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이 개인의 신체적, 정신적인 적성을 최대한 살려서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성장하게 하려는 것 다시 말해 인간을 인간답게 길러내는 데 그 목표를 두고 있다면 교육정책을 입안할 때에 당연히 이 교육의 목표가 정책의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이 나라의 교육정책은 대체적으로 그때그때의 사회형편이나 여론의 향배에 따라 움직이는 미봉책이나 아니면 정권을 담당한 자의 업적을 자랑하기 위한, 소위 말하는 경제논리에 입각한 전시적인 정책이 대부분인 것 같다. 교원평가를 예로 들어보자. 교원평가를 하면 교사들이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좀 더 자기 계발에 힘 쓸 것이고 교사의 질이 나아지면 아이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행하여 아이들의 학력이 신장될 것이다. 단지 이것은 교사로 하여금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찾아 스스로 채우기 위한 노력을 할 자료로만 쓰일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책입안 교육부 관리들의 말이고 그것은 물론이고 평가에 기준 미달이면 책임을 물어 불이익 및 퇴출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그것을 주장하는 학부모 단체의 변이다. 아이들의 학력 신장 조건은 여러 가지 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교사의 가르치려는 열성과 양질의 방법 그리고 배우
대통령이 “경쟁 환경에 유리한 사람들이 본고사를 시행해 마음껏 경쟁시키자 하는데 거기에 치여 무너지는 사람의 수가 얼마나 되겠느냐? 보기에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은 항구적으로 가난을 대물림해야 된다.” 며 3불정책 고수의 의지를 밝혔다. 교육부총리는 “3불 폐지 주장이 대학의 이기주의”라고 말하고 참교육학부모회인가 하는 단체장은 “3불이 폐지되면 사교육 열풍이 더욱 불붙어 국민사이에 위화감이 조성되고 교육 불평등이 초래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모두가 교육을 바탕에 깔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교육의 목적이 인간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성장시키는 것이라면 그 목표에 맞는 것이 무엇이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인데 모두가 근본적인 목표를 비껴 눈앞의 해결책만 말하는 것 같다. 마치 병의 근본은 내장에 있는데 그 근본의 치료법은 논하지 않고 그로 인해 생긴 피부의 종기 치료에만 매달리는 꼴이다.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를 더듬어 올라가면 항상 그 정점에는 대학입시가 자리 잡고 있다. 결론을 말하면 모두가 대학을 가야하는 사회풍조나 정부의 방침 때문에 파생되는 문제인 것이다. 이는 아이들을 마음이 따뜻한 사람으로 키워서 스스로 행복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으로 성장
또 스승의 날이 입방아에 오르는 것을 보면 5월이 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교사들은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이 오는 것은 흐드러지게 피는 장미를 보면서 느끼는 것이 아니고 교사들을 향한 손가락질과 매스컴의 의도적인 흠집 내기를 보면서 알게 되는 세상이 되었다. 아무리 손가락질 받는 스승이라도 자신의 제자가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열정을 쏟는 것은 교사들에게 손가락질 하는 그들이 절대로 따라올 수 없는 것인데 함부로 스승의 위치를 욕되게 만들어 스승경시의 풍조를 불러들이고 나아가 교육현장을 황폐화하는데 앞장서는 사람들이 득세하면서 생겨난 현상이다. 학년 초인 5월의 감사는 잘 봐달라는 의미고 학년 말인 2월의 감사는 고맙다는 의미가 될 것이라는 해석을 붙이면서 스승의 날을 옮겨야 한다고 소리를 높이는 사람 중에 2월에 학년을 마치면서 진정 감사한 마음으로 선생을 찾아 볼 사람이 정말 몇 명이나 될 것이라고 그렇게 말할까? 스승의 날에 정말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선생을 찾는 사람은 스승의 날이 5월에 있으나 2월에 있으나 찾아보기는 마찬가지 일 것이다. 혹자는 ‘너희들이 감사 받을 짓을 해야 말이지.’할 것이지만 신뢰와 존경을 잃은 스승이 무엇을
교육인적자원부는 7일 디지털 시대를 선도할 미래 세대 양성을 위해 멀티미디어요소로 표현된 교과내용과 참고서, 문제집, 학습사전, 공책 등의 기능을 하나로 묶은 디지털교과서 상용화 개발을 본격화한다고 밝혔다. 놀랍고 획기적인 발전이다. IT강국 대한민국의 저력을 증명해주는 놀라운 업적이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해 오는지 모르겠다. 내가 지내 온 교직 생활을 되돌아보면 이 나라가 민주화되고 자유화 되어 교육개혁을 부르짖기 시작한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교육정책 입안자는 교육문제를 교육적인 차원에서 개혁하려는 노력과 능력이 매우 빈곤한 사람들만 모여 있지 않는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 개혁이란 개선의 의미를 가지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들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교육개혁이란 교육이 좀 더 교육다운 다시 말해 인간다운 인간을 육성하는 일에 도움이 되고 힘이 되는 일이라야 교육개혁이란 뜻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디지털교과서가 아이들이 공부하는데 참고는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학교 수업이 진행된다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은 방법임에 틀림이 없다. 지금도 학교마다 컴퓨터실이 있어 컴퓨터를 이용한 공부를 하게 되어있다.
