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탄핵 사태가 지속되면서 대한민국의 미래가 끝 모를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다. 모두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며 바른길을 모색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하지만, 나타나는 모습은 극한의 갈등과 대립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더 밝은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 교육이 할 수 있는 역할을 탐색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태를 바라보는 관점, 생각하는 해결책이 극단으로 나뉘는 이유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서로를 이해하며 공감대를 확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고, 이를 위해 교육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번 호와 다음 호 2회에 걸쳐 우리가 갇혀있는 ‘순진한 실재론(naive realism)’의 관점에서 그 대안을 탐색해 보고자 한다.
정치적 견해 차이에 대한 해석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2024년 12월 11일 전국 만 18세 이상 유권자 50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즉시 하야 혹은 탄핵으로 대통령 직무를 정지시켜야 한다는 의견은 74.8%로 나타났다. 연령대별로는 40대(83.9%)와 30대(85.2%)에서 즉시 하야·탄핵해야 한다는 의견이 80%를 넘었다.
50대(78.1%), 만 18∼29세(73.9%), 60대(71.2%), 70세 이상(52.8%) 순이었다(이동인, 2024). 이를 바탕으로 어떤 교수는 고령층의 정치문해력이 낮다고 결론짓고 있다. 나아가 ‘한국의 평생학습 참여율을 지금보다 두 배 이상 올리지 않는다면, 특히 중고령층의 정치문해력 저하로 인한 정치분열을 지속적으로 감내해야 할지 모른다’고 주장한다.
국제개발협력기구(OECD)의 국제성인역량조사(PIAAC) 2주기 결과 우리나라 성인(16~65세)의 언어능력 평균점수가 OECD 평균보다 낮고, 특히 중고령층(1958~1968년생) 언어능력 점수가 낮은 것을 주장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한숭희, 2024). 일견 타당해 보인다. 그런데 연령이 아닌 이념과 지역을 기준으로 보면 그의 해석에 동의하기 어려운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이념 성향별로는 정치적 이념을 진보로 밝힌 응답자 안에서는 92.0%가 즉시 하야·탄핵에 찬성했고, 중도층은 83.0%, 보수층은 43.0%였으므로 보수층의 정치문해력은 아주 낮은 것으로 해석된다. 지역별로 보면 광주·전라 지역민(즉시 하야·탄핵 83.9%, 질서 있는 퇴진 10.5%)의 정치문해력이 가장 높고, 대구·경북 지역민(즉시 하야·탄핵 73.2%, 질서 있는 퇴진 17.4%)과 부산·울산·경남 지역민(즉시 하야·탄핵 60.1%, 질서 있는 퇴진 23.8%)은 상대적으로 상당히 낮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고령집단과 보수집단 및 특정 지역의 하야와 탄핵 반대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이유가 정치문해력 탓이 아니라 신념체계가 달라서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우리 모두 애국자
나라가 백척간두에 서 있는데 양측 모두 자기 진영에 유리한 논리만 앞세우며 싸움에 몰두하고 있다. 솔로몬의 재판에서는 다행히 친모가 있어서 아기를 살릴 수 있었으나, 지금의 여당과 야당의 싸움을 보면 어느 쪽도 친모가 아닌 것 같다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
탄핵에 찬성하는 다수는 이러한 주장을 양비론으로 치부하고, 그래서 당신의 입장은 무엇이냐며 몰아붙일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우선 죽음에 직면한 아기를 살리는 것이다. 어느 한쪽이 막강한 힘으로 다른 쪽을 제압하고 원하는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여 아이를 살려내길 바란다. 그러나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아 보인다.
지금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국민의 깨어있는 의식, 자신과 타인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기 위해 노력하는 열린 마음이다. 나만이 아니라 상대방도 국가의 미래를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고, 후손들에게 더 나은 대한민국을 물려주고 싶어 한다는 점을 서로 믿기 바란다.
