기도 하고, 시적화자가 되어 보기도 하면서 그림을 그리면서 읽어보라고 한다. 그러나 시 읽기가 어찌 쉬운 일인가. 자연과 사랑을 노래하는 시 읽기는 그런대로 편안하지만 어떤 대상에 대한 역발상의 표현과 인간의 내면을 다양한 표현을 통해 노래하고 있는 시를 읽기는 그리 편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필자에게도 그건 마찬가지이다. 허나 이러한 시도 천천히 한두 번 읽으며 음미하다 보면 새로운 맛이 새록새록 나옴을 알 수 있다. 이따금 시인에게 시적 사유란 어디까지일까 생각해 본적이 있다. 사물에 대한 인식의 변화, 그에 따른 표현의 발상은 역설과 반어 때론 해학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내면엔 사물에 대한 애정과 폭넓은 관심이 깔려 있다. 그것이 때론 사랑의 모습으로 신선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장인수의 시도 그 하나이다. 물 속에 처박힌 세발 자전거를 수초가 핥고
아영(가명)이는 소녀 가장이다. 그러나 아영이는 정부로부터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하고 있다. 호적상 엄연히 아버지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현재 고등학교 2학년인 아영의 호적엔 부모가 있지만 실질적으로 없는 것과 다름없다. 아영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모님은 이혼을 했다. 10년 전이다. 그때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현재 중1)은 4살이었다. 아버지와 이혼 후 어머니는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식들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중1 남동생, 엄마 얼굴도 몰라 1년 후, 아영이와 동생은 할머니 댁으로 보내졌다. 아버지는 남매를 그곳에 맡겨놓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렇게 떠난 아버지는 명절 때나 겨우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젠 아버지의 얼굴도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아영이가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본 게 중학교 1학년 추석 때다. 이후론 아버지도 더 이상 남매를 찾아오지 않았다. 다른 가족과도 연락이 끊겼다 한다. "저는 그래도 괜찮아요. 제 동생은 엄마 얼굴도 몰라요. 거기에 아빠 사랑도 한 번도 못 받았어요. 그게 젤 슬퍼요." 동생이야기가 나오자 금방 목이 멘다. 그러나 끝내 눈물을 보이려고 하지 않는다. 애써 눈물을 참는 아영이에게 가장 안타까운 게 뭔
어느 날 갑자기 한 아이가 도시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그 아이가 왜 어떻게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 그 아이의 가족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언뜻 보기에 그 아이는 불우하고 외로워 보인다. 그러나 그 아이는 건강하고 행복하다. 글을 읽고 쓰지도 못한다. 그러나 세상의 아름다움을 읽고 쓸 줄 안다. 아이의 하루는 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어른들의 일상과는 동떨어져 있다. 바다와 해, 달과 별 그리고 바람과 함께 한다. 그래서 아이의 영혼은 푸른 물빛을 닮았다. 그 아이가 르 클레지오가 쓴 에 나오는 '몽도'이다. (르 클레지오 지음·진형준 옮김)는 총 여덟 편의 중·단편 소설로 되어있다. 헌데 이 소설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이 어린아이들이고 자연과의 교감이라는 주제의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평자들은 '동양적 원시성'이라고 말한다. 그럼 몽도와 함께 잠시 여행을 떠나보자. 어린 몽도는 늘 푸른색 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약간 큰 초록색 티셔츠를 입고 도시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그리고 사람들과 만나고 도시 곳곳을 구경한다. 그리고 채소 장수의 일을 도와 몇 푼의 돈을 벌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말을 건다. 그러다 인상이 좋고
“저, 도둑질한 적 있어요.” 괜찮아. “저, 원조교제했어요.” 괜찮아. “저, 친구 왕따 시키고 괴롭힌 적 있어요.” 괜찮아. “저, 폭주족이었어요.” 괜찮아. “저, 죽으려고 했어요.” 괜찮아. “저, 공갈한 적 있어요.” 괜찮아. “저 학교에도 안 가고 집에만 처박혀 있었어요.” 괜찮아. “죽어버리고 싶어요.” 하지만 얘들아, 그것만은 절대 안 돼.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은 구절이다. 그는 무엇이고 괜찮다고 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상식으론 전혀 괜찮지 않은 것들을 그는 괜찮다고 말한다. 다만 한 가지, 죽어버리고 싶다는 말에는 절대 안 된다며 강하게 거부한다. 왜일까? 그에게 어제까지 일은 흘러간 과거이니까 전부 괜찮지만 죽는 건 안 된다고 한다. 죽음은 끝이지만 살아 있음은 희망의 만남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살다보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건 아님 혼자 힘으로건 행복한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조건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절망의 시궁창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아이들이 살아주기만 해도 좋다고 한다. 고맙다고 한다. 난 그의 이런 말에 저절로 고개를 숙였다. 그의 진정성이 읽는 이를 부끄
