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대로 안 되는 일 언제나 십중팔구, 남들과 말할 것도 열에서 두셋일 뿐. 不如意事常八九, 可與語人無二三(秋崖集 卷4) 이 시는 남송(南宋) 방악(方岳 :1199-1262)의 전송시다. 인생길에서 자주 만나는 허다한 좌절과 사람들과의 관계상 터놓고 말할 것이 많지 않은 데서 오는 곤란함을 말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아니라도 오늘을 사는 누구나 다 겪는 일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뜻대로 안되면 보통사람은 일의 정도에 따라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기(怨天尤人)’ 마련이다. “너희들은 편지에서 늘 일가친척 중에 돌봐주는 이들이 아무도 없다고 온갖 말로 한탄하는데, 이는 모두 다 ‘원천우인(怨天尤人)’하는 말이니 이것은 나쁜 버릇이다. 내가 벼슬하고 있을 때는 작은 근심거리가 있거나 질병이 있으면 다른 이들의 보살핌을 많이 받았다. 날마다 와서 병세를 묻는 이, 다독이며 부축해주는 이들, 약품이나 양식을 보내오는 이들도 있었다. 너희들이 이런 일들을 보며 자라서 남의 은혜를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빈천한 자는 본래 예나 지금이나 남의 도움을 받는 법이 없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더구나 우리 일가들은 각처에 흩어져 살아서 본시 은정(恩情
지난 해 어느 봄날. 창밖을 내다보다고 서 있다가 선현들의 마지막 날 장면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책상에는 ‘퇴계집’이 펼쳐져 있었다. 이황(1501-1570) 선생의 문집이다. 한 인물의 생애를 알고자 할 때, 연보처럼 편리한 자료도 없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 엮어서 처음부터 읽을 것도 없다. 선생의 생애 마지막 해인 경오년. 임종 전후의 기사를 보다가 눈길이 멈춘 곳은 서거 5일 전의 기사다. ‘12월 3일. 자제에게 남의 도서는 목록을 작성하여 돌려주라 지시하셨다(命子弟 錄還他人書籍).’ 이 기사의 다음에는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내용이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조선 최고의 학자가 70세에, 그것도 임종을 눈앞에 둔 날에, ‘빌려온 책들은 빠뜨리지 말고 잘 돌려주라’는 당연한 말을 유언으로 남긴 것이다. 옛말에 ‘책을 빌려주는 이도 바보, 빌린 책을 돌려주는 이도 바보(借書一癡, 還書一癡)’라는 말이 당연한 일인 것처럼 떠돌던 때가 있었다. 책을 가진 이는 이 말을 구실 삼아 빌려주지 않아 책이 필요한 학자들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 바보 치(癡)자는 술단지를 뜻하는 치(瓻)자와 글자의 모양이 비슷해 와전된 것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있다. 공자는 ‘허물을 저질렀거든 고치기를 주저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허물을 고치려면 ‘재를 털어야 숯불이 빛난다’는 속담처럼 먼저 가감 없이 잘못을 드러내놓고 사과하는, 반성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야 주변에서 이해하고 여기서 새로운 출발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사과는 범부(凡夫)일지라도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지도층의 경우는 이것저것 재느라 그 어려움이 더 크게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가 각종 매체를 통해 만나는 사과의 대부분은 진정성이 담긴 반성이 아니라 허물을 축소은폐하거나 변명인 경우가 많아서 자연히 그 효과가 없게 된다. 우리가 문헌에서 만나는 가장 유명한 사과는 상(商)을 건국한 성탕(成湯)의 사과이다. 즉위한 후 7년 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 농경사회에서 7년의 가뭄은 국가의 위기였다. 태사(太史)가 점을 쳤는데 ‘사람을 희생으로 기우제를 지내야 한다’고 했다. ‘비를 비는 것은 백성을 위해서이다. 희생으로 사람을 써야한다면 마땅히 내가 희생이 되리라.’ 성탕은 이렇게 말하고는 즉시 목욕재계하고 손톱과 머리를 깎고 몸에는 흰 띠 풀을 둘러 희생의 차림으로 백마가 끄는 소거(
언제 어디서나 상하의 관계는 어렵고 조심스럽다. 노(魯)나라 정공(定公·BC.556-BC.480)이 임금이 신하를 부리고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도리에 대해서 묻자, 공자는 “임금은 신하를 예(禮)에 맞게 부리고, 신하는 임금을 충성으로 섬겨야한다(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고 답했다.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이 말은 임금과 신하가 각자의 입장에서 행해야 할 도리를 말한 것이라는 설과, 임금이 신하를 예로 부리면 신하는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게 된다는 ‘보시설(報施說)’로 보기도 한다. 동파 소식(蘇軾·1037-1101)은 예의 중요성을 “임금이 신하를 쓰는 데 이익을 가지고 하면 그의 신하는 소인만 모인다. 어쩌다 나은 신하를 얻었다 하더라도 그는 재승박덕(才勝薄德)한 자에 불과할 뿐이다. 벼슬과 녹봉만 생각하고 모인 자는 이익이 다하면 떠나고 위력 때문에 따랐던 자는 힘이 빠지면 배반한다. 그래서 이익으로 부리는 것이 예로 부리는 것만 못하다”라고 말했다.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1681-1763)은 여기에 “임금이 예를 갖춰 부리지 않으면 신하는 반드시 부끄럽게 여기고 부끄럽게 여기면 원망하게 되고 원망하게 되면 충성하려던 마음도 변하게 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