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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⑪ 미래를 살다간 앞선 지식인, 다산(茶山)

다산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년) 음력 6월 16일 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현마을에서 아버지 정재원(丁載遠)과 고산 윤선도(尹善道)의 후손인 어머니 해남 윤씨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1836년(헌종 2년) 음력 2월 22일 마현에서 서거했다. 어릴 때의 이름은 귀농(歸農)이며, 15세에 관례를 치르고 받은 이름인 관명이 약용(若鏞)이다. 호(號)로는 삼미자(三眉子), 다산(茶山), 사암(俟菴) 등이 있으며, 당호(堂號)는 직접 여유당(與猶堂)이라 했다.


기존 성리학적 세계관과 다른 ‘다산학’ 세워
‘경세유표’ 등 국가경영실용서 출간에도 앞장




18년 유배기간 저작활동에 몰두

다산의 75년간의 생애는 네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1789년 그의 나이 28세에 첫 벼슬을 하기 이전까지의 수학 시기와 1800년 39세까지의 관직 생활 시기, 1818년 57세까지 18년간의 유배 생활 시기, 그리고 1836년 서거하기까지의 마현 귀향 시기다. 이것은 사상적 변화의 구분이기도 하며 그의 인생 자체의 부침의 구분이기도 하다.

수학 시절의 다산은 남인 계열인 가문의 영향과 천주학에 깊게 연루되어 있는 인척들의 영향으로 해서, 성호 이익의 실학을 접했다. 성호를 그의 사상의 지표로 삼을 정도로 이에 몰두하기도 했으며 이승훈과 이벽을 통해 서양의 과학 서적과 천주학 교리서 등을 얻어 보고 이에 쏠리기도 했다.

28세에 문과에 급제하면서 벼슬길에 오른 다산은 여러 관직을 역임했는데, 이 시기에 정조의 명을 받아 한강의 배다리를 설계했으며 수원 화성의 설계를 맡으면서 거중기, 활차(滑車) 등의 기계를 제작해 직접 건설에 이용했다. 탁월한 재주와 정조의 총애를 받고 경기 암행어사까지 지냈으나 1795년 청나라 선교사인 주문모(周文謨)의 밀입국 사건에 연루되어 그를 모함하는 노론과 소론의 일부 반대파에 의해 지방관으로 좌천되기도 하다가 1800년 정조가 승하한 뒤 천주교도라는 죄명으로 유배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그는 이상주의적이고 급진적이었으며 주자학에 대한 깊은 회의와 서학에 대한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8년간의 유배 시기는 저작 활동의 절정기였다. 이때에 비로소 경학 부분에서 사서(四書)에 대한 주석서를 비롯한 커다란 성과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주로 주희의 성리학적 세계관을 극복, 지양하고 새로운 세계관을 도출시킨 시기였다. 이 시기는 개혁의 주체와 방법 및 그 철학적 원리까지도 포함한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대 저작이 이루어진 사상의 완숙기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그의 사상을 ‘다산학(茶山學)’이라는 이름으로 규정할 때, 그 다산학을 이루는 대부분의 저작이 이 시기에 저술되었다. 주희 성리학과 구별되는 다산실학의 대표적인 차이는 경전 주석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는데, 성리학에서는 4서(논어, 맹자, 대학, 중용)를 중시하여 우주자연의 원리인 천리(天理)가 인간 본성의 원천이자 근거라는 이른바 ‘성즉리(性卽理)’를 주장하였다면, 다산학에서는 송대에 형성된 4서 체계보다는 이보다 앞서는 한대의 6경 체계를 앞세워 본원유학이라 할 수 있는 수사학(공자와 맹자의 학문)으로의 회귀를 주장하여 인간의 본성은 천리가 아니라 선을 즐기고 악을 미워하는 기호(嗜好; 경향성)와 같다는 주장을 폈다.

마현 귀향 시기에는 저술 활동보다는 이전 저작에 대한 개정 증보 작업에 치중했으며, 당색을 가리지 않고 당대 거유들과 서신 교환이나 왕래를 통해 학술토론을 자주 했다. 또한 많은 사람들에 대한 묘지명을 기록해 줌으로써, 그들의 삶에 대한 진면목을 후세에 알리고 억울함을 달래주고자 했다.

1836년 회혼일(결혼 60주년 기념일)에 본인이 태어난 곳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으며, 그의 유언에 따라 여유당 뒷동산에 안장됐다. 그 후 1883년 고종의 지시로 다산의 연구산물 등이 모아져 여유당전서로 간행되었으며, 1910년 문도공(文度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리고 일제시기 1936년부터 국민성금으로 위당 정인보 등이 주도하여 ‘여유당전서’를 간행했다.

새로운 성리학적 세계관 제시
다산의 사상은 주희(1130~1200) 성리학(性理學)과 아주 많은 차이를 보인다. 다산은 성리학의 핵심인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뿐만 아니라 ‘성즉리(性卽理)’라는 명제를 부정한다. 다산은 성리학의 핵심 용어인 리(理, 추상적 원리)가 스스로는 절대로 존재할 수 없는 것, 즉 반드시 기(氣, 구체적 세계)라는 존재에 의해서만 드러날 수 있는 속성이며, 존재의 근거가 되는 본질로서의 궁극적 실체가 아니라고 하여 성리학의 기본적 논리를 반박했다.

