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고의 현주소 지난달 29일 오전. 인천 J정보고 교무실에서는 20여 명의 교사가 서명용지에 날인을 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내년부터 인문고로 전환하겠다는 학교의 일방적인 통보에 맞서 반대 서명을 한 것이다. 학교측은 "정부 지원도 끊기고 앞으로 미달도 우려되는 상황에서 더 이상 학교 운영이 어렵다"는 이유를 들었고 반대 교사들은 "실고 기피현상에 편승한 이사장 개인의 독단"이라며 반발했다.
서울 E여정보산업고도 현재 서울시교육청에 인문고 전환을 신청한 상태다. 그러나 학교측이 과원 전문교과 교사 30여 명을 공립특채 할 것을 요구하고 있어 불투명한 상태다. 개교 4년째인 인천 Y여정보산업고도 인문계로 전환할 방침이었지만 반대에 부딪쳐 학과를 개편하는 것으로 활로를 찾기로 했다. 서울 사립 D공고 역시 지난해 10월 2001학년도부터 통합형 고교로 바꾸겠다고 했다가 잇단 교사, 학부모의 반대로 백지화 됐다.
올해 각각 10학급이나 미달된 서울 D, S여정보산업고도 인문계 전환만이 살길이라는 현실에 부딪쳐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다. 몇 년째 미달사태를 겪은 전국의 실업고들이 생존을 위해 인문계 전환이나 보통과 신설을 잇따라 요청하고 있다.
올해 대규모 미달사태를 빚은 서울 각 실업고의 학급수 조정 신청에 따르면 2001학년부터 18개 실업고 56개 학급이 감축되고 41개고의 학과와 교육과정이 개편될 전망이다. 이에 따라 통합고와 인문고 전환이 잇따를 것으로 보인다. 이미 강원 강릉상고는 올해 상과를 축소하면서 인문계 3학급을 신설했고 거진공고와 거진여상고도 거진종합고로 교명을 바꾸면서 인문계 1학급을 신설, 신입생을 뽑았다.
작년부터 실업고에 학과개편과 인문고 전환 분위기가 확산된 데는 여러 가지 위기상황이 작용했다. 우선 몇 년 전부터 실고는 심각한 정원 미달사태에 몸살을 앓고 있다. 2000학년도 실업계 고교 입학전형 결과 서울은 99학년도보다 정원을 무려 1만 명이나 줄였음에도 35개 공고와 44개 상고에서 6200명이 넘는 대량 미달사태를 빚었다. 인천은 99년 12명 만이 미달했지만 2000학년도에는 정원을 1788명 줄인 상태에서 16개교 960명이 미달했고 강원도도 지난해보다 정원을 1300명이나 줄였지만 총 49개 실업고 중 27개교 1398명이 미달했다.
이 때문에 실고 교사들은 이미 수 년 전부터 수업을 팽개치고 인근 중학교로 `신입생 세일'에 내몰리고 있는 형편이다. 정부의 직업교육 축이 전문대로 옮겨가면서 실고에 대한 지원이 대폭 삭감된 것도 `실고 포기'를 부채질하고 있다. 실고 인문고 50대50대 정책을 추진하던 교육부는 96년 2월 신직업교육개혁안을 통해 직업교육의 축을 갑자기 실고에서 전문대로 옮기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3년 째 실고에 대한 실험실습시설 지원비가 격감하고 있다. 실제로 서울의 경우 97년 203억 원이던 실험실습시설 투자액이 98년 104억 원으로 줄어든 데 이어 99년에는 19억 4000만 원에 그쳐 2년 전의 10% 수준에도 못 미쳤다. 시설 확충 대상 학교 수도 97년 84개교, 98년 85개교에서 99년에는 12개교에 불과해 대부분의 실업고에서 실험실습을 위한 투자가 끊어진 것으로 드러났다.
이 때문에 실업고는 낡아빠진 실험실습 기자재와 그것조차 부족한 현실에서 산업수요에 부응한 기능인력을 배출해내지 못하고 있다. 서울 은곡공고 이종욱 교장은 "97년 현재 실고의 실험실습기자재 확보율은 64%에 불과하고 서울 시내 34개 공고에는 내구 연한 10년 이상의 낡은 기자재가 3만 여점이 넘는 실태"라고 말했다.
제대로 된 실습교육도 받지 못하고 오직 칠판 앞에서 수준에도 맞지 않는 교과서를 갖고 수업을 받고 있는 학생들이 학교생활에 흥미를 잃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수업시간에도 책상은 듬성듬성하고 학교 앞 당구장은 아침부터 아이들로 붐빈다. 공장으로 현장실습 나간 학생 절반이 일이 힘들고 근무조건도 나빠 되돌아온다는 사실은 새로울 것도 없다.
인천체고 신남호 교사는 "학생들의 수준에 맞는 교과서와 교육과정이 개발되지 않아 흥미를 잃은 아이들의 일탈이 가속화돼 결석 학생을 체크하느라 출석을 부르는데도 10분이 넘게 걸리는 경우가 허다하다"며 "졸업 후에도 월 60∼70만원의 허드렛일이나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누가 입학하겠냐"고 한탄했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부는 올1월 13일 실업고를 점차 일반 인문고로 전환시키고 통합고를 도입한다는 실업고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이 대책은 부실 실고의 정리와 인문고 전환과 함께 애니메이션, 자동차, 디자인고교 등 소수의 경쟁력 있는 실업고는 집중 육성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 과정에서 남게 되는 부기, 선반 등 전문교과 교사 1만9000여명은 앞으로 4년간 국고를 지원, 윤리 등 일반교과(41∼21학점)를 부전공해 교사자격증을 따도록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실고 교사들은 "획기적인 투자 없이 모든 책임을 학교에 떠넘기려는 처사"라며 강력히 반발하고 실력행사에 들어갈 조짐이다. 특히 미달사태로 학급이 줄어든 전국 실업고는 수 백여 명에 이르는 과원교사의 `구조조정' 문제로 교육당국과의 마찰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이와 관련 인천실업교육정상화를 위한 교사모임은 지난달 31일 모임을 갖고 ▲인문계 고교 전환 철회 ▲실고 학급당 정원 축소 ▲재정 지원 확충 등 5개항을 요구하고 30개 실고교사들의 서명부를 수합했다. 교사모임은 이 서명부를 교육청에 제출하고 단체행동도 불사한다는 방침이다.
또 전국공고교장회는 3일 제37차 정기총회를 열고 ▲실고로 직업교육 중심축 환원 ▲실험실습 기자재 확충 등 11개항의 결의문을 채택, 끝까지 관철시킨다는 입장을 확인했다. 이종욱 부회장(서울 은곡공고 교장)은 "이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교원부터 학생까지 교육부 항의방문과 거리집회에 나서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