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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⑬ 해방 후 국어교육의 기틀 마련한 외솔

1970년 3월 23일 새벽 3시 35분 외솔은 77세로 위대한 생애를 마쳤다. 이에 대한민국 정부는 외솔의 공로를 치하하여 국민훈장 무궁화장에 추서하였고, 사회장으로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에 안장했다. 그리고 장춘공원 언덕 위에 외솔탑을 건립하여 공덕을 기리고 있다. 늘 겨레와 나라사랑을 자신보다 앞세웠던 외솔 최현배 선생의 공덕을 기리고, 그 외솔 정신을 이어받고 널리 펴기 위하여 많은 후학들과 ‘외솔회’가 활동하고 있다.

‘한글은 곧 우리 민족의 혼’ 민족주의적 언어관
한글문화창조·문자 과학화·한글세대 형성에 기여



주시경 선생을 통해 한글을 만나다

외솔 최현배는 1898년 10월 19일 경상남도 울산군 하상면 동리(現 울산시 중구)에서 최병수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외솔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어른들의 칭찬을 한 몸에 받았으며, 6살 때 서당에 다녔고, 울산 일신학교(現 병영초)에서 신식 교육을 받았다.

일신학교를 졸업한 후 외솔은 혼자 경성에 올라와 한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시험을 봤다. 전국에서 75명만 뽑는 수제들의 학교에 합격했지만 불행하게도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나라를 일제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따라서 학교 이름도 경성고등보통학교로 바뀌고 교장도 일본인으로 바뀌었다.

나라 잃은 슬픔과 울분에 방황하던 외솔은 김두봉의 안내로 한힌샘 주시경 선생을 만났다. 상동교회에서 열린 조선어 강습에서 주시경 선생을 처음으로 만나는 것이다.

상동교회는 당시 전덕기 목사가 담임목사였는데 독립운동의 본산지로서 많은 애국지사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여기에서 외솔은 주시경 선생을 통하여 ‘한글’과 ‘나라사랑’이라는 두 주제를 만난다.

이로서 주시경 선생은 외솔의 연원한 스승이 됐고, 국어학자와 조국의 독립이라는 애국지사의 길을 걷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경성고보 3학년 때, 일본인 담임 다까하시(高橋亨)가 외솔을 불러 세우고, “대종교에 다니는 것은 좋지 못하니 그만두라”고 일렀다. 그래도 외솔은 계속 대종교에 다니면서 민족혼을 일깨웠다.

그리고 상동교회 국어강습소가 조선어강습원으로 확대 개편되자 다시 입학하여 주시경 선생의 가르침을 2년 동안 더 받고 1913년 3월에 고등과 제1회로 졸업하였다. 조선어강습원의 졸업 성적도 99.5점이라는 아주 뛰어난 점수였다. 외솔은 주시경 선생의 학문만이 아니라 민족사상을 철저히 물려받았다. ‘조선어는 곧 조선민족의 혼’이라는 민족주의적 언어관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페스탈로치 교육 사상 처음 들여와
외솔은 경성고보 졸업과 함께 유일하게 유학생으로 뽑혀, 1915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1919년에 졸업했으며, 동시에 중등학교 교원 자격증을 받았다.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에서 수신·교육·일어·한문·법제·경제 과목의 교원 면허증을 얻고 귀국했다. 여기서 외솔은 페스탈로치 교육을 받아들여 이를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했다.

외솔은 병을 핑계로 일제의 교원이 되길 거부하고 고향 울산에서 우리의 물건을 값싸게 사고파는 공동상회를 주민들과 함께 설립, 운영했다. 고향의 순박한 이웃들에 파묻혀 민족혼을 일깨우던 외솔은 부산의 사립 동래고보의 초빙을 받고 1920년부터 두 해 동안 이곳에서 조선어 독본과 발본을 가르쳤다.

그리고 좀 더 배우는 것이 일본을 이기는 길이라는 일념으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1922년에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에서 공부하고, 1925년 동대학원에서 1년간 수업했다.

일본유학 뒤 돌아와 1926년 4월부터 1938년 9월까지 연희전문학교 및 이화전문학교 교수로 근무하면서 우리말과 글의 과학적인 연구에 몰두했다.

나라를 잃고 방황하던 조선 사람들에게 1926년에 66회에 걸쳐 ‘조선민족 갱생의 도’를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1930년 책으로 펴내어 민족의 삶을 위한 자각의 필요성을 부르짖었다.

외솔은 나라를 잃은 원인을 찾아 고치고, 새로운 정신을 갖추어야만 진정한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를 극복해야 일제의 말살 정책에서 민족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외솔은 이 책에서 민족이 중병과 쇠약증에 걸려 있음을 진단하고, 그 결과는 ‘의지의 약함, 용기의 없음, 활동성의 모자람, 신념의 부족’으로 나타남을 지적했다.

그 치유 방법으로 ‘도덕 경장, 경제 진흥, 생활 방식 개선, 민족 고유문화의 떨침’ 등을 들었다. 그리고 우리 말·글의 연구와 교육만이 우리 민족을 되살리는 기본 방법이라고 역설했다.



국어학사 집대성한 ‘한글갈’
외솔은 1926년에 연희전문학교(現 연세대)의 교수가 됐다. 그는 교수로서 연구하고 교육하는 것은 물론이고, 독립 항쟁과 민족 운동에도 가담했으며, 특히 조선어연구회(現 한글학회)의 주역으로 적극 활동했다.

