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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라떼는......고교시절

 

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 ‘인일여자고등학교 축제’ 인일제 동영상을 발견하였다. 흐뭇하고 반가웠다. 인일여자고등학교는 필자의 모교이다. 50년 후배들의 생기발랄함과 교정을 보며 모처럼 옛 시절을 되돌아보았다. 인일여자고등학교는 인천에 있으며, 70년대 당시 인천은 경기도에 속해있었다.

 

필자는 1970년대에 고등학교를 다녔다. 당시는 고등학교도 입학시험이 있었으며, 대학수학능력시험은 두 개의 지역, 즉 서울지역과 경기도 혹은 경기도와 충청지역 등 두 곳을 정하여 지원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에는 필기시험뿐 아니라 체력장 시험 점수도 합산하였으며, 본고사를 치러야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은 고등학교를 정하는 시기에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고 하여 부모님과 당사자인 필자와 더불어 입학할 학교를 의논하고 최종 결정을 하였다. 담임선생님은 체육을 담당하였는데 필자의 체육점수가 형편없어 걱정을 많이 하셨다. 체력점수가 무려 20점이나 되었던 것이다. 학생들은 대체로 만점을 받았다. 선생님은 ‘100M 달리기는 깃발이 들어올려지는 순간에 바로 뛰어나가라’ 등 걱정의 조언을 많이 해주셨다.

 

당시 명문이었던 인일여자고등학교에 필기시험을 보던 날 난로가 바로 곁에 있음에도 바들바들 떨었던 기억과 그럼에도 점심을 먹고 난 오후에는 시험보는 도중에도 졸음이 오던 것이 생각난다.

 

공부는 치열했을지 몰라도 학교생활은 교장선생님의 방침에 따라 반 대항 합창대회도 있고, 포크댄스 시간도 있으며, 동아리활동도 있어 되돌아 생각하면 즐거운 기억이 꽤 있다. 합창을 지도하는 음악선생님의 호통소리, 운동장에서 포크댄스를 하며 깔깔대던 웃음소리, 여기저기 삐져나온 소리들로 등수 안에 들지 못하였던 합창대회, 지각하여 벌로 주워서 쌓아놓은 운동장의 돌무더기, 식물공부하러 들었던 원예동아리는 지도선생님이 가끔 식물에 대해 설명해주시기는 하였지만 화단의 물주기, 잡초뽑기가 일상으로 입이 삐죽이 나왔던 모습. 화단에 하얗게 펼쳐져 있었던 당시의 교화(校花) ‘마가렛’과 더불어 아스라한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교장선생님은 학생들 하나하나를 꼼꼼히 챙기셨다. 당시엔 학생들이 많았는데 어떻게 그 학생들을 기억하시는지 지금도 경이롭다. 한 학년 인원이 300명이 넘었다. 필자는 지극히 아주 지극히 평범한 학생이었다. 졸업 후 거리를 거니는데 100미터 쯤 앞에 교장선생님이 계셔 얼른 골목으로 가서 몸을 숨겼다. ‘인사드려도 아시기나 할까’ 하는 마음과 ‘그렇다고 인사를 안드릴 수도 없고’ 등등 생각에 ‘숨자’ 하였다. 교장선생님이 뚜벅뚜벅 오시더니 ‘졸업생이지?’하시어 매우 놀랐다.

 

기억나는 것은 하나 있다. 쉬는 시간에 친구들과 시시껍절한 수다를 떨며 놀고 있는데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시어 ‘지금 호명되는 학생들은 교장실로 가라’고 하셨는데 필자의 이름도 있었다. ‘칭찬받을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데 무슨 일이지?’ 하며 호명된 친구들과 교장실로 갔다. 칭찬이 아니라 직전 시험에서 수학점수가 ‘4점’인 수학낙오자들로 교장선생님은 근심이 되어 격려차 부르신 거다. 야단을 맞은 기억이 없으니 아마도 한숨을 쉬시며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하셨을 것이다. 스스로를 변명하자면 수학이나 물리 등은 점수가 낮아도 국어, 영어, 화학, 역사나 세계사 등 외우는 계통은 잘했다.

 

필자시절도 선생님들을 향한 짓궂은 장난이 있었다. 0반은 화장실 가까이에 위치하였는데 유리문 가까이에 앉은 학생들이 선생님들의 화장실 가는 횟수를 기록하고 한달치 평균을 내었다. 그리고 선물로 최다 선생님 롤화장지, 최소 선생님 변비약을 준비하여 수업시간에 드렸다.

시력이 매우 낮은 한 선생님의 시력이 미치는 거리를 측정하고자 수업시간에 앞에서부터 세 번째 줄 학생은 의자에 앉은 채로 팔을 뻗어 흔들고 다섯째 줄 학생은 책상에 앉아 팔을 흔들고 일곱째 줄은 일어서서 팔을 흔들었다. 선생님은 모르는 체 수업을 마치고 다른 반에 가서 옆반 수업에서 ‘세 번째 줄은 앉아서 팔을 흔들고, 다섯째 줄은 책상에 앉아서 마지막 줄은 서서 팔을 흔들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하여 학생들은 안경의 성능이 매우 좋은 것으로 결론지었다.

 

점심시간 후 슈베르트의 ‘밤과 꿈’ 기타 연주가 방송되면 ‘낮잠’시간이 시작되었다. 몇 분이었는지, 어떤 형태로 잠에 들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으나 음악은 선명하며, 잠들기 싫은 학생들은 학교 뒤 동산으로 달려가 쫑알쫑알 수다떨다 선생님에게 잡혀 오기도 하였다. 학교는 언덕 위에 있었고 운동장은 맨 위에 있어 바람이 세게 불었으며 돌도 많았다. 지각한 학생들은 운동장의 돌을 주워 쌓아놓는 벌을 받았는데 필자는 겨울에 지각하여 오바코트와 장갑을 책가방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당시 통칭 시베리아 유형지(?)의 돌을 주워 한 곳에 쌓아놓았다.

 

인일여자고등학교와 담 하나를 두고 제물포고등학교라는 남자고등학교가 있었다. 제물포고등학생들은 가끔씩 밤중에 담을 넘어 와 각 교실에 사탕 등을 놓고 갔으며, 더러 방석을 가지고 갔다. 선생님들은 여학생은 따듯하게 지내야 한다며 방석을 강조하셨는데 일부 방석을 가지고 간 것이다. 선생님들은 항의 방문하시어 방석을 되찾아왔다. 항의하러 간 선생님들과 항의 방문을 받은 학교 선생님들은 차를 나누며 ‘껄껄, 깔깔’ 즐거운 교류 시간이었을 듯 싶다.

 

선생님 생신이면 칠판에 커다란 케익과 꽃다발을 그려놓고 노래를 불러드리기도 하였다.

 

50년 후배들은 방송부 영상도 만들고, 교직원선생님들과 춤과 노래를 함께 하고, 가야금연주와 패션쇼를 멋지게 보여주었다. 오랜만에 학교와 후배들을 보아 반가웠고, 옛적을 회상하며 싱그럽고 활기넘친 후배들의 모습 위에 필자의 리즈시절을 발견하며 잠시 10대의 소녀로 되돌아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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