정부의 발표대로 최초의 교육감 직선이 끝나고 7년을 부산교육을 책임졌던 설동근 현 교육감이 당선 되었다. 하던 일을 마치겠다는 그의 뜻을 시민들이 존중한 탓이라는 생각도 들고 새로운 사람이 나와서 무슨 개혁을 합네 하면서 오히려 부산 교육을 더 어렵게 할 수 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그나마 다행이고 선거에서 발표한 공약을 잘 실천하기만 바랄 뿐이다. 이번 선거는 참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시작되었었다. 우선 투표율 15.3%라는 충격적인 사실은 정부의 준비 없이 보이기 위한 행정의 대표적인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직선제가 필요한가 하는 성급한 문제도 제시될 법 하다. 법이 개정되자마자 유예기간도 없이 바로 선거를 시행하는 것이 너무 성급한 일이 아닌가? 좀 더 법 개정의 취지와 진행되는 선거의 내용을 자세하게 시민들에게 알리고 이해시킨 후에 선거를 했어야 했다는 것과 교육감에 출마한 후보들의 공약이 거의 대동소이해서 변별력이 없었다는 것, 우리의 교육이 안고 있는 문제나 나아갈 길은 누구나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공약을 듣고는 선택할 형편이 아니니 사람 면을 보고 찍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나마 잘 홍보가 되지 않아 대부분의 시민은 뭐가
65세였던 교원의 정년을 온갖 억지스런 핑계로 단축한 것이 김대중 정권의 이해찬장관이 기세등등할 때였다.그 정권을 이어받은 노무현 정권이 아직 그 임기를 마치지 않았으니 채 10년도 안된 일인데 정부가 5일 발표한 '2년 빨리 5년 더 일하는 사회 만들기 전략'이민간 부문에는 얼마나 실효성이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결국 공무원 자리 늘리기로 그치는 것 아닌가' 하는 질문에 권오규 부총리는 "선진국의 경우 42년 정도 일을 해야 연금의 완전 수급자가 될 수 있다. 42년이라면 67세 정도인데 우리나라는 60세 정도이다. 2013년부터 정년을 단계적으로 연장, 65세로 연장하는 게 현재 연금계획에 나와 있는 계획이며 5년 더 일하는 제도는 보다 많은 노령인력이 일할 수 있도록 고용의 유연성을 높이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설명했다. 아직도 그 때 교원의 정년을 단축한 것이 교육부장관으로 한 자랑스러운 업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이 정권의 주요 인물로 존재하고 그에 영합했던 많은 사람이 아직도 이 정권에서 건재한대, 정년을 단계적으로 65세로 연장하는 계획을 세워 실천하겠다는 발표를 하는 이 정권 지도자들의 단견이 너무 가슴 아프다. 국가를 경영하는 사람들이 1
신문과 방송의 뉴스 시간에 연가투쟁을 한 교원노조 가입 선생님들의 징계 결정이 보도되고 있다. 아마 집단행동을 하지 말라는 교육부의 지시에 따르지 않은 것과 시민단체들이 떠들고 있는, 아이들의 학습권을 침해했다는 이유인 모양이다. 여기에서 전교조 선생님들이 연가를 내고 학교를 비워 적든 많든 아이들에게 어떤 피해를 준 것을 두둔하자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것이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부당하다고 여기는 교원평가나 성과금 지급 방법 등을 상방의 협의과정을 무시하고 강행하려는 과정에서 야기된 행동이며 우리 교총도 역시 지금과 같은 방법의 교원평가 실시나 성과급 지급을 반대해온 형편이면 이렇게 수수방관의 자세로 있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교총의 대부분 선생님들도 교원평가를 안 받겠다는 것이 아니고 교육의 주체들이 인정할 수 있는 어떤 합리적인 기준을 먼저 마련한 후에 평가를 실시해도 늦지 않다는 주장이고 또한 성과급 지급도 교원을 어떤 기준으로 평가해서 그 순위를 나눌 것인지 납득할 만한 발표도 없이 차등지급만 고집하는 당국의 처사를 보류해 달라는 요구이고 보면 비록 그 방법에 동의할 수는 없더라도 일방적인 강행에 대한 전교조 선생님들의 저항이 수긍되는 부분도
