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르, 끼르, 끼르 ~
어디선가 들려오는 귀에 익은 소리가 잠자는 나의 영혼을 깨운다. 아! 이 소리는? 마치 까마득한 우주 저편에서 나를 부르는 듯 다가오는 경쾌한 음색의 주인공은 분명 매가 틀림없다. 황조롱이 매다. 녀석이 나를 찾아 온 거야! 놀라움과 반가움에 반사적으로 눈을 뜬다. 방안은 고요하고 날은 훤하게 밝아 늦잠을 잦음을 알 수 있다.
머뭇거릴 수없는 그 순간 용수철처럼 몸을 일으킨다. 녀석을 빨리 맞이해야 한다. 그리고 녀석의 비상하는 모습을 좀 더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호기를 놓쳐서도 안 된다. 그리고 베란다를 향해 잰걸음으로 다가가 사방을 훑어본다. 예상은 하였지만 역시나 매는 보이지 않는다. 다시 한 번 반대편 창문가로 달려가 아예 머리를 내어 밀고 이리 저리 살펴보지만 녀석의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는다. 공허한 마음에 밖을 바라보니 아침 햇살이 눈부신 창밖엔 성큼 가을이 다가와 있었다. 녀석을 만나지 못한 아쉬움이 크지만 이내 허탈한 마음을 진정시키려 한다. 부엌에는 나의 이러한 괴이한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사람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일요일의 느지막한 아침상을 차리고 있다.
황조롱이 매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몇 년 전 내가 이곳 녹번동 아파트에 이사 오면서 부터였다. 이곳은 수려한 북한산자락이 가지처럼 길게 뻗어 내려와 머문 언덕위에 아파트가 우뚝 서 있고, 도로하나 건너 백련산이 코 닿을 듯 맞닿아 있다. 그래서 나처럼 아파트 고층에 사는 사람일수록 뒤로는 병풍같은 북한산의 그 위용을 느끼면서, 앞으로는 백련산을 마치 자기 집 정원처럼 바라다보며 살고 있는 것이 어쩌면 행운이라면 행운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인연 덕분에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사계절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순간순간 함께 호흡하며 살고 있다. 봄의 전령 진달래, 가을 억새, 눈, 비 오는 날의 서정과 해질 녘의 낙조를 거실에서 즐길 수 있다는 것이 어찌 도심에서 쉽게 누릴 수 있는 일이였던가? 때로는 아파트 창문 가까이 무리지어 지나가는 철새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행운도 가끔 맛볼 때가 있다. 늦은 여름 날 오후에는 아파트 키만큼 높이 뜬 고추잠자리가 우리 집 거실을 훔쳐보듯 날고, 이른 아침 한 쌍의 왜가리는 어디론가 분주히 날아간다. 그런데 오늘, 비록 조우는 없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황조롱이매도 이곳을 지나가며 그들의 존재를 우리에게 알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곳에 이사 와서 숲과 가까이 지내다보니, 예전엔 소홀이 지나쳤던 자연현상들이 요모조모 소중히 다가온다. 그리고 또 하나의 다른 세계를 만난 듯 가슴 뿌듯하다. 그래서 자연과 교감하려 더욱 산을 자주 찾는다. 산은 가지만 본격적인 등산이라고 할 수는 없다. 주로 앞산과 뒷산을 산보하듯 그냥 오르는 편이다. 그곳에 가면 요정과도 같은 순수한 영혼들을 도처에서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산 정상부근에서 황조롱이 매를 만날 수 있다는 즐거움이 나를 더욱 흥분시킨다. 그래서 산을 오를 때면 늘 가슴이 설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백련산 산중턱쯤에 다 닿으면 정상으로 향하는 주등산로가 있고 그 옆으로는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작은 숲속 길이 있는데, 나는 곧장 정상으로 가는 길보다 숲속의 작은 오솔길을 돌아 정상에 오르는 것을 좋아한다. 노란 숲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나있습니다 이곳에오면 프로스트의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 떠오른다. 두 갈래 길에 서서 숲속으로 나있는 작은 길을 보면 왠지 미지의 세계가 펼쳐질 것 같은 기운이 감돈다. 황토색 짙은 길 입구 모퉁이에는 철지난 낙엽들이 흩어져 쌓여있고, 하늘을 가릴 정도로 잎이 무성한 갈참나무숲길을 지나면 야생초가 흐드러지게 자라는 초원지대가 넓게 펼쳐진다. 그 곳엔 흰 꽃, 노랑, 붉은 꽃들로 인하여 갑자기 사방이 환하게 밝아진다. 봄, 여름, 가을, 계절마다 갖가지 피는 꽃이 다르고, 하나같이 청순해 보이는 야생화의 서식지에서 나는 멍하니 발길을 멈추기도 한다. 저만치 은사시나무의 잎사귀가 바람에 흩날리며 파르르 소리가 난다. 뒤이어 약초 향 짙은 바위틈 사이로 난 길을 돌아 드디어 정상에 도달하면, 어느새 시원한 산바람이 다가와 나그네 땀을 씻어 주고, 저만큼 높이 떠 자유로운 비상의 나래를 펴는 황조롱이를 만날 수 있는 기대감에 부풀게 된다. 이곳에 오면 마음의 평화가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낄 때가 많다.
