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매체다. 그러기에 언어란 선한 사람이 선하게 사용하면 부드러운 향기로 표출되고, 악인이 악용하면 독약이 될 수 있다. 사람이 무기를 들어야만 남을 해치는 것은 아니다. 말이란 무기를 통해서 상대를 무력화시킬 수도 있고, 힘과 용기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세월이 유슈와 같이 흘러가도 인간에게 변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인간이 지켜야 하는 기본양식인 것 같다. 아이가 어른을 멸시하고, 자식이 부모를 외면하는 인간의 법도가 무너져 가는 현실에서 아무리 우수한 지식을 인간에게 주입하여도 그것이 올바르게 사용될 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청소년들의 언어는 갈수록 성적으로도 적나라하다. 예전에는 남학생이 사용하는 언어를 이제는 여학생이 대수롭지 않게 사용한다. 교사 앞에서 예사로 성적인 말을 표출하는 것이 마치 친구들 사이에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자연스럽다. 표현에 있어서도 군더더기를 싫어한다. “짱 좋다” “완전 좋다” 등등은 오늘의 젊은이들의 용어에서 여유를 찾아보기 어렵다. 빠르고 짧게 그리고 강하게 표현하려는 것이 마치 승부수 세계에서 상대를 말로 제압하려는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자신에게는 너그럽고
현장을 지켜가는 파수꾼! 그 사람은 교사다. 현장을 지켜가고 관찰하고 스스로 생각해 보는 자가 학생을 지도하고 학생을 가르치고 학생을 이끌어 간다. 사람이 사람을 이끌어 간다는 것은 훈련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말 못하는 짐승은 사람이 이끌어 따르도록 하기 위해서는 회초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말을 알아듣는 인간은 회초리가 없어도 잘 알아 듣는다. 말을 통해서 이끌어 가도 충분한 인간에게 회초리를 들어야만 이끌어 갈 수 밖에 없는 현실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입이 보배라는 속담이 있다. 답답하고 불안한 사실을 혼자서 꿍꿍 앓고 있는 것보다는 여러 사람에게 알려 해결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말을 잘해서 뺨맞는 일 없다는 것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의사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훌륭한 담임이라고 칭찬받는 교사가 어느 날 반 학생들로부터 담임을 바꾸어 주었으면 한다고 건의를 받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 사유를 찬찬히 살펴 조사해 보면 담임의 권위가 학생들에게 의사소통 형식으로 전해지지 않고 일방통행 형식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그만큼 의사소통이 학생과 교사 사이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현장에서 일어나는 작고 큰 일은
교권은 교사의 권위요 권리다. 그것을 교사가 지키지 못하는 것은 교사 자신의 영역을 지키지 못한 바보였기 때문이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폭력을 당해 학교에 나오지 못하는 상황에도 교사들의 단결이 없이 유야무야 넘어가는 것은 교권을 지키려는 교사들의 의지 부족이다. 2000년도에 광주의 모 고등학교에서 수능을 합격하고도 학교에 학생이 나오지 않자 교사들이 회의를 열어 학생을 퇴학시켜 버린 일이 있었다고 한다. 학생들이 학교를 어떻게 보았기에 학교의 규칙을 예사로 어기고, 교사를 어떻게 대하기에 교사에게 욕설을 가한다는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한발짝 더 나아가서 교사를 때리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아들이 부모를 때리거나, 잘 모시지 못하는 자를 사람들은 후래자식이라고 뒤에서 욕설을 하는 것이 우리네 풍속이다. 군사부일체는 무엇인가. 부모와 스승은 하나임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스승을 때리는 학생을 학교 현장에서 그대로 보고 있다면 교권을 지키는 교사들의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라고 본다. 마땅히 교칙에 따라 엄한 처벌과 동시에 교권에 대한 도전을 넘어 형사처벌까지 고려해야 한다. 교사가 어찌 학생을 형사처벌 하겠느