고등학생 가운데 초등학교 3학년 수준의 기초학습이 안되는 학생이 500명 안팎에 달한다는 보도가 있다. 중학생은 그 열 배, 초등학생은 스무 배가 넘는다는 통계이다. 또 한바탕 난리가 날 것이다. 학부모들은 항의할 것이고 교육부 당국은 여러 가지로 학교에 독려와 책임을 묻겠다는 지시들을 내려 보내 자신들의 책임을 벗어 날 길을 마련할 것이다. 기초학습 부진아가 하나도 없을 수는 없겠지만 지금처럼 양산되는 것은 제도적인 결함이 제일 큰 요인으로 생각된다. 나라의 교육정책이 선생도 바쁘고 아이도 바쁘고 학부모도 바쁘게 만든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뒤처지는 아이를 가르칠 시간이 없다. 나라는 어디서 어떻게 배우든지 많이 아는 사람을 칭찬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학부모들은 여기에 맞추어 엄청 많은 것을 아이들에게 배우도록 요구한다. 정말 순진하고 착한 학부모님은 아이들에게 그런 억지를 요구하지 않고 잘 뛰놀고 밝고 건강하게 키워 학교에 보낸다. 학교에서는 이 10%미만의 아이들을 붙들고 교육과정대로 수업을 하노라면 나머지 90% 선행학습에 젖은 아이들은 아는 공부 한다고 마냥 논다. 할 수 없이 이 아이들에게 맞는 수준의 수업도 병행한다. 그러면 정상 아동은 상대적으로
어떻게 부산이 교육감 직선의 시금석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처럼 교육감 선거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서울은 직선을 시험하기는 혹시 부족한 점이 생길 때 돌아오는 여론의 매가 두려운 지역이고 그 외 시도는 너무 직선 분위기가 안 될 것 같고 그래서 이쪽저쪽 해서 만만한 부산이 선택된 모양인데 당국은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교육감이라면 그 시도의 교육에 관한 책임자이고 우리나라 같이 교육에 말이 많은 나라에서 교육감의 위치나 생각은 해당 시도민의 생활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자리이다. 그러나 정작 국민은 그걸 잘 모르고 있다. 그저 교육감하면 학교와 관계되는 행정관청의 수장이려니 하는 막연한 생각이 대부분인 것이다. 그 중에 학생이 있는 집은 그래도 조금은 나을 터이나 그렇지도 않은 집은 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 살고 있는 형편이다. 이제 한 3주 후면 선거가 치러질 것인데 부산 시민의 대부분은 출마자가 누구인지 교육감이 되어 부산 교육을 어떻게 이끌고 나갈 것인지 모른다. 그걸 알아 볼 방법도 모르고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는 것이다. 정부 당국은 부산의 선거를 통해 다른 시도의 선거를 보완하려는 생각인지 모르지만 만약
대통령이 연금 개혁을 해야 한다고 말하니 연금을 가지고 정부의 책임 있는 사람들의 말들이 많고 명퇴 지원자도 대폭 늘었다고 보도되었다. 이에 덩달아 일반 국민들도 공무원 연금의 수혜 폭을 줄인다는 정부 발표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다. 연금 불입액은 올리고 연금지급 산정방식을 바꾸어 소득대체율을 낮춘다는 것과 퇴직수당을 좀 더 주겠다는 것이 개혁안의 요지이고 이를 추진하는 정부 당국자들은 공무원 연금을 이대로 두면 흡사 나라가 거들 나는 것처럼 야단인데 이는 공무원 연금의 특수성을 무시하는 처사인 것 같다. 옛날 나라가 어려울 때 공무원들은 헌신적인 노력으로 국가 경영의 바탕이 되었었고 평생을 박봉에 봉사하다 정년으로 퇴임할 때 노후를 보장할 퇴직금을 지불하지 못하는 대신 도입한 것이 연금제도였었다. 지금 우리나라는 경제규모도 커지고 나라의 형편도 많이 나아져 그 때보다는 잘 살게 되었지만 대신 금융상품을 이용한 소득의 감소와 평생을 공직에 봉사하여 치부에 어두운 시야 때문에 다른 생활방도가 없는 공무원 퇴직자는 대부분 전액 연금을 선택하고 그것에 의지하여 여생을 설계하게 되고 실제로 건강만 허락한다면 현재까지는 연금 생활이 가능하다. 이것은 현 정부가 추구
