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남단 고흥은 필자가 1973년 첫 발령을 받아 근무를 시작했던 인연이 깊은 곳이다. 50년 세월이 지난 8월 중순 고흥 바닷가에 가서 지인들과 맨발걷기를 하였다. 이 때 새롭게 눈에 띈 건물이 광주학생해양수련원이었다. 궁금하여 어떻게 여기에 수련원이 들어서게 되었는가를 수소문하여 추적하였다. 알고 보니 올해 퇴임한 박주정 교육장의 아이디어로 출발하였다는 것을 알고 인터뷰를 요청하였다.
▲어떻게 이 시설을 고흥 바닷가에 설립하게 되었는지.
광주시교육청 장학관일 때, 수화기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는 보건소인데요, 광주에서 온 중학생들이 물놀이를 하다가 사고가 났습니다. 그중 한 명이 사망해서 보건소에 있는데 부모를 찾아도 연락이 되지 않아서 교육청에 먼저 연락했습니다."
이에 교육청의 생활지도 팀장으로 익사 소식을 듣고 현장을 찾았다. 이처럼 교육청 업무는 단순한 교육업무만 하는 곳이 아니다. 수많은 아이들이 언제 어디서 어떤 사고를 낼지 모른다. 문제는 안전교육이다. 학교에서 아무리 안전 교육을 해도 그것이 내면화되지 않으면 사고는 계속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래, 수영을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가장 중심이 되는 교육활동은 무엇인지.
수영장은 대부분 유료였으며, 무료로 교육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아이들에게 생존수영을 가르칠 공간을 만들겠다고 교육감님에게 건의, 바로 추진하였다. '학생해양수련원' 같은 시설이 있으면 이런 사고도 사전에 예방할 수 있었을텐데 시설의 결핍에서 나온 발상이었다.
이번 사고는 계곡이었다. 바닷가에서도 이런 사고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데 전국의 현황을 알아보니 제주도를 제외하고는 모든 시도교육청이 학생해양수련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광주광역시만 없었다.
학생해양수련원을 만들기로 생각을 굳혔다. 해양수련원을 만들려면 어느 정도 예산이 드는지 알아보았다. 다른 교육청에 문의했더니 약 1000억 원 정도가 소요된다고 했다. 너무 큰 돈이었다. 교육청에서 하나의 사업에 1000억 원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단 교육감님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교육부 중투, 중앙투자심사를 받아서 예산을 지원받을 방법을 찾았다.
▲시설 추진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선생 출신인 장학관이 교육부 관료들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생존 수영교육의 필요성, 익사사고 예방, 체험 수련활동 다양화, 호연지기 양양, 다가올 해양시대 준비 등의 내용을 담았다. 그런데 교육부 측 인사가 그냥 돌아가라고 했다. 먼저 발표한 팀이 시간을 오래 사용해 시간이 없다, 다음에 연락 할테니 그때 다시 오라고 했다. "그러면 5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발표 시간은 30분이지만 5분만 들어주십시오."
쫓기듯이 5분을 발표했는데 질문이 많았다. 답하다 보니 한 시간이 흘렀다. 심사위원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좋은 결과를 기대하며 내려왔다. 한 달 뒤 교육부가 350억 원 지원을 발표했다. 위치를 빨리 선정하고, 향후 계획을 보고하라고 했다.
몇 군데 추천을 받아 가보았지만 마땅하지 않았다. 전남의 모든 지자체에 공문을 보내 후보지를 추천해달라고 했다. 11개 지역에서 응모를 했다. 그중 고흥군의 입지조건이 가장 좋았다. 지역이 결정되고 바로 공사에 들어갔는데 인접한 큰 호텔에서 반대를 했다. 이유는 해양수련원이 들어오면 호텔 주차장 부지가 줄어든다며 매일 교육청에 와서 꽹과리를 치며 시위를 했다. 나에 대한 온갖 음해와 투서도 날아들었다. 투기혐의로 조사도 받았다.
차라리 사업을 반납하자는 말까지 나왔다. 그들을 만나 설득 작업을 하였다.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공사가 시작되었고, 호텔 측의 방해가 계속되어 공사는 더디게 진행됐다.
그러는 사이 교육감이 바뀌고, 3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다. 자재 가격이 두 배 가까이 올랐다. 350억 원 가지고는 엄두도 내 지 못하게 되었다. 최소한 150억 원 정도를 더 투자해야 마무리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새 교육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아 수년 만에 완공할 수 있었다. 사연도 많았고, 최초의 중투 심사부터 완공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학생들을 생각하면서 잘 견뎌왔다.
수련원 주변 마을 사람들에게 많은 원망도 들었다. 해양수 련원이 들어옴으로써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복지사업 등을 통해 그분들에게 도움을 주면서 해결되었다.
▲교육행정가로 재임 중 가장 소중하게 배운 것이 있다면.
교사에서 장학사로 전직하면 역할이 완전히 달라졌다. 학생을 가르치는 업무에서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협상하는 협상가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 장학직이다. 한 아이의 죽음 앞에서 생존교육을 생각하며 거대한 해양교육 시설을 생각하였고, 위 센터, 용연학교, 돈보스코학교 유치라는 개척자의 길은 707명과 함께 살아오면서 경험한 것을 교육 열정과 사랑으로 만든 열매라 할 것이다.
이같은 업무를 실제로 감당해 보지 않은 행정가들이 장학직이 수행할 업무를 경험해 보지 않으니 장학사 업무는 겨우 60여 시간의 연수로 마감을 하게 된다. 현재는 인턴 장학사 기간을 갖는다고 하지만 충분한 업무 역량을 쌓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과정이다. 교육행정을 담당할 전문인력 양성은 반드시 재고되어야 할 사안이다.
최적의 교육과정과 최고로 좋은 장비를 마련하기 위해 추진 위원들은 전국 시도의 해양수련원을 견학했다. 수십 번의 회의와 컨설팅이 이뤄졌다. 그 결과 전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역사적 의미가 큰 고흥군 발포만의 '광주학생해양수련원'이 탄생했다. 전문적 소양을 갖춘 최고의 수련지도사를 공채했고, 박 장학관은 본청 과장으로 있으면서 수련원이 정상적으로 개원할 수 있도록 임시로 초대 원장을 겸임했다.
1년에 약 5000명 정도의 학생이 광주학생해양수련원에서 호연지기를 기르며 안전 교육과 함께 수련 활동을 하고 있다. 학생의 죽음 앞에서 꼭 해양수련원을 만들겠다고 결심한 굳은 마음이 없었다면 중도에 그만두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부딪치고, 설득하고, 사방을 누비면서 2010년부터 7년의 세월이 걸렸지만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이뤄낸 값진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