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준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이 국민대 교수 시절 작성한 논문에 대한 표절, 중복게재 등의 의혹으로 취임한 지 열흘도 안돼 사퇴 압력까지 받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김 부총리는 논문 표절시비를 가리기 위해 한국행정학회의에 판정을 의뢰해놓았고 한양대와 국민대의 학술지에 중복게재한 논문을 BK21(연구중심대학 육성)사업 연구실적으로 제출한 점에 대해선 직접 사과했다.
그런데도 연구비 이중수령 등 '도덕성 논란'은 계속되고 있으며 김 부총리는 교육부 기획홍보관리관과 학술진흥과 등을 통해 이런 의혹이 부풀려졌거나 왜곡됐다는 해명자료로 강력히 맞서고 있다.
교육부의 적극적인 방어는 김 부총리가 적어도 제자의 논문을 표절하지 않은 한 '교육 수장(首長)'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날 생각이 없음을 강하게 시사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그간 제기된 논문의혹과 교육부의 반박내용을 정리하고 김 부총리의 향후 거취도 진단해본다.
◇ 연구비 이중수령 = 김 부총리가 다른 연구자 2명과 함께 서울시의회에서 1천800여만원을 지원받아 1999년 12월 제출한 연구용역 보고서 '중앙행정권한의 지방이양에 따른 자치입법적 대응방안'의 내용 일부를 그대로 베껴 2001년 2월 국민대 사회과학연구소의 교내 학술지인 '사회과학연구'에 '권한이양촉진법 제정에 따른 권한이양 절차의 변화와 지방자치단체의 대응방안'이라는 논문을 실었으며 이 논문은 BK(두뇌한국)21 사업 연구실적으로 제출됐다.
즉 김 부총리가 다른 기관에서 연구비를 받고 쓴 논문을 BK21 사업의 실적으로 보고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연구비를 이중으로 받았다는 것이다.
교육부는 이런 의혹이 BK21사업의 성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으로 분석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BK21사업은 연구비 지원사업이 아니며 학생장학금과 국제협력ㆍ과제수행경비로 구성된 인력양성 사업이다. 따라서 BK21 사업팀에 소속된 교수는 열심히 노력, 외부 연구비를 수주해야 하며 그 결과로 나온 논문과 연구비 수주액수는 BK21사업의 실적으로 기록된다"고 설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김 부총리가 서울시 용역보고서를 논문으로 발표하고 그 발표 실적을 BK21사업의 실적으로 제출하는 것은 정당하는 것이다.
더욱이 정책개발이나 사례조사를 위한 정부 용역 결과물은 발주자인 정부기관의 소유이기는 하지만 그 연구책임자가 보고서의 학술적 가치를 인정, 논문적 형태로 다시 발표하는 것은 비영리 학술행위에 해당되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 교육부의 입장이다.
교육부 관계자는 "BK21사업에서는 참여 교수가 서울시와 학술진흥재단 등 외부로부터 연구비를 수주해오고 그 결과 발생한 논문을 실적으로 제출토록 권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 중복게재 = 김 부총리가 2001년 1월 한양대 지방자치연구소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 '지방자치단체의 개방형 임용에 대한 소고'를 2001년 12월 소속 대학인 국민대의 사회과학연구 학술지에 '지방자치단체의 개방용 임용제에 관한 연구'란 제목으로 바 꿔 다시 발표(일종의 자기표절)했으며 이 두 논문은 BK21 연구실적으로 올려졌다.
교육부는 국민대 학술지 재발표가 국민대 학술지 편집인의 요구에 따른 것이라고 해명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대학연구소 학술지 등 학술지 발행기관이 영세한 경우에는 논문제출실적이 미진하기 때문에 논문 투고를 독려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외부에 발표된 논문을 교내 학술지에 다시 발표하는 사례도 많다"며 "선배 교수가 후배 교수에게 교육 홍보차원에서 요청하면 거절하지 못하는 풍토가 그 당시 만연돼 있었다"고 말했다.