또 5월이 시작되었다. 며칠 전 한겨레신문에 실린 듀나인가 하는 사람의 글을 읽고 또 다시 지나온 길이 되돌아 보이고 속이 편치 않았었다. 더구나 그 기사 이후에 교총에서 하는 일련의 조치를 보면서 더 더욱 속이 편치 않다. 지금와서 새삼 ‘군사부일체’의 스승상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군사부일체를 가르칠만큼 스승에 대한 신뢰와 존경이 교육의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바른 교육이 이루어진다는 조상들의 가르침 자체는 진리일 수밖에 없고 지금도 유효하다. 존경과 신뢰란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할 때 상대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볼 때 우리 교육이 존경과 신뢰를 잃은 첫째의 원인은 교사들에게 있다고 자책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교사들이 최선을 다해 교사의 자리를 지킬 수 없게 만드는 이 나라 정부와 사회도 그 책임이 교사에 못지않게 무겁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게 확실한 주관을 가지고 쓰는 글을 부모님이 주신 자신의 이름을 밝혀 쓰지 못하고 듀나란 국적불명의 필명으로 쓰는 것을 보면 외관은 한국인이나 이미 그는 한국사람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가 영화평론가며 소설가라고 표기했으나 그의 평론이나 소설을 읽은 바 없어 어떤 생각의 평론과
교육의 수장이 '전문직은 교육만 알고 능력이 부족하다.'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다. 그럼 교육부의 전문직이 교육만 알아서 부족한 것이 무엇일까? 경제전문가인 장관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말한 것인지 모르지만 경제 전문가가 교육의 수장이 되어 교육의 형편이 나아진 것이 무엇인가? 소위 교육전문직인 교사가 교육개혁의 가장 큰 저항세력이라는 대통령과 전문직은 교육만 알아 능력이 부족하다는 장관이 의도하는 교육개혁은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현 총리가 교육부 장관에서 물러나고 대학교수 출신의 장관이 취임하여 현장 교사와의 대화를 추진했었다. 각급 학교별로 대화의 장이 이루어졌는데 본의 아니게 나도 교총의 추천으로 열 한 분의 초등교사와 한 분의 유치원 교사가 앉은자리에 함께 하여 장관을 만날 수 있었다. 생전 처음 가본 국무원식당이란 곳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장관의 이야기도 듣고 현장의 이야기도 전하는 간단하고 짧은 자리였다. 지금도 뇌리에 지워지지 않는 것은 장관을 배석한 교육부의 국, 과장급 면모였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아홉이나 열 명 정도였던 그분들은 곱게 살아서 그런지 대개 사십대 초반정도로 보였다. 이야기하는 것들로 미루어 그 중 한 세 사람정도는
대통령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위정자들이 생각하는 '교육과 교사'들이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되어야 하는 걸까하는 궁금증이 불같이 일어난다. 그들은 늘 말하기를 나라의 운명은 교육에 달렸고 교육은 교사들에 의해 좌우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말과 행동은 사뭇 다르기만 하다. 국정 최고 책임자가 남의 나라에 가서 개혁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저항세력이 교사집단이라고 했으니 그들이 말하는 교육개혁이란 어떤 것인지 자못 궁금할 뿐이다. 