광복 후에는 문교부 편수국장을 맡아 각급학교 교과서를 편찬․간행하는 일에 정열을 쏟았다. 국어와 셈본을 비롯하여 역사, 생물, 음악 등의 학술 용어를 한글로 고치고 다듬어서 편찬하는 공로를 세웠다.

‘흥업구락부’는 1924년에 결성된, 기독교 장신을 바탕으로 애국 사상을 계몽하고 실력을 기르는 운동을 하는 단체였다. 이 단체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독립 운동가들을 돕고, 국내에서도 강한 독립운동을 펴는 등의 큰 역할을 했다.

일본제국은 1938년 ‘흥업구락부’를 반제국적인 단체로 규정하고 관계자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했다. 이때에 외솔도 일본 경찰에 검거돼 서대문 경찰서에서 석 달 동안 악독한 옥고를 겪었으며, 연희전문하교 교수직에서도 강제 퇴직을 당했다.

그러나 외솔은 이 혹독한 탄압에 굴하지 않고 이 기간에 한글에 관한 모든 자료를 모아서 국어학사의 금자탑인 ‘한글갈’을 지었다. 우리의 지식과 지혜를 후손들에게 물려주어 겨레를 독립시키자는 야겠다는 생각으로 지은 책이 ‘한글갈’이다.

1929년 10월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해 ‘우리말 큰 사전’을 만들려고 했다. 일제는 이에 관련된 108명 모두가 민족주의 사상을 지녔다고 판단하여, 이 모임을 강제로 해산하기 위한 구실을 찾기 시작했다.

그 회원들은 사전 출판을 서둘러 1942년 4월 그 일부를 대동출판사에 넘겨 인쇄하기 시작했다. 이를 막기 위하여 일제는 ‘조선어학회 수난사건’을 조작하고, 조선어학회 간부를 비롯한 사전 편찬과 관련이 있는 모든 이들을 검거했다.

홍원경찰서와 함흥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자행했다. 마침내 함경도 함흥 재판소에서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은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이라는 최종 판결을 내려 11인은 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이윤재 선생과 한징 선생은 잔악한 고문으로 옥사했다. 외솔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1942년 10월 1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광복 때까지 3년간 복역하는 옥고를 치루고, 1945년 8월 17일 함흥감옥에서 출옥했다.

교과서 한글 가로쓰기 체제 확립
외솔은 우리말과 글의 이론적인 연구에 그치지 않고 국어운동에서도 언제나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한글전용촉진회 위원장,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대표 등을 맡으면서 한자배격과 한글전용운동을 앞장서서 전개하고 일본어 잔재를 몰아내기 위한 우리말 도로 찾기 운동도 이끌었다. 50년대 초 교육부 편수국장으로 재직 중 많은 논란 속에서도 교과서의 한글 가로쓰기 체제를 확립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외솔의 업적이다.

‘글자의 혁명’, ‘우리말 존중의 근본 뜻’, ‘우리말본’, ‘나라 사랑의 길’, ‘민주주의와 국민도덕’, ‘나라 건지는 교육’과 같은 20여권의 저서와 100여 편의 논문을 통한 끊임없는 창의적 연구와 우리말 글 펴기에 진력함으로써 한글문화창조와 문자의 과학화와 한글세대 형성에 앞장 서는 등, 평생 동안 겨레와 나라사랑의 소신을 굽힘없이 펼쳤다.

이 가운데 1937년 완간된 ‘우리말본’은 주시경의 우리말 문법연구 성과를 계승·발전시켜 집대성한 우리말 문법서의 고전으로 ‘소리갈(音聲學)·씨갈(品詞論)·월갈(文章論)’의 3부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리갈에서는 음성기관을 숨 쉬는 데, 소리 내는 데, 소리 고르는 데의 3부분으로 나누어 그 기관들의 구조와 작용을 설명했으며, 소리는 낱소리와 이은소리로 갈라 다뤘다.

씨갈에서는 국어의 씨(품사)를 임자씨 등 10씨로 가르고, 뜻·갈래·기능·특징·변화·끝바꿈(활용) 등에 대하여 설명했다.

월갈에서는 월 소재의 뜻과 갈래·낱말·마디·이은말, 성분의 종별·성립·배열·생략, 월의 갈래·구두점 사용법 등에 관하여 풍부한 용례로써 다뤘다.

이 책은 순수한 한국어 용어를 사용하여 씨가름의 독창적인 개발로 한국의 국어학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으며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문법 규범은 거의 외솔의 말본체계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해방 뒤 쓴 ‘한글의 투쟁’이나 유고집 ‘한글만 쓰기의 주장’은 한글전용과 풀어쓰기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해 한글전용운동의 지침서가 됐다. <끝>

본지와 한국교육방송공사가 공동 기획한 ‘겨레의 스승’이 외솔 최현배를 끝으로 특집을 마칩니다. ‘겨레의 스승’은 우리 역사 속에서 스승과 교육자의 귀감이 될 인물을 뽑아 그의 사상과 교육자로서의 사표를 집중소개함으로써 스승상을 되새기고, 스승 존경 풍토를 조성하고자 기획됐습니다. 지난 1년간 소개된 12명의 ‘겨레의 스승’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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