학교 현장에 오랫동안 근무하다 보면 별별 일을 다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처리하는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담임을 맡고 있으면 한 학년에 한해서 일어나는 일을 경험하게 되지만 학생부에 있으면 3개 학년 전체 학생에게 일어나는 자잘한 일을 만나게 된다. 남자 학교에서는 가장 많이 일어나는 것은 폭력이고, 여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성관계인 것 같다. 학교 현장을 쳐다보고 있는 사회인의 인식이 공교육이 무너진다고 하는 외침의 소리를 낸지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보편화된 일이 돼 버렸다. 그런 가운데 학교의 변화는 수업 잘하는 최고 교사를 찾기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 수업을 잘 하려고 해도 수업에 대한 이미지가 대입시와 관련돼야만 그것이 좋은 수업이라고 문서상으로 평가할 뿐이다. 수업이 학생의 만족도만 최고이면 그것으로 좋을 것 같지만 수업이란 궁극적으로 실용적 현실적용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한쪽의 만족으로만 최고라 할 수 없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학생 중심으로 수업을 하면 학생이 나아갈 대학입시에 대한 중심이 소홀하게 되고 대학입시 중심으로 수업을 이끌어 나아가고자 하면 학교 수업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어느 저울에 맞추어야 할
교편을 잡고 세월을 지켜가는 교사는 어느 원두막의 파수꾼이 아니다. 이름 모를 아이를 지켜가는 자도 아니요, 말 못하는 짐승을 길들이는 자도 아니다. 완전한 인격을 갖춘 사람을 교육시키는 자다. 그러기에 이들에게 자라나는 2세를 교육시킬 권한을 준 것이다. 교육은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그렇다고 어느 세력에 떠 밀려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교육은 재화를 구하듯이 나의 욕망을 충족시킬 대상을 위해 나의 말과 나의 에너지를 뱉어내는 것은 아니다. 교실에서 순진한 학생들의 눈을 보면서 그들에 속임없는 눈동자가 오염되지 않도록 양심의 밥을 먹여야 하고 그들의 손발이 남을 위해 희생도 할 줄 아는 그런 인격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 진정한 따뜻한 교육자의 의무다. 그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교실에 보이는 휴지를 주워 학생에게 버리도록 지시할 줄 알고 학생이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고개를 숙여 인사할 줄 알게 인도하는 정신의 소유자가 진정한 교사다. 멀리서나 가까이서나 항상 교사답다는 이미지를 늘 타인의 입에서 오르내릴 수 있는 그런 교사가 따뜻한 정을 소유한 교육자다. 교실에 휴지가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고,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차가
교실에 들어선다. 단정히 앉은 아이들이 선생님을 쳐다본다. 순간, 왜 이래. 당황하는 느낌을 받는다. 교탁에 책을 내려놓고. 아! 좋은 교실이다. 이런 교실에서 수업을 하고 싶다. 순간적인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담임이 누구냐고 물어 본다. 누구누구입니다. 그래, 그렇지. 그 선생님. 그렇지. 그 선생님을 다시 한번 기억하게 된다. 그리고 무언 중 대화를 하다가 어느 반에 들어가면 아름다운 수업이 절로 된다고 말하곤 한다. 없던 생각도 떠올라 마구 쏟아낸다고 이야기 한다. 이처럼 교실의 아름다움은 정다운 교실을 만들어 가고, 정다운 교실은 아름다운 학생들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고, 정화된 교실에서는 샘솟는 맑은 수업이 산소처럼 이심전심으로 진행된다. 주고 받는 사설도 마치 연인이 주고받는 달콤한 사랑의 이야기를 하는 듯 하다. 수업이 아름답다는 말을 쓰기가 참으로 불편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건만 아름다운 생각으로 아름다운 수업을 만들어 가는 정다운 교실은 학생이나 교사 모두가 겨울철의 포근산 온기를 느끼듯이 서서히 달아 오르는 것 같다. 교실에 들어서도 아직도 학생들은 자고 있고, 뒤에서는 떠드는 소리가 그치지 않고, 수업 준비는
