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계고 고교학점제가 교육과정 다양화 측면에서는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학생의 선택을 뒷받침할 진로·학업 설계 지도의 질적 기반은 오히려 약화되고 있다는 연구가 나왔다. 일회성 전공 설명회와 부족한 상담, 성적에 따른 비자발적 전공 배정, 교원 업무 증가 등이 맞물리며 학생의 실질적인 선택권을 제약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박미희 한국직업능력연구원 부연구위원과 박진아 경인교대 강사는 한국교육학회 학술지 ‘교육학연구’ 제64권 제2호에 게재한 논문 ‘고교학점제 운영에 따른 직업계고등학교의 진로·학업 설계 지도의 쟁점 분석’에서 이같이 밝혔다. 연구진은 교육청 장학사와 관리자, 교사, 직업계고 1~3학년 학생 등 28명을 대상으로 초점집단면담(FGI)을 실시했다.
연구진은 직업계고 학점제가 학생 선택형 교육과정을 확대해 왔지만 정책 지원은 교육과정 편성·운영 등에 집중됐고 진로·학업 설계 지도는 상대적으로 소외됐다고 진단했다. 실제 시·도교육청의 2025학년도 지원 계획을 보면 교육과정 운영 컨설팅은 시·도, 공동교육과정은 16개 시·도에서 지원한 반면 진로탐색 프로그램과 진로지도 교원 연수, 학생 학업 설계 등 관련 지원은 항목별 2~5개 시·도에 그쳤다.
학교의 진로지도 역량 강화도 약화되는 흐름을 보였다. 진로탐색 프로그램과 학생 학업계획서 작성은 2024학년도 각각 99.5%, 98.8%의 높은 운영률을 보였지만 ‘진로지도 전문교원 양성’ 운영 학교 비율은 2022년 90.5%에서 2024년 79.6%로 떨어졌다.
학생들의 전공 선택 과정에서는 충분한 정보와 상담이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학과·세부전공 설명회가 선택 직전에 한 차례 열리는 경우가 많았고 담임이 해당 전공 교사가 아니면 구체적인 상담을 받기 어렵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 때문에 적극적으로 다른 교사를 찾아가는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 사이에 정보 격차가 생기는 문제도 지적됐다.
전공별 정원을 초과할 경우 일부 학교에서는 성적이나 출석 등을 기준으로 학생을 배정해 희망하지 않은 전공에 들어가는 사례도 나타났다. 과정평가형 자격 제도와 교육과정이 연계된 경우에는 전공이나 과목 변경도 쉽지 않았다. 연구진은 전공별 인원 제한과 조기 확정 압박 등이 학생의 실질적인 선택권을 제약한다고 분석했다.
수업에서도 학생 맞춤형 설계에 한계가 있었다. 직업계고 전문교과는 자격증 취득과 연계돼 수업과 평가가 기능사 시험 준비 중심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아 취업과 대학 진학, 전공 외 분야 진출 등 다양해진 학생의 희망 진로를 개별 수업에 반영하기 어려운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교원 업무 증가에 따른 진로 프로그램 축소와 진로수업의 질적 편차, 진로전담교사 상담의 한계, 교사의 진로지도 역량 부족도 확인됐다. 특히 직업계고는 전공 계열과 산업 구조에 대한 이해까지 요구돼 보다 전문적인 상담 역량이 필요하다고 연구진은 봤다.
연구진은 이러한 문제가 개별 학교의 노력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구조적 성격을 갖는다고 분석했다. 교육과정 다양화는 진전됐지만 이를 뒷받침할 진로·학업 설계 지도는 학점제 도입 이전 수준에 머물면서 오히려 질적 기반이 약화되는 모순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에 학점제 정책의 초점을 양적 확산에서 질적 내실화로 전환할 것을 제안했다. 성적·출석 중심의 전공 배정 방식을 재검토하고 학생의 진로·적성을 우선하는 기준을 마련하는 한편 전공 정보 제공과 수강신청·변경 기회를 실질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진로상담은 담임교사 개인에게 맡기기보다 담임과 전공교사, 진로전담교사가 협력하는 체계로 재구조화해야 한다고 봤다. 아울러 진로설계·상담 연수를 강화하고 교원 수급 부족에 따른 업무 부담에 대해서도 중앙정부 차원의 구조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