오바마 대통령은 2008년 6월 30일,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에서 행한 연설에서 “이라크전쟁에 반대한 사람들도 애국자이고, 이라크전쟁을 지지한 사람들도 애국자이다”라는 말을 했다(cbs news).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 바탕에는 애국심이 깔려있음을 믿는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 열린 대화를 시도하지 않으면, 서로 상대를 파멸시키려 할 것이고, 그 결과는 공멸이 될 수도 있다. 우리의 목적은 아이를 살리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상대를 어떻게 해야 이해할 수 있을까? 나를 먼저 돌아보고, 이어 우리가 갇혀있는 ‘순진한 실재론(naive realism)’의 관점에서 해결책을 찾아보고자 한다. 양 정당만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길 간절히 소망하며 내 생각을 나눈다. 이를 선도적으로 할 수 있는 집단이 교육자 집단일 것이다. 교육자들이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과 연을 맺고 있는 학생들, 그리고 학생들을 통해 그 부모들도 열린 마음을 갖게 된다면 우리가 꿈꾸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나 돌아보기: 중립적 제3자 지향
대학 시절을 제외하고는 특정 이념집단이나 정치집단에 속해본 적이 없다. 누군가는 멀리에서 현상을 관찰하고 이해하려는 학자의 역할을 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 역할을 자임해왔다. 내가 가진 편견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하겠지만, 이를 의식하며 극복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 왔다.
다행히 내가 활동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독재정부가 들어서지 않았기에 대한민국과 세계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어느 정부든 도움을 요청할 때 기꺼이 내 시간과 노력을 나누었다. 그리고 국립대 교수로서 내 소임에도 최선을 다했다. 개개인이 자기 소임을 다할 때, 그리고 정부로부터 도움을 요청받은 사람들이 중립적 입장을 견지하며 정부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도울 때, 대한민국호의 미래가 더 밝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왔다.
정치집단이 서로 싸우며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야당이 여당을 지속적으로 공격하며 실패하도록 하려는 것이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정당의 특성상 자연스러운 행태이다. 민주화 이후 모든 정권하에서 이러한 행태는 반복되었다. 야당 입장에서는 현 정권이 실패해야만 자신들의 집권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할 것이다.
그러나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정부가 제 역할을 해 주어야 국가의 미래가 밝고, 국민도 행복해질 수 있다. 정치집단의 이전투구로 인해 경제를 비롯한 사회 제반 부분이 무너져가고 있는데 정당의 패싸움에 끼어들어 국민들까지 어느 한편에 서서 싸운다면 그 나라의 미래는 암울해질 것이다.
국민이 각자의 자리에서 소임을 다하면서도 정치집단의 싸움을 냉정하게 지켜보고 바른 판단을 해 주어야만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향유하고, 후손들에게도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 싸우며 국가를 위기로 몰아가는 야당이 아니라, 잘못된 집권당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리더십을 발휘할 때 야당의 차기 집권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면, 야당도 당연히 그러한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다.
그러나 정당은 지역분열, 세대분열, 성 간의 분열 등 각종 분열을 조장하는 손쉬운 전략을 택하고 있다. 이렇게 분열시켜 놓아야 제3당이 훌륭한 후보를 내더라도 그를 찍지 않고 양당의 하나를 찍게 된다. 싫어하는 쪽이 당선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지지하는 정당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도록 하기 위해, 지지하는 정당이 내세운 후보가 설령 무능하고 문제가 많더라도 찍게 될 것임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정당 내에서의 권력 암투가 정당 간의 싸움보다 더 비열하고 잔인하다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결국은 정치권의 편 가르기에 놀아나지 않는 깨어있는 국민들이 늘어나야 대한민국의 미래가 밝아질 것이다. 이것이 교육이 미래의 희망인 이유이기도 하다.
애석하게도 우리 사회를 비롯하여 자유시장 자본주의가 극으로 치닫고 있는 사회에서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 1969)가 말한 ‘중립적 제3자’, 혹은 공정한 관찰자의 비율 급감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그 대신 중립적 제3자를 가장한 어느 한쪽 사람들, 아니면 매수된 ‘가짜 중립적 제3자’가 늘어나고 있다.
드러내놓고 세 싸움을 하는 사회에서는 중립적 제3자는 양쪽으로부터 매도당하기 때문에 설 자리가 없어서 아예 목소리를 내지 않거나 결국 어느 한쪽에 속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 사회의 비극은 이처럼 공정한 관찰자가 설 자리가 점차 줄어들고 있는 데에서도 비롯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중립적 제3자로 살아가는 것은 힘들고 외로운 일이 되고 있다. 어떻게 해야 이를 막을 수 있을까?(다음 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