이 곳 백련산 정상에서 황조롱이 매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새해 벽두였었다. 모처럼 눈이 탐스럽게 내려 온 산야가 은백색의 낯선 세상으로 변하고, 해도 뉘 엇 뉘 엇 서산으로 몸을 감출 무렵, 고즈넉한 저녁 숲은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그 때 산 정상에 있는 너른 바위 위를 유유히 선회하는 녀석을 보게 된 것이었다. 아! 그래 매가 틀림없어 그때 회색빛 창공에 높이 떠 큰 원을 그리듯 비행하는 녀석은 이곳이 바로 자신의 영역임을 말하려는 듯 당당하게 보였다. 매를 만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지만, 산을 오를 때부터 무언가 예감이 좋았던 것이 바로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사실 이 곳 백련산은 매들의 오랜 고향이자 그들의 서식처였었다. 아마도 매는 인간들이 살기 훨씬 이전부터 이곳 북한산과 백련산을 무대로 그 종을 연연히 이어오며, 수많은 시간 속에서 순탄치 않은 생을 살아 왔을 것이다. 사람들도 매들이 사는 이곳을 매바위골이라 부르며 매를 신성시하였던 것도 당연한 처사였으며, 왕실에서도 매를 이용한 사냥터로 이곳을 역대 왕들이 즐겨 찾았다고 하니 이 아니 역사적 숨결이 배어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 후 매바위골의 전설은 매가 없는 쓸쓸한 기억 속에서 개발의 붐을 타고 점점 더 희미하게 사라져만 갔다. 오늘날 행정구역상 응암동이라는 명맥만 유지한 채 말이다. 그런데 드디어 매가 돌아온 것이다! 귀소본능으로, 영특하게도 그들 조상들의 텃밭인 이 곳, 응암골을 잘도 찾아온 것이었다.
그 날 이후 나는 녀석을 볼 수 있는 기대감으로 매가 사는 이 산을 자주 찾게 되었고, 그 뒤에도 이곳에서 외로이 먹잇감을 찾던 녀석을 가끔 볼 수가 있었다. 여름이 오고 숲에는 먹잇감이 많아지자 매들의 활동이 더욱 분주하였다. 어떤 때는 두세 마리에서 많게는 대, 여섯 마리 까지도 떼를 지어 먹이사냥에 나서고 있었다. 아마도 새끼 매를 데리고 먹이 잡는 훈련도 할 겸, 가족나들이를 하였는가보다. 끼르, 끼르 하면서 그들만의 신호음을 보내면서 말이다.