개혁이란 반드시 개선 적인 의미를 수반해야 가치가 있는 것일 것이고 가치란 그 사항의 본질적인 의미에 따라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교육이란 궁극적으로 인간다운 인간의 육성을 목적으로 생각할 때 결코 경제논리로 설정되는 가치로 개혁을 추진해서는 안될 것인데 교육정책을 입안하는 사람들은 막무가내로 밀고 그것을 반대하는 교사들을 집단이기주의자로 몰았다. 이제 그것이 대통령의 뜻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한 것이다. 교육이란 대통령 한 사람의 뜻으로 그 방향이 결정되기에는 너무나 국민 개개인의 삶과 나아가서 나라의 백년대계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그런데도 깊지도 않은 교육철학을 금과옥조로 생각하는 최고 지도자와 거기에 영합하는 소수의 학자, 또
2월은 선생님들에게 많은 설렘과 변화가 오는 달이다. 벌써 다른 학교로 전출하는 선생님들의 명단이 신문의 한 면을 가득 채우며 새로운 터전을 향한 선생님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가슴이 두근거리며 설렘을 지나 가슴이 텅빈듯한 마음으로 교단을 떠나는 선생님들도 계신다. 평생을 아이들의 뒷바라지에 바치고 이제 교단을 내려서는 그 발길의 무거움을 누가 알랴. 돌아보는 발자취에는 보람뿐만 아니라 후회와 허무도 있으리라. 떠나는 이들의 평생이 그것으로 보상이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이들을 향한 사랑과 국가에 대한 헌신의 공로를 기려 봉직 연수에 따라 각종 훈장과 표창장이 주어진다. 이 제도를 처음 도입한 사람의 생각이나 당시의 사회 정서로는 그것이 아마 스승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표시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로는 이 수상이 말 그대로 명예와 긍지의 표시라고 생각되어지지 않는 것이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비록 나라에서 주는 훈장이나 표창일지라도 선생을 선생으로 존경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그들의 이름으로 주는 이 훈장이나 표창을 받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다. 그것으로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액자에 넣어 벽면을 장식하더라
13일자 D일보 여론마당에 천안의 모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도교육청 영어시범학교로 지정 받아 2년간 초등 1,2학년 영어교육을 시킨 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는 글이 실렸다. 그 교장선생님은 가르치는 방법에 따라 아이들을 '영어의 바다'에 빠뜨릴 수 있고 정부의 지원이 좀 더 확대된다면 더 탄력을 받을 수 있다는 것과 잘 가르쳐 학교의 영어교육이 학부모에게 신뢰를 받으면 이런저런 사교육비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공교육이 바른 국가관을 교육하는 한 영어교육 때문에 아이들의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확신과 엄청난 비용을 조기유학이나 어학 연수비로 쏟아 붓는 현실을 직시하고 세계 시민을 기르기 위해서는 조기 영어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일단 그 교장선생님의 말씀에 수긍이 간다. 그러나 몇 가지를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금할 수 없다. 먼저 묻고 싶은 것이 그 아이들의 국어 실력이 어떤가 이다. 3학년 담임을 하면서 아이들이 필순에 맞지 않게 글을 쓰거나 철자법에 틀리게 글을 쓰는 것을 보고도 학교에서 가르칠 것이 너무 많아 틀린 글을 일일이 다 가르칠 시간도 없고 정부와 사회가 그렇게 유도하니 아이들과 그 부모들이 영어보다도 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