모처럼 제1회 내신고사 중 시간을 내어 백령도 유람을 떠났다. 주5일제 토요일이 끼어 있어 학습에 새로운 자료를 수집하는 데도 좋은 시간이었다. 인천에서 백령도까지 5시간이 소요되었다. 백령중고등학교에 근무하는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관사에서 숙식을 해결한 덕분에 비용도 절약할 수 있었다. 배를 탈때부터 군인들이 부두에 보이기 시작하였다. 소청도, 대청도, 백령도에 거주하는 군민이 약 3천 여 명이나 된다고 하니 군인이 없는 백령도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은 당연했다. 백령도에 내리자 군인들은 더 많았고, 곳곳에 보이기 시작한 진지는 백령도 천안함을 더욱 선명하게 연상해 주는 듯 했다. 첫날은 관사에서 자고 다음 날 아침 백령도 관광버스를 타고 유람을 하였다. 기억에 선하게 남는 것은 바닷가 천연의 비행기장과 홍돌 또는 콩돌이라고 하는 작은 돌멩이들로 이루어져 있는 해안이 인상적이었다. 천연의 비행장은 큰 대형버스가 달려도 마치 포장도로를 달리는 듯 하였고, 콩돌은 마치 효녀 심청이가 몽은사에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쌀알 3000석을 이 바닷가에 부어 그 흔적을 지금까지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함의 잔재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밑을 파 보았다. 그래도
시험 때마다 겪는 일이다. 학생들은 시험을 보는 중 펜을 들고 졸고 있다. 왜 그런지 물어보았다. 시험을 치는 중 어찌 졸 수 있느냐고 했더니, 잠이 온다고 했다. 그래서 시험이란 중요한 것인데 어찌 졸 수가 있느냐고 반문하니 아무 대답을 못하고 만다. 이런 학생은 가뭄에 콩 나듯 보이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이해 못할 일이 신세대에게 일어나고 있음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기성세대들이 학창시절 시험 중 그렇게 졸지 않았던 것은 시험이 자신의 인생을 결정짓는 중요한 잣대로 취급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여기까지도 좋다. 시험지를 풀다가 졸면서 그러다가 이내 엎어져 잠을 청하고 만다. 그러다가 한참 있으면 또 일어나 풀고 있다. 마치 토끼와 거북이가 게임을 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객관식으로 시험을 치르다 보니 모르면 번호를 마킹하면 그만이기 때문에 중간에 포기하고 마킹을 못하고 답안지를 내는 경우는 드물다.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주관식 정답을 요구하는 문항을 출제하라고 한 것이 아닌가도 생각이 불현듯 나곤 한다. 시험이란 한 시간에 풀 만큼의 분량을 출제하여야 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리고 시험지 난이도도 조정해서 출제하여야 하는 것
나는 1층 교무실에서 근무를 한다. 교무실에서 책을 챙긴다. 3학년 문제집, 분필통, 학생지도 카드 파일을 왼손에 들고, 오른손에는 지도봉을 들고 나선다. 계단을 걸어서 올라갈 때 계단에 휴지를 줍는다. 늦게 교실로 들어가는 학생과 만나면 휴지를 줍게 하기도 하고 주웠던 휴지도 학생에게 넘겨준다.깨끗한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서 생각해 본다. 무엇을 오늘도 학생들에게 전달해야 할까? 나는 제대로 교재를 잘 연구하였는가? 나는 올바른 교사로 살아가고 있는가? 창밖의 들을 보며 하늘을 보며 스쳐 지나가는 주마등처럼 순간순간의 생각으로 어느 듯 교실 앞에 선다. 출입문을 지도봉으로 쳐서 잠자는 학생들에게 기상을 알린다. 교탁 위에 책과 분필통을 놓는다. 그리고 칠판을 본다. 칠판이 지워져 있지 않거나 깨끗하게 닦여져 있지 않으면 주번에게 지우게 한다. 출석은 결석 학생이 있는 지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전체 학생들의 분위기를 살핀다. 공부할 분위기가 잘 되어 있으면 바로 수업을 진행한다. 그렇지 않으면 발문을 시작한다. 어제 빅 뉴스는 무엇이더라, 요즘 진학사에 들어가 보니 각 대학의 경쟁률이 너무 높더라 등등 학생들의 관심거리를 들추어 가며 학생들을
