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연천에는 망국의 한이 서려있는 장소가 있다. 경순왕릉과 기황후릉 터다. 경순왕이 통일신라의 마지막왕이라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그의 릉이 경주가 아닌 이곳 연천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생소하다.
경순왕릉
사람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죽듯 한 시대를 풍미했던 국가 또한 어느 순간 그 역사를 다하게 된다. 삼국시대의 마지막 패자였던 통일신라 역시 예외는 될 수 없다. 천년의 영광을 누렸던 통일신라는 경순왕때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짧은 오르막길을 지나면 외롭게 자리한 경순왕릉을 만난다. 오르막길 주변에는 철책선이 2m이상 높이로 쳐져 있으며 지뢰가 있다는 표식이 보인다. 경순왕릉 주변의 숲은 군사지역이라 출입이 통제되며 바로 앞이 민통선이다. 삼엄한 경계가 느껴질 정도였다.
경순왕은 통일신라의 56대 임금이다. 신라의 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경주시 밖에 위치해 있다. 왕릉이라 하기에는 규모가 작은데 거기에도 사연이 있다. 현재의 왕릉은 1747년에 경순왕의 후손들이 왕릉 주변에서 묘지석을 발견하면서 새로 정비한 것이다. 재정비 당시 왕에 대한 예우를 갖추어 조성한 것이 아니라 사대부 묘의 격식을 따라 꾸몄다.
경순왕의 시호는 '공손하게 따른(敬順)' 왕이라는 의미이다. 고려 태조 왕건보다 35년을 더 살았던 경순왕은 서기 978년 개경에서 죽었다. 신라의 왕인 경순왕릉이 왜 연천 지역에 있는지가 궁금했다. 여기에는 슬픈 사연이 전해온다.
경순왕이 죽자 패망한 국가의 왕이 겪었을 굴종의 삶을 본 신라의 유민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들은 곡을 하며 남쪽으로 가는 경순왕의 상여를 따라붙었다. 장례 행렬이 임진강을 건너기 위해 바로 이곳 연천의 고랑포에 이르렀을 때 그 인원수는 수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고려 왕족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장례 행렬 인원이 혹시 폭동이라도 일으킬까 두려웠고 이를 막기 위해 ‘왕족의 시신은 도성 밖 100리를 벗어나면 안 된다’는 규정을 내세워 이곳 연천에서 멈추게 하였다고 전해온다.
숭의전지(崇義殿址)
숭의전지는 조선시대에 전 왕조인 고려의 왕들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받들게 했던 숭의전이 있던 자리이다. 원래는 고려 태조 왕건의 원찰이었던 앙암사 절이 있었던 곳으로 1397년 고려 태조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한 것이 그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전소되었던 것을 1971년부터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 정비하였다.
길가의 주차장에 차를 대면 바로 어수정(御水井)이라는 약수터가 보인다. 임금(태조 왕건)이 와서 물을 먹었다는 의미의 어수정이다. 잠시 왕이 된 듯한 착각을 하며 시원한 물로 목을 축였다.
어수정에서 약 100m정도 길을 따라 올라가며 임진강 가에 조용히 자리한 숭의전을 볼 수 있다. 숭의전 바로 앞 임진강변 벼랑 바로 위에는 두 그루의 느티나무가 있다. 수령은 약 500년, 높이는 20m, 둘레는 4.7m이다. 1452년(문종 2년)에 고려 왕씨 후손이 심었다고 전한다.
전(傳) 기황후릉 터
2013년 MBC에서 방영되었던 ‘기황후’라는 드라마를 본 기억이 있다. 당시 기황후에 대하여는 특별한 관심이 없는 터라 눈여겨 시청하지는 않았다. 이 기황후의 능 터가 연천에 있다. 하지만 전(傳), 즉 전해온다는 의미의 한자가 붙은 것처럼 이 곳이 기황후 릉이 있었다는 사실은 명확하지는 않다.
기황후는 행주 기(奇) 씨이며 고려 출신 공녀로 원나라 마지막 황제인 혜종의 황후이다. 기황후는 원이라는 대제국을 무려 37년간 지배하였다. 기황후는 출생과 사망 시기가 전해지지 않는다. 고려 출신의 환관 고용보의 추천으로 궁녀가 되었다가 황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는 기록만이 남아있다.
혜종은 기씨를 총애하여 황후로 삼고자 하였으니 조정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가 후에 황태자를 낳자 제 2황후로 책봉하였다. 기황후는 혜종의 총애를 바탕으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아들을 황태자에 오르게 하고 군사권도 장악하여 승승장구하게 된다.
이처럼 기황후가 원나라에서 권세를 휘두르게 되자 고려에 남아있던 기 씨의 친족들도 공민왕에 의해 모두 숙청되었다. 이에 기황후는 공민왕을 폐하고자 군사를 일으켜 고려를 공격하였으나 최영 장군에게 대패한다.
이후 원나라에서는 기황후를 위시한 황태자파와 반대파 사이에 정쟁이 벌어지고 결국 반대파를 숙청했다. 황후가 죽자 기황후가 정후가 되었으나 황태자의 황위 계승을 둘러싼 정쟁으로 원의 국력은 급격하게 쇠퇴하였다.