새들의 소리도 각양각색이다. 까치소리 다르고, 뜸부기, 두견새소리 다르듯이, 매의 소리는 더욱 특징이 있다. 끼르, 끼르, 하는 그 소리가 맹금류의 왕자답게 단호하고 힘차다. 그리고 카리스마 넘치는 그 소리는 숲속으로 빠르게 전달되어 숲에 사는 먹잇감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몸을 웅크리는 모습이 금방 머릿속에 그려지고도 남는다. 나는 솔직히 매의 소리를 알게 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몇 해 전 북한산을 등반하다 문수봉 부근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곁에 있던 등산객중 한 사람이 때마침 암벽 틈새에서 새어나오는 새끼 매의 울음소리를 듣고서는 나에게 매 소리가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해 주었었다. 그때의 새끼 매 소리도 지금처럼 끼르, 끼르 하였던 거 같다. 난 그때, 매의 소리를 알게 해준 그 사람을 존경스런 눈으로 바라보았었다. 저 분은 어찌하여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매의 소리를 알아듣는가? 그래서 나도 그 소리를 기억하려고 애를 쓴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아 매에 대한 나의 기억은 차츰 잊혀져갔다. 그것이 인연이라면 인연이 되었을까? 그러던 어느 날 홀연히 매가 내 곁으로 다가왔고, 그날 이후 나는 녀석을 만나는 즐거움에 흠뻑 빠져있는 것이다. 어떤 날은 산위에 올랐건만 혹시라도 기대했던 녀석이 보이지 않을 때면, 왠지 허전하고 서운한 감정을 억누를 수 없어 내 마음 만큼이나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안고 하산하기도 하였다. 가끔 산을 오르지 못하는 날엔 산 아래 먼발치에서나마 녀석을 볼 수 있을까 먼 산정을 바라보곤 한다.
꿈을 꾸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였던가? 내 마음이 녀석에 대한 생각으로 넘쳐나고 어느 듯 애틋한 정으로 쌓여갈 무렵, 콧대 높고 도도한 녀석도 서서히 나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한 번은 정상에서 선회하는 녀석을 망원경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그 순간 나와 녀석의 눈이 렌즈 속에서 그만 마주쳐 버렸다. 순간 서로가 감전된 듯 나도 놀라고 녀석도 놀란 듯, 녀석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한참동안 공중에서 정지한 채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 것은 녀석과 눈이 마주치고 난 며칠 후 쯤 이었을 것이다. 그 날도 오늘처럼 일요일이었는데, 느지막하게 거실에 나온 나는 웬 검고 낯선 물체가 우리 집 베란다창가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랬다. 가만히 보니 바로 그 녀석이었다. 황조롱이 매였다. 녀석은 앞산 쪽을 바라보며 부리로 자기 몸의 털을 부비기도 하면서 쫑긋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맹금류의 예의 그 날카로운 발톱은 알루미늄 화분대를 움켜잡은 채, 매서운 눈으로 사방을 주시하고 있는 자태가 여간 늠름하게 보이지가 않았다. 그리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이쪽저쪽으로 발을 옮기면서 뒤뚱거리는 모습이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 주려는 듯하였다. 저 몸짓은 무엇을 말함일까? 나에 대한 배려일까? 자기를 알아주는 한 인간에게 보내는 감사의 메시지일까? 가까이에서 보는 녀석의 모습은 생각보다 키도 크고 무게도 제법 나가는 듯하였다. 머리와 날개는 잿빛이었지만 목과 배 쪽은 황갈색의 귀티 나는 모습이 정말 멋스러웠다. 나는 낮은 목소리로 살금살금 집사람을 나오게 한 후, 거실에 앉아 녀석이 날아갈 때까지 숨죽이며 녀석의 행동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었다. 그리고 며칠 후, 또 한 차례 더 우리 집에 찾아온 녀석을 직장에 있는 나에게 집사람이 속삭이듯 알려왔었다. 그러던 녀석이 웬일인지 한동안 모습을 나타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녀석이 나의 단잠을 깨우며 녀석의 건재함을 알리려 나에게 날아온 것이다.
어둠이 내리기시작하면 새들은 숲으로 잠행한다. 숲은 모든 생명체를 포용한다. 그 속에는 온갖 새들과 수많은 곤충들 그리고 넉넉한 식물들이 함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아주 특별한 세계가 연출되는 곳이었다. 황조롱이 매와 인연을 맺은 덕분으로 숲의 세계를 좀 더 알게 된 것도 나에겐 큰 보람이었다. 매들이 돌아왔다는 것은 매가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신호이며, 그것은 우리의 자연 생태계가 예전처럼 빠르게 회복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하다. 오늘 아침, 우리 아파트 위를 날아간 황조롱이 매들은 백련산에서 먹잇감을 사냥하고 그들의 보금자리가 있는 문수봉 암벽으로 날아가면서, 즐거움과 기쁨의 몸짓으로 끼르, 끼르를 연발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그곳에는 지금도 어미를 기다리는 어린 새끼매가 입을 벌리고 끼르, 끼르 하고 있을 것만 같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