학생인권조례에 관한 여론이 뜨겁다. 시마다 제각기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 싶다. 두발, 복장의 자율, 언어 체벌까지 금지하는 등 학교를 완전 성지로 만들어 가려는 의도는 아닌지 의심스럽다. 누가 성지의 주인인지 누가 성지의 순례자인지 이제는 분간하기 어렵게 된 것은 아닌 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학생을 위한 제반 조치가 민주주의를 향한 새로운 방향 제시라는 면에서 좋은 인상을 풍기는 것도 있지만, 학생의 사고와 틀을 교복과 두발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에는 생각의 여지를 갖게 한다. 학교는 학교다워야 한다. 학생은 학생다워야 한다. 동시에 교사는 교사다워야 한다. 이런 등식이 오랜 옛날부터 학부모의 마음에 인식되어 왔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한국의 교육의 뿌리를 원천적으로 교사의 권위를 무너뜨리면서 학생의 위상을 드높이려는 의도로 나아가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일본의 경우를 보자. 인테넷에 일본의 교복이라고 메뉴를 올려 보면 일본 학생이 입고 있는 교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한때 교복이 일본의 잔재였다고 폐지된 적도 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는가? 많은 문제점이 발생해 다시 원상회복되었다. 학생이 학생으로서 위상을 바로 정립시키고 학생이
2010.09.26.저녁 8시. 모 방송국 뉴스에서 서울시교육청 미혼모 학습권 보장이라는 자막 뉴스를 내보냈다. 지금까지 일선 학교에서는 교내에서 남녀 학생들의 이성 관계에 예민하게 반응하여 지도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비록 남녀 학생들이 같은 학교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지만, 남녀 학생들이 교내에서 자유롭게 만나 서로 간의 애정 표현을 한다거나 손을 잡고 다니거나 하는 것도 엄히 지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기에 학교 교칙에도 남녀간의 불미스러운 이성 관계에 대해서는 처벌 규정까지 명시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시교육청의 미혼모 학습권 보장은 파격적이 아닐 수 없다. 한국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표한 청소년 미혼모에 대한 통계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한해 약 5-6천명 정도, 청소년 임신은 연간 약 1만 5천 명이 넘는다. 청소년 성경험 시기가 빨라지면서 미혼모 시설에 입소한 미혼모 중 십대들이 차지한 비율이 30%를 넘는다고 한다. 또 최근 정부의 불법 인공임신중절 단속 방침에 따라 청소년 미혼모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008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청소년미혼모교육권 실태조사”에 따르면, 설문에 응한 청소년 63명 미혼모 중 71
영천 호국원에 가면 6.25 전사자들의 묘를 만나게 된다. 한가위라 조상의 묘를 찾는 일은 드물겠지만 조상의 영영들을 위해 묘를 찾는 후손들의 발걸음은 쉴 새 없다. 위대한 장군의 묘에서부터 병사에 이르기까지 아름답게 장식되지도 않았지만 깔끔하고 단정한 황색 옷을 입은 묘역에 서서 종대와 횡대로 늘어선 비석들의 모습이 마치 가신 임을 대신해서 군사열을 하는 자태다.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꿋꿋하게 부동자세로 서 있어야 하는 병사들의 훈련 모습처럼 눈동자 멀리 바라보고 뜨거운 태양도 이랑곳하지 않고 늘어서 있는 묘소들의 늠름함이 한국을 지켜온 자랑스러운 영영들이 아니던가? 아무리 고개숙여 바라보아도 그들의 늠름한 모습은 태양의 빛을 받으며 영원히 온 후손들의 칭송을 받으며 꽃을 받으며 뭇 사람들의 절을 받으며 살아갈 것이고 온 지구상에 회자되어 퍼져 나갈 것이다. 일 년에 한 번 후손들의 절을 받으며 살아가는 묘역과는 달리 온 사람들이 찾아와 사시사철 먹을 것 놓아드리고 사계절 집앞을 깨끗하게 청소해 주어 좋은 환경 만들어 주시고, 언제나 멀리 찾아 떠날 수 있도록 아스팔트 포장길에 사뿐히 즈려 밝고 가시게 하였고, 손자 손녀 찾아와 재롱부리며 할아버지 홀로 외