기황후릉 터를 가기 위해서는 연천군 상리를 가야 한다. 상리 입구에는 모처럼 보게 되는 장승이 있었다. 어릴 적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장승의 모습조차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유물이 되어 버렸다.
기황후릉 터가 있는 곳까지 가기 위해서는 꼬불꼬불하고 좁은 차도를 아슬아슬하게 거쳐야 한다. 팻말 앞 차 한 대가 간신히 멈출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차를 돌려서 나오기 힘들 정도이다. 팻말에서 좌측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기황후릉 터가 보인다. 사실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야트막한 산의 한 부분일 뿐이다. 전 기황후릉 터는 2013년 11월 25일 연천향토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후기부터 『동국여지지』 등의 기록에 ‘기황후는 죽기 전 고국에서 장례를 치르기를 원하여 이곳 연천현에 장사하였다’라고 전한다. 현재, 릉의 형태는 알 수 없다. 다만, 기록과 더불어 이곳 능선 아래쪽에 기와 파편이 다수 보이고 릉의 석물로 보이는 석수 2점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곳 능선에 남향하여 릉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이곳에서 발견된 석수(석양)들은 현재 연천군 문화원 정원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연천 읍내에 있는 연천군 문화원을 직접 찾아가 보았다. 앞마당에 석양이 소박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연천군 문화원에 전시해 둔 것으로 보아 전 기황후 릉 터는 결정적인 스모킹 건은 없지만 어느 정도 그 신빙성을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연천 고랑포구 역사공원
호로고루 성에서 372번 국도를 타고 가다 보면 고랑포구가 나온다. 고랑포구 역사공원은 1930년대 고랑포구를 생생하게 재연하고 있다. 내부 시설이 잘 구축되어 있으며 연천 지역의 여러 명소들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어 학생 등 단체관람 시 교육적으로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고랑포구 역사공원은 경순왕릉과도 인접해 있어 호로고루성, 경순왕릉, 고랑포구 역사공원을 함께 방문하기를 추천한다.
그리고 주변에는 임진강 황포돛배 나루터가 있다. 한 시간 간격으로 출항하는데 40분간 운행하며 임진강 주변의 주상절리 등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민물인데도 배 위에 있는 나에게 갈매기들이 모여들어 신기했다.
고랑포구 역사공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이는 것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말의 동상이다. 레클리스(ReckIess)라는 군마라고 한다. 여기서 레클리스는 ‘무모할 정도로 용감하게’ 라는 뜻이다. 레클리스 군마는 계급이 하사로 미군에 공식적으로 등재된 한국전쟁에서 탄약 등 물자와 부상병을 실어 나르는 등의 활약을 펼쳐 무공훈장까지 받았다고 한다.
레클리스에 대하여 호기심이 생겨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레클리스의 원래 이름은 ‘아침 해’였다. 연천군은 특히 산악이 많아 차량으로 무반동 소총과 탄약 보급이 어려웠다. 군인 등 인력만으로는 효율성이 많이 떨어졌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침 해'는 첫 번째 임무에 투입된다.
당시 레클리스는 수십 kg의 탄약을 짊어지고 오솔길과 45도 각도의 급경사 산비탈을 해병대원들과 함께 386번이나 왕복했다. 왼쪽 눈과 옆구리에 큰 상처를 입었지만 새벽부터 황혼까지 아군의 탄약 공급을 도왔다.
연천 고랑포구 역사공원으로 향하는 길은 고즈넉하다. 인적이 뜸한 길목을 굽이굽이 지나치면 연천 경순왕릉으로 들어서는 초입의 오른쪽에 공원이 있다. 공원이 위치한 장남면 일대는 예전에 황해도 땅이었다고 한다. 분단 이후 파주에 편입됐다가 다시 연천군에 속하는 질곡의 과정을 거쳤다.
공원 뒤편 야산을 넘으면 남방한계선과 이어지는 삼엄한 지역이다. 철조망에 ‘지뢰’ ‘출입 금지’ 이정표가 빼곡하다. 사진은 보안상 게재하지 못한다.
연천 고랑포구 역사공원에서 나오자마자 1.21 무장공비 침투로 간판이 보였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그리고 영화로 접했던 사건이라 관심이 있어 들어가 보려고 하였으나 민통선 구역이라 사전에 허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직접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관련 홈페이지에는 신분증을 제시하면 입장할 수 있다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1.21 무장공비 침투 사건은 영화 ‘실미도’에 나오는 특수부대가 창설된 계기가 되었던 사건이다. 고랑포에서 서남쪽으로 3.5km지점에 위치한 무장공비 침투로는 1968년 1월 17일 23시 북한군 제124군 소속 김신조 외 30명이 남방한계선을 넘어 침투한 곳이다. 속칭 ‘김신조 루트’라 일컫는다. 얼어붙은 고랑포를 건너 파평산, 파주 법원리의 삼봉산을 지나 서울 세검정으로 침투한 사건인데 당시 남북한의 적대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앞으로의 남북 관계는 어떠한 국면으로 전개될 것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현지 문화해설사의 말에 의하면 임진강 뱃길을 중심으로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무렵이라고 한다. 임진강 뱃길의 종점이었던 고랑포는 경기 북부 지역 포구의 중심이었고 고랑포의 상업적 위상은 개항기를 거치면서 보다 커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