교무실에서 몇몇 교사들이 이야길 하다 왕따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게 됐다. 한 학급의 아이가 자신이 따돌림을 당한 것 같다면서 학교에 나오기 싫다고 했다는 것이다. 분분한 이야기 가운데 작년 겨울에 미국에 연수를 갔다 온 동료가 미국에서 나누었던 얘길 들려준다. "작년에 미국 연수 중에 그곳 대학생이 있었어요. 그 친구한데 왕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는데 의외의 답을 하더라구요." "뭐라 했는데요?" "본인의 책임이라는 거예요." "왜요?" "왕따를 당하건 왕따를 시키건 그것은 오로지 본인에게 물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이유가 뭐냐고 물으니까 색다른 답을 하더라고요." "뭐라 했는데요." "원인 측면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차피 스스로 이겨내야 할 거라고 하는데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 미국 친구에 말에 의하면 이렇다. 왕따 자체도 문제가 되지만 그것으로부터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그건 오로지 본인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학창 시절 왕따를 스스로 극복하지 못하면 사회에 나와서도 혼자 설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면 그 친구가 했다는 말도 일리는 있었다. 그러나 무조건 그 의견에 찬동할 수도 없었다. 사실 왕따의 현상을 살펴보면 왕따를 당하는
6년 전, 경기도 양평의 한적한 시골에 내려가 시를 쓰며 아이들에게 전해 줄 동화를 쓰는 시인이 있다. 칠순을 다 바라보는 나이의 최하림 시인이다. 최하림 시인은 동화를 쓰는데 창작 동화가 아니라 전래동화를 새로운 시각으로 써서 아이들에게 전해주는 작업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최하림 시인이 쓴 전래동화 시리즈는 18권이다. 부마를 잡으러 간 두 왕자 1권을시작으로 해서 현재 제 18권인 토목공이와 자린고비룰 출간했다. 최하림 시인이 들려주는 ‘구수한 옛날이야기’는 기존의 전래동화와는 또 다른 맛을 준다. 이야기의 내용이야 기존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시인의 말처럼 문학적인 맛을 덧붙이고 서사적 구조를 새롭게 하여 나름의 해석적 시각을 동화 속에 넣었기 때문이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동화를 쓰는 일이 그다지 특별한 일은 아니다. 괴테나 톨스토이도어린이를 위한 동화를 썼다. 지금도 많은 시인소설가들 중엔 동화를 쓰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우리의 전래동화를 시리즈로 계속해서 낸 경우는 드물다. 사실 시인이 동화를 쓰기 전에 발표했던 시들에서도동화적인 냄새는 있었다. 시인의 시에선 유독 자연과 관련된 시어들이 많다. 숲속으로 들어갔어요 / 뭉게구름 같은 숲속으로요
까치 네 마리가 교정의 소나무에서 사랑놀이를 하고 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꼭 싸우는 것 같다. 서로 뒤엉켜 노니는 것이 물고 물리는 듯한 모습이다. 그러나 까치들은 즐거운 사랑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한바탕 요란스레 울어대다 지치면 어떤 녀석들은 나뭇가지에 기대어 쉬고 어떤 녀석은 옆에 있는 감나무로 날아가 노랗게 익은 감을 쏘아 먹는다. 한참을 그렇게 쏘아 먹곤 다시 어울리기 시작한다. 그러고 보니 가을은 감이 익어가는 모습에서 오는 것 같다. 까치의 이런저런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교실 속 아이들도 꼭 까치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교실에 들어서면 아이들은 까치보다 더 요란하게 떠든다. 어떤 아이들은 싸우듯이 인상을 쓴다. 가끔은 요상스런 욕설로 양념을 섞어가며 침을 튀기기도 한다. 그러다 금세 웃고 떠들며 간혹 서로의 몸을 만지작거리며 자지러지게 낄낄댄다. 그런 아이들을 보며 "야, 너희들 왜 싸워?" 하고 물으면 "우리가요? 히히, 우리 노는 거예요"하며 빨리 가라고 손사래를 친다. 그리곤 또다시 조금은 과격하면서도 능글맞게 논다. 까치를 바라보다 아이들 생각에 멀뚱히 있는데 드르륵거리며 책상 위의 손전화기가 몸살을 떤다. 수진이라는 아이다. 지
웬만큼 나이가 있는 사람들은 호랑이 담배 먹는다던 옛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을 것이다. 긴긴 겨울밤, 아랫목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앉아 할머니나 누나들이 구수한 입담을 풀며 ‘옛날에 옛날에’ 하면 어린 눈망울들은 귀를 쫑긋 세우며 이야기꾼의 얼굴과 입을 똥그랗게 바라보았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아이들한테 옛날이야기란 그저 흘러간 옛이야기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다. 아주 어릴 때 엄마들이 들려주는 동화들도 우리의 이야기보단 서양의 이야기들이 더 많다. 더구나 구수한 할머니의 입담은 듣기 어렵다. 이러한 때 할아버지의 구수한 목소리로 옛날이야기 시리즈를 내놓은 시인이 있다. 올해 예순일곱의 나이가 된 최하림 시인이다. 이번에 시인이 내놓은 책은 와 이다. 제 17권인 에는 두 개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자신의 가난한 운명을 어떻게 바꿔볼까 해서 사천 서역국으로 가서 부처님을 만나 복을 빌어 가는 정 도령 이야기인 와 박복한 여인이 덕을 쌓은 덕으로 새 원님이 저승에 갔다가 다시 이승으로 돌아와 박복덕 여인의 쌀 삼백 석을 갚는다는 이다. 이 두 개의 이야기는 운명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나라 속담에 ‘그 사람의 사주는 못 속인다.’이란 말이 있다. 사주란 태어난 해