그것은 다산이 존재(인간 및 자연) 속에 그 존재의 길을 결정해 주는 본질, 즉 본성으로 말하자면 오상(五常)이 미리부터 부여된 것이 아니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도덕이나 인의 등은 결과 개념이며 가변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다. 선험적이고 본질주의적인 그 어떤 것도 다산에게는 인정되지 않는다. 인의도덕 등은 선험적으로 주어지거나 사물의 본질로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도덕과 인의가 본질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추상(虛)의 영역에서 구체적(實) 사물을 제재한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표면적으로 눈앞에 드러난 인간의 기호만을 살펴보더라도 인간은 낙선치악(樂善恥惡)할 수 있는 경향성을 이미 갖추고 있다. 사람의 마음은 선을 행하면 기쁨으로 충만하여 흐뭇하고 악을 행하면 불만스럽다. 또한 선한 일을 행하지 못했지만 사람들이 자기를 선하다고 칭찬하면 기뻐하고, 아무런 악한 행위를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나를 악하다고 비방하면 분노하게 된다. 이러한 마음의 행태를 살펴보면, 모든 사람이 선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러워하는 어떤 경향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바로 이것을 통해 기호(嗜好, 경향성)의 성을 눈앞에서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다산은 인간의 도덕적 본성을 논하면서 결정된 것, 운명적인 것, 피할 수 없는 것 등의 관념을 피하고 규정되지 않는 개념의 자유를 구가했다.



경전 통해 ‘수기치인’ 실현 추구
다산학은 일반적으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으로 정의되며, 자기수양과 그것의 외적 실천을 이론의 두 기둥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수양론적 관점은 주로 4서(四書)의 주석에 집중되어 있지만, 그가 4서뿐만 아니라 6경에까지 주석을 낸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송대 이후 중시된 도학(道學) 텍스트인 4서를 넘어 원시유학 전적인 6경에로 관심을 넓혀간 것은 그의 세계관이 성리학적 체계 속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다산은 자신의 저작 중에서 ‘주역사전’과 ‘상례사전’을 최대의 역작으로 여겼는데, 역(易)과 예(禮)를 일관하려는 그의 경학 태도에서 우리는 그가 지향한 세계관의 일단을 접할 수 있다. 다산이 이해하는 ‘주역’은 일반적인 역학자들(특히 성리학자)의 말처럼, 하늘의 이치와 인간의 윤리가 총체적으로 담겨 있는 절대 진리서가 아니라 중국 은나라 말기와 주나라 초기의 문화내용을 담고 있는 한정된 시공간의 텍스트였으며, 그 텍스트에서 상제(하느님, 최고 절대자)에 대해 경건하게 섬겼던 당대인들의 문화를 읽어낼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예서에는 당시 인간사회의 질서정연한 모습을 읽어낼 수 있다고 보았다. 곧, 하느님을 경배하며 경건한 믿음의 체계를 지녔던 고대인들의 생활태도를 알기 위해서 학자들은 반드시 옛 경전을 탐독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폭넓은 사상으로 ‘실학’ 선도해
다산은 경전 주석 속에서 수많은 자연과학적 지식을 언급하면서도 그러한 지식들을 인간의 도덕질서와는 동떨어진 별개의 원리이자 법칙임을 강조했다. 다산은 분명 과학자는 아니었기에 그러한 그의 학문적 한계 내에서 그의 학문분류에 대해 유념해 볼 필요가 있다. “6경 4서는 수기(修己)에 관한 책이고, 1표 2서는 천하국가를 다스리기 위한 책이니, 이로서 본말을 모두 갖추었다.”

다산은 6경과 4서가 모두 수기에 관한 책이라고 보았다. 수기라고 하면 인간의 도덕문화를 자기 것으로 체화하여 실천하는 것인데, 육경사서는 유학에서 말하는 경전 전체를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다산은 이를 모두 수기의 학문으로 규정한 것이다. 물론 다산이 말하는 수기는 치인(治人)을 포함하고 있는 말이다. 다산이 꿈꾸었던 수사학(洙泗學, 공자와 맹자의 학문)은 곧 수기치인의 학문을 가리킨다. 따라서 1표2서, 즉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는 ‘천하국가를 위하여’ 필요한 실용서인 셈이다.

따라서 육경사서를 통한 수기(修己)는 전통적인 수기와는 그 범위와 질이 다르다. 다산이 바라본 유학의 근본정신은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히 하며 외적을 물리치고 국가의 재정을 넉넉하게 하며 학문과 무예를 잘하며 모든 분야를 담당하는 것이다.”

다산은 이와 같이 동양의 경전, 즉 6경4서를 인륜을 밝히고 또 그것을 실천하는 학문으로 규정하고 경세를 위한 별도의 실용서인 1표2서를 독자적으로 저술하였다. 1표2서는 세상경영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서 현대적 의미에서 본다면 경영학서, 정치학서, 법률학서라고 표현할 수 있다.

정약용의 저술 작업은 여기에서 그친 것이 아니다. 음악, 의학, 언어학, 수학 등의 단독 논문 또는 저작 등을 남김으로써 근대적 분과학문의 선도적 분류를 시도했다. 이것은 다산이 서양 학문의 영향을 받아 종래의 유학을 도덕의 학문으로 규정하고, 도덕학과는 다른 학문영역을 새롭게 자연과학적 분과화했던 것으로 말할 수 있다. 또한 천주교의 상제(하느님)를 동양경전에서 발견해 냄으로써 서양종교의 신앙이 동양의 고대에도 같은 방식으로 존재했던 것임을 증명하고, 이를 통해 동서 사상의 융합의 접점을 짚었다고 규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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