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실시된 지 일주일 가까이 지났지만 새롭게 바뀌는 수능 등급제에 대한 논란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21일 입시전문가들에 따르면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당초 대학입시에서 수능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는 것을 전제로 등급제 도입이 결정됐지만 막상 2008 입시의 뚜껑을 열고 보니 수능의 영향력이 결코 줄어들지 않은 데 있다.
또 1~2점 차이로 등수가 매겨지는 서열화 폐단을 막기 위해 등급제를 도입했음에도 학생들은 여전히 1~2점 차이로 등급이 갈리는 상황에 처했고 게다가 총점이 높아도 영역별 등급이 낮으면 불리해지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지면서 학생, 학부모들의 불만이 가중되고 있다.
◇ 등급제 논란 이유는 = 학생, 학부모들이 한결같이 지적하는 등급제의 불합리성은 바로 일정 점수대를 묶어 같은 등급으로 처리하는 방식에 있다.
예를 들어 원점수 100점에서 91점까지를 모두 1등급으로 묶어 해당 점수대에 속한 학생들은 모두 같은 성적으로 처리한다는 것인데 문제는 '등급 커트라인'이다.
1등급을 구분하는 커트라인 점수가 91점이면 90점을 맞은 학생은 불과 1점 차이로 2등급으로 내려가게 된다.
학생들 입장에서는 100점과 91점은 무려 8점이나 차이가 나는데도 같은 등급이 되고 91점과 90점은 불과 1점 차이인데도 다른 등급이 된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어려울 수 밖에 없다.
더욱이 수능 각 영역의 총점이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등급 커트라인에 걸려 낮은 등급을 받게 되면 오히려 더 불리해지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예를 들어 A학생은 언어, 수리, 외국어영역에서 각각 100점, 100점, 90점, B학생은 91점, 91점, 91점이라면 총점으로는 A학생이 290점으로 B학생(273점)보다 17점이나 높지만 등급으로 환산하면 A학생은 1-1-2등급, B학생은 모두 1등급이 돼 결국 B학생이 더 유리해지는 것이다.
입시기관들도 이같은 '등급제의 맹점'을 강력하게 지적하고 있다.
실제 한 입시기관이 지난 6월 수능 모의평가 응시생들을 대상으로 표본조사한 결과 같은 등급을 받은 학생들이라도 원점수는 최대 83점까지 차이가 나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는 종전의 점수제 방식으로는 충분히 합격권에 드는 학생이 등급제로 바뀌면서 불합격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실제 성적이 발표되고 나면 학생들의 불만이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 변별력 확보 가능한가 = 등급제 도입 당시 가장 우려됐던 부분이 바로 변별력을 어떻게 확보하느냐였다.
점수 없이 오로지 등급으로만 성적이 발표되므로 자칫 난이도 조절에 실패할 경우 특정 등급에 학생들이 지나치게 몰리면서 변별력을 상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6월과 9월 모의평가에서 전 영역에 걸쳐 등급이 대체로 고른 분포를 보이면서 이러한 우려는 어느 정도 해소됐고 이번 본 수능 역시 영역별로 까다로운 문항이 적절히 배치돼 변별력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입시기관들 역시 특정 등급에 동점자가 몰리면서 바로 아래 등급이 비는 현상(등급 블랭크)은 나타나지 않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문제는 수리 가형이다. 올해 수리 가형이 지나치게 쉽게 출제됐다는 분석과 함께 가채점 결과 실제 학생들의 점수가 상당히 높게 나온 것으로 나타나 수리 가형의 1등급 구분점수가 지난해보다 대폭 오를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고 있다.
한 입시기관은 수리 가형의 1등급 구분점수가 수능이 실시된 이래 처음으로 100점 만점이 나올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기도 했다.
실제 수리 가형의 1등급 구분점수가 100점 만점이 나온다면 변별력 실패 논란과 함께 학생들의 혼란도 그만큼 가중될 것으로 보인다.
동점자 속출로 인해 1등급을 받는 학생 비율이 기준치인 4%를 훨씬 넘어설 수 있는데다 실수로 단 1개의 문제라도 틀리면 바로 2등급으로 내려가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초래되기 때문이다.
◇ 등급제 어떻게 만들어졌나 = 수능 등급제는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로 대입제도 개선안을 준비해온 교육혁신위원회가 '학생부 비중 강화, 수능 비중 약화'를 골자로 한 2008학년도 대입제도 개선안을 내놓으면서 도입이 결정됐다.
최근 국정브리핑이 발간한 '실록 교육정책사'에 따르면 당시 혁신위의 궁극 목표는 '공교육 정상화, 대학서열화 해체, 수능 폐지'였다고 한다.
이를 위해선 고교 학생부의 영향력을 높이고 반대로 수능을 자격고사화해 영향력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게 혁신위의 판단이었다.
혁신위는 수능 등급을 5등급으로 나누거나 각 등급을 균등한 비율로 배분한 9등급으로 하자고 제안했고 교육부는 "수능 변별력을 위해서는 최상위층과 최하위층의 비율이 정규분포의 모양으로 돼 있는 9등급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노 대통령이 "수능과 내신 모두 9등급으로 바꾸는 것도 천지개벽이다. 9등급이 적당하다"고 해 9등급으로 결정됐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러한 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2008학년도 입시에서 수능은 여전히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고 있으며 특히 상위권 대학일수록 수능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어 당시 정부 발표를 믿고 입시를 준비해 온 학생, 학부모들을 허탈하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