추석 연후 9월 23일 저녁 모 방송국 프로그램 '세상에 이런 일이'을 시청하고 있었다. 세상에 정말 이런 일이 있을까 하고 생각한 것들이 툭툭 일어날 때마다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를 새삼 느끼곤 한다. 그 중에서 104살 한형근 할아버지의 하루 일과도 놀랄만하지만 그분의 체력 관리법에 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수학 교사였던 그분은 은퇴 이후 하루도 쉬지 않고 수학을 새롭게 연구하였다면서 지금 고등학생 3명에게 과외를 하고 있다고 한다. 과외를 받는 학생은 할아버지의 가르침이 오늘의 수학을 새롭게 연구하여 가르쳐 주셔서 더 즐겁다고 하였다. 한형근 할아버지는 하루의 일과가 시계 바늘이 움직이는 것처럼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맨발로 늘 운동하시고 그리고 난 후에는 찬물로 목욕을 하시고 그리고 난 후에는 수학을 연구하시는 것이 하루 일과라고 하였다. 사람이 운동을 하여야 한다고는 하지만 이분만큼 자신의 뚜렷한 의지에 따라 초지일관 운동을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운동 선수는 운동이 자신의 갈길이기 때문에 밥먹고 나면 고정적으로 더 많은 운동을 하여 자신의 기량을 넓혀 나가려는 것이지만, 이분은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오히
요즘 인터넷에 탑재되는 교육 뉴스를 보면 교육의 주인은 누구인가에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다. 교육의 진정한 비판은 없고 교육자의 이전투구만 남아 있는 것 같아 아쉬움이 앞선다. 울산의 모 초등학교 교장이 초등학생이 낸 성금으로 회식을 했다는 뉴스며, 경기도 모 교육 의원이 학교 행사에 참석해 축사를 못했다고 교장 호출, 사학 재단의 교장이 교사를 학생 앞에서 체벌했다는 등 웃지 못할 해프닝이 일어나고 있다. 교육의 진정한 주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수도권 대학에 있을까? 아니면 지방 대학에 있을까? 올해의 수시 입시 경쟁률도 보라,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주인은 진정 있는가? 현장을 지켜가는 교사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교육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인지 찾기 어렵다. 흥미 위주의 교육이 수요자인 학생들의 입장에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취지가 오히려 학교의 주인이 학생이다로 퇴색되어지는 것은 가르치는 교사의 입장에서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이는 교육의 진정한 주체인 교사와 학교가 객체인 학생들에게 올바른 이미지로 비춰지지 못했다는 산 증거다. 이것은 가르치는 자의 진정한 교육이 배우는 자의 입장에 올바르게 주입시키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교사의
교원평가를 한다고 동료교사를 뽑아서 동료 교사 수업을 참관하여 평가한다고 아우성이다. 베테랑교사는 동료들 보기 민망해서 서로 눈치를 보다가신출내기 교사에게 평가를 맡기는 형식을 취함으로써자신의 위상에 흠을 얻지 않으려고 하는 면이 역력하게 보이는 것같다. 평가를 한다고 하여 뚜렷한 변화를 아직은 모색하기 어렵다고 하지만 평가가 형식에 치우치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평가를 공정하게 하기 위해서는 교사 개개인의 수업을 심도있게 참관해 본다는 면에서는 참으로 바람직한 것이다. 또 교사 자신은 자기의 수업을 뒤돌아 본다는 면에서도 새로운 참신성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교사 자신의 수업이 진정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이라면 모르겠지만 형식에 치우치는 평가에 마지 못해 응한다는 이미지를 받고 있다면 그 평가는 유야무야되고 말 것이다. 수석교사제를 왜 도입하려 했는가?관리자 중심의 평가를 새로운 관점에서 교직 사회를 변화시켜 보자는 의도 아니었는가? 그런데 수석교사제가 승진 정체를 해소하는 측면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실패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수석교사제를 마련하지 못하는 일회성 수석교사는 그 누구도 반가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