국민대 사회과학연구소의 논문집 발간 책임자였던 문태운(56) 현 국민대 정치대학원장은 "교수들의 연구활동을 진작시키고 격려하기 위해 지금까지도 논문의 중복 수록 등을 허용하는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 원장은 "국민대 사회과학연구소는 논문집 발간을 위해 다른 학술연구비 지원에 의해 연구된 논문, 다른 대학교나 시중 출판사에서 발간된 책자에 수록된 논문, 여러 교수들이 편집해 출판된 단행본에 실려 있는 논문은 중복해서 수록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학술대회나 세미나에서 발간된 내용을 (논문집에) 그대로 수록할 수 있으며 일부 수정 또는 새롭게 쓰거나 정리한 논문도 허용했다"며 "이런 원칙들은 연구소가 구성원들의 원활한 연구활동을 위해 1989년 제1 논문집 이후 2006년 제18 논문집까지 일관되게 적용했다"고 강조했다.
◇ 표절시비 = 김 부총리의 1988년 6월 한국행정학회 발표논문(도시재개발에 대한 시민의 반응)이 제자 신모(사망)씨의 1988년 2월 박사학위 논문(도시재개발 지역주민의 정책행태에 관한 연구)을 표절했다는 것이다.
교육부는 우선 한국행정학회지 발표논문이 1987년 12월10일 한양대에서 개최된 '한국행정학회 학술대회'에서 이미 발표된 것으로 1988년 6월 한국행정학회 학회지에도 자동 게재됐다며 김 부총리 논문이 먼저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두 논문에서 사용한 분석기법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두 논문은 완전히 다른 것으로 설명한다. 신씨는 다중회귀분석 방식을 사용한 반면 김 부총리는 단순빈도분석을 사용했으며 전개방식 또한 분석적이라기보다는 서술적인 방식을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비슷한 연구를 교수와 제자가 공유하고 별도의 논문을 냈다는 당시 학문적 관행 자체를 문제삼을 수는 있겠지만 김 부총리가 신씨의 논문을 표절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는 게 교육부 시각이다.
교육부 관계자는 "일각에서 표절 문제 시비를 한국행정학회에 문의한 것에 대해 비난하고 있지만 이 절차는 합당하다"며 "표절 등 연구윤리 문제는 그 논문이 발표된 기관에서 판정하는 것이 국제적 관례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네이처(세계적인 과학전문지)에 발표된 논문이 가짜라면 네이처의 편집인들이 판정을 하지 다른 잡지의 편집인들이 조작여부를 가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교육부는 따라서 김 부총리가 1989년 국민대 부교수로 승진하기 위해 제자의 논문을 표절했다는 주장은 "(하지도 않은) 표절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맞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집행위원인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는 인터넷매체 '데일리 서프라이즈'와의 인터뷰에서 "논문표절 등과 관련해 원저자가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이상 발각되기도, 표절로 결론나기도 힘든 게 그간의 관행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원저자인 신씨는 세상을 떠났고 김 부총리는 교육부의 수장인 만큼 그의 영향이 미치는 한국행정학회에서 심의를 담당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고 주장했다.
◇ 재탕= 김 부총리가 1996년 3-12월 학술진흥재단으로부터 연구비 450만원을 지원받아 작성한 논문 '정책결정 과정에 있어서 시민단체의 영향력'을 1999년 3월 한국지방자치학회보에 '공익적 시민단체의 정책적 영향력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발표하고 2002년 8월 BK21사업 실적으로 보고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김 부총리가 국민대 동료 교수들과 함께 BK21사업을 신청해 사업팀에 선정된 게 1999년 9월이었으므로 사업 신청 6개월 전에 이미 발표된 논문(지방자치학회보 게재)을 연구실적으로 보고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실적보고를 정부가 모두 인정했느냐는 점이다.
김 부총리는 1999년 9월부터 2002년 8월까지 3년 동안 BK21사업 핵심분야 사회 4분과 12개 사업팀 가운데 1개팀의 팀장을 맡았고 연간 6천900만원씩 3년 간 2억700만원을 받았다.
