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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원어민에게도 영어는 괴물?

학생 앞에서 철자 몰라 더듬거리는 교수도 많아
“아이가 영어 못한다” 학부모가 학비반환 소송도

한 달 전쯤 호주의 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인 한 학생의 부모가 학교를 상대로 학비반환을 청구한 일이 있었다. 공립학교와 달리 등록금을 받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립학교에서 적정 수준의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했다면 통상적인 상거래 법을 적용하여 학비를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 부모의 주장이었다. 학생의 부모는 자기 아이가 아직까지도 국문 (영어)을 제대로 읽고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이에 대한 책임을 학교 측이 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 같은 제의를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언뜻 듣기에 따라서는 학교를 무슨 ‘장사 아치’로 치부하여 제 자식 공부 못하는 것을 순전히 선생 탓으로 돌리고 게다가 돈까지 토해내라고 하는 학부형의 태도가 뻔뻔하고 어이없게 여겨지는 일면도 있다. 하지만 학교측은 그 주장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한 듯 등록금의 일부를 반환했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학교와 학부형 간에 등록금을 돌려주었네, 돌려받았네 하는 이례적인 ‘해프닝’에 있는 게 아니라 이 학생 뿐 아니라 호주에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도 자기 나라 글을 자유롭게 읽고 쓰지 못하는 학생들이 우려할 만한 숫자를 차지한다는 점이다.

특별히 수학 능력이 떨어지는 학습 지진아들 뿐 아니라 보통 수준의 지능과 학습 태도를 가지고도 영어를 배우는 데 어려움을 겪는 어린이들이 더러 있다는 의미이다. 이런 학생들의 영어 지도를 위해 어머니 봉사회가 특별히 조직되어 있고, 국문 깨치기를 일대 일로 지원하기 위해 학교측에서는 매년 자원 봉사자들을 모집하여 훈련을 시키기도 한다. 영어가 되지 않아서 정상 수업 내용을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별도의 시간을 내어 함께 책을 읽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지원하기 위해서이다.

그런가 하면 주 단위로는 교육부 차원에서 3학년과 5학년 2개 학년을 대상으로 매해 수학능력평가고사를 실시하고 있다. 이 시험은 호주 초등학생들의 기초 학력을 측정하고 주별 학력 수준을 가름하기 위해서 치러지는 측면보다 학생들이 제대로 읽고 쓰기를 배우고 있는지, 더하고 빼고 나누고 곱하는 기초 수셈을 따라오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그야말로 ‘생기초 능력’을 평가하기 위한 것이다.

이쯤 되면 호주의 초등교육과정에 다분히 문제가 있거나 다른 나라에 비해 호주 어린이들이 특별히 아둔하지 않나 하고 고개를 갸우뚱해 봄 직도 하다.

하지만 14년간 호주 생활을 하면서 아이들을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보내 본 필자의 경험으로는 소위 세계에 ‘교육을 파는’ 유학 산업국인 호주의 교육 커리큘럼이 허술해서 이거나 아이들이 멍청해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 보다는 영어라는 언어 자체가 배우기에 어렵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이유를 추측해 보게 된다.

TV의 어린이 퀴즈 프로그램에서 매회 빠지지 않고 출제되는 문항 가운데 단어의 올바른 스펠링을 맞추는 순서가 꼭 있고, 학교 행사나 단체 모임에서 재미 삼아 퀴즈 대회를 할 때도 알쏭달쏭한 철자를 가진 영어 단어를 제대로 골라내는 문제가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어린 학생들 뿐 아니라 고등학생들, 심지어 교사들조차도 판서를 할 때 스펠링이 헷갈려서 학생들의 도움을 청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학생들 앞에서 철자를 더듬거리기는 대학 강단에 서는 강사나 교수들도 비슷하다. 실상 호주에서는 일상생활 중에 완벽한 철자법을 알고 쓰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고 서로의 그런 ‘무식함’을 크게 문제 삼지도 않는다.

주위 사람들에게 맞는 스펠링을 물어본다거나 수시로 사전을 통해 확인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남의 이름을 받아 적을 때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물어보는 것이 아예 실수 안 하는 길로 인식하고 있다. 성인들도 그러할진대 초등학교 고학년 중에 읽고 쓰기가 제대로 안 된다 해서 무턱대고 학습 지진아 취급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죄가 있다면 결국 배우기 어려운 영어 자체에 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않고도 마음만 먹으면 국문을 떼는 건 일도 아닌 우리나라 사람들에 비교한다면 호주 사람들은 자기 나라 글을 배우는 것에 상당히 고통스러워한다. 초등학교를 어영부영 다녔다가는 평생 신문 한 조각 읽는 일이나 편지 한 줄 쓰는 것에 어려움을 겪을 지도 모르는 ‘언어 공포’를 안고 사는 것이 바로 호주인들이다. 실제 주위에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도 거의 까막눈이다시피 한 사람들이 더러 있고 이들은 평생 자식들의 눈과 입을 빌어 살아야 하는 괴로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원어민들에게조차 영어가 ‘괴물’이니 후천적으로 배우고 익혀서 아는 우리들로서야 그 어려움을 새삼 거론해 무엇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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