내가 부러워하는 종류의 사람이 있다. 전혀는 아니지만 잘생기고 부자이고 키가 크고 뭐 그런 것이 아니다. 내가 부러워하는 사람은 글 잘 쓰고, 노래 잘하고, 악기를 잘 다루는 대충 그런 사람이다. 물론 이것은 이러한 것들을 내가 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해서 기타나 장구, 피아노 등의 악기를 배워보려 무던히 애를 쓰다 포기하고 말았다. 배우는 사람보다 알려주는 사람이 더 힘들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래. 이건 완전히 꽝이다. 음정, 박자 어떤 것도 제대로 된 것이 없다. 그래서 학창 시절 소풍가서 노래 부르는 시간이 제일 싫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리고 글쓰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어버이날 부모님께, 연말에 국군 장병들에게 반 강제적인 편지를 쓴 것이 전부다. 그럼 일기라도 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솔직히 쓸 말이 없었다. 이 이야길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 녀석에게 해줬더니 자기도 일기 안 써도 된다며 이번 방학 동안 일기 다섯 번 겨우 썼다. 말 한마디 잘못해서 아들 녀석까지 잘못된 버릇 만든 건 아닌지 모르겠다. 좋은 글이란 진실성으로 세상의 잘잘못을 깨닫게 한 글 요즘 들어 논술의 광풍이 불고 있다. 이로 인해 글 쓰는 것도 이젠 하나의
예나 지금이나 가장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다. 아무리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도 내 이야기가 아닌 타인의 이야기라면 흥미를 끈다. 당사자에겐 크나큰 고통일지라도 사랑 이야긴 그 자체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데 제격이다. 그런데 그놈의 사랑 때문에 목숨을 잃기도 하고, 왕의 자리까지 포기했을 정도라면 사랑도 아마 보통 사랑은 아닐 것이다. 허면 지금처럼 남녀의 만남이 자유롭지 못한 조선시대의 사랑방식은 어땠을까. 남녀칠세부동석이라 하여 어릴 때부터 남녀 간의 내외함을 극히 경계했던 조선. 그때에도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한 사랑(또는 연애)은 이루어졌다. 이수광의 을 들여다보면 사랑 때문에 목숨을 잃기도 하고, 사랑 때문에 울기도 하며, 잘못된 인습에 맞서기도 한 이야기들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흥미롭게 펼쳐진다. 남성들을 치마폭에 쥐고 놀던 여인들 우리가 알고 있는 유감동이나 어을우동 같은 여인들은 일부종사를 거부하고 뭍 남성들을 자신의 치마폭에 감싸고 놀았다. 특히 세종 때의 유감동은 현감의 아내이면서도 스스로 창기라 하면서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남성들을 가지고 놀았다. 그녀는 한양과 경기도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남성들과 통간을 했
빌 게이츠. 하버드 중퇴하고 MS창업.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부자. 자선 사업을 제일 많이 하는 사람. 자녀에게 자신의 재산을 물려주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며 수백 억 달러의 재산 중 천만 달러 정도의 돈을 물려주겠다고 한 사람. 50세가 넘으면 재산의 95퍼센트를 자선단체와 연구기관에 기부하겠다고 말한 사람.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이런 몇 가지 토막들이다. 그가 어떻게 MS를 창업하게 됐고, 어떻게 어린 시절을 보냈고, 어떤 식의 교육을 받고 자신의 생각을 키워갔는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부모는 빌 게이츠에게 어떤 식의 교육을 했는지도. 한 자식의 성공 뒤엔 그 자식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있다는 소릴 종종 듣는다. 부모의 교육열과 방법이 자식을 성공적으로 키웠다는 말이다. 세계 제일의 갑부인 빌 게이츠도 마찬가지이다. 을 보면 빌 게이츠의 성공 이면에 그의 아버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빌의 아버지 게이츠 2세는 미국의 유명한 변호사로 워싱턴 주 변호인협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빌이 어렸을 때부터 빌의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그의 교육 방식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교육방식은 아니다. 학원에 보내고 특수교육을 받게 하고 돈을 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