교육부는 김 부총리가 이 기간에 중복 발표된 논문을 모두 BK21사업 실적으로 제출한 것으로 돼 있지만 정부가 결과물에 대한 평가과정에서 이를 인정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세부평가 근거자료가 없기 때문에 확인이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교육부 관계자는 "정부 심사방식은 단독저자 1편, 2인 공동 저자 0.7편, 전국규모 학술지 100%, 지역 학술지 50% 인정 등의 규칙하에 전문가적 판단으로 편수가 결정되며 이렇게 해서 김 부총리 사업팀이 제출한 전체 46편의 논문 중 36편이 인정받게 됐다"며 "이는 김 부총리 사업팀의 3년 간 교수논문 달성목표(15편)를 2배 이상 초과한 것"이라고 말했다.
◇ 향후 전망 한국행정학회는 의뢰를 받은 지 두달 이내에 표절시비 판정을 내리도록 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행정학회가 사안이 중대한 만큼 속도를 내겠지만 교육부 관계자들은 일러야 9월 초순께나 시비가 가려질 것으로 예상했다.
학회의 공정하고 객관적인 판정은 김 부총리의 거취를 좌우할 수 있다. 김 부총리 역시 표절만큼은 절대 아니라고 강력 부인해왔기 때문이다.
김 부총리를 적극 옹호해온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의 정봉주 열린우리당 의원조차도 29일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과의 인터뷰에서 "제자 논문을 표절했다면 (사퇴를) 피해갈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부총리가 표절시비에서 벗어나더라도 중복게재나 자기표절에 대한 도덕성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김창룡 인제대 교수는 언론비평전문지 '미디어오늘'에 기고한 글에서 "외부 발표 논문을 다시 싣는 관행이 있어도 그 경우 반드시 언제, 어디서 사전에 발표한 논문이라는 명시를 해야 한다. 그런데 김 부총리는 이런 사실을 명시하는 대신 오히려 제목을 조금 바꿔 마치 새로운 논문인 것처럼 게재했다.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교수의 논문은 본인 허락 없이는 함부로 바꿀 수도 게재할 수도 없다. '실무자의 실수'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야말로 무책임하고 무분별한 처사다. 설혹 실무자의 실수로 그렇게 제목이 달렸더라도 최종확인은 반드시 논문 저자의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는 민교협의 김 부총리 자신사퇴 촉구 성명과 관련, "같은 학자의 입장에서 학자적 양심에 따라 전한 진심어린 권고다. 정치권 등에서도 이번 논란에 동정 혹은 정쟁이 아닌 '원칙'의 잣대를 대길 바란다"면서 "김 부총리로 불거진 이번 논란을 단순히 용퇴 문제로 치부하지 말고 학계 내부의 자기반성 및 연구윤리의 객관적 기준을 마련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나경원 한나라당 대변인은 29일 성명을 통해 "김 부총리의 논문 성과 부풀리기는 학자로서의 양심도, 스승으로서의 도리도, 장관으로서의 자격도 없는 부도덕성의 극치"라며 노무현 대통령에게 즉각 해임을 촉구했지만 일부 야당 의원들 사이에서는 학회지와 교내 학술지에 논문을 동시에 발표하는 것은 일종의 관행이었다는 점 등을 들어 김 부총리의 논문 의혹을 더이상 정치쟁점화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반면 여당 내부에서는 '논문 실적 부풀리기' 의혹 등으로 도덕성 논란에 휩싸인 김 부총리 거취 문제에 대한 여론수렴 작업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일각에선 '사퇴 불가'라는 기존 입장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런 와중에 김 부총리는 조만간 주요 교육정책에 대한 구상을 발표함으로써 현재 처한 위기를 정면돌파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한 것으로 한 측근은 전했다.
이 측근은 "김 부총리가 논문 중복게재를 제외한 나머지 의혹들에 대해선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며 부총리 취임전후 구상해온 중요 정책을 흔들림 없이 추진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