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래야, 도시락 다 됐다."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달래는 방을 나옵니다. 식탁 위에 된장국이 보글보글 끓고 있습니다. "엄만 또 된장국이야? 도시락은 햄버거지?" "그래, 햄버거다. 다른 애들은 김밥을 좋아하더구만." 엄마는 정성껏 만드신 도시락을 달래에게 건넵니다. "김밥은 왠지 촌스러워. 땡큐, 엄마." "선생님 것도 쌌으니까 갖다드리렴." "우리 쌤 거?" "얘가, 쌤이 뭐야? 그런 말이 어딨어?" "요즘엔 그게 유행인걸. 선생님 보담 쌤이 훨씬 애교있고 간편하다구여. 엄마는 알지도 못함서. 암튼 고마워여 엄마. 쌤이 좋아하실꼬야." "너 말버릇이 그게 뭐니? 선생님 앞에서도 그래?" "뭐가 어때서 그래여." "좋은 말 놔두고 그게 뭐야. 꼭 다른 나라 사람 같잖아." "이래서 세대차이가 난다니까. 다녀오겠습니다." 달래는 벌써 현관을 나서고 있습니다. 과자와 햄버거로 배가 불룩한 피카추 가방이 달래의 등에서 손을 흔듭니다. 엄마는 달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쉽니다. "인터넷이 애들 다 버려 놓는 거 아니야?" 아침 햇살이 달래의 볼 위로 뽀얗게 부서집니다. 부지런한 참새들이 벌써 아침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소풍가기에 참 좋은 날씨입니다. 달래는 날아갈 듯 가벼운 걸음으로 교문을 들어섰습니다. 운동장엔 버스가 부릉부릉 소리를 내며 아이들보다 먼저 소풍길을 서두릅니다. "제니야." 저쪽에서 단짝인 수미가 다가옵니다. 제니는 달래가 지은 자기 애칭입니다. 친한 친구들은 달래를 제니라고 불러줍니다. "수미구나, 뭐 싸왔어?" "음료수랑 과자랑, 김밥. 우리 같이 먹기다." "당연하지. 근데 난 김밥 보담 햄버거가 헐 맛있더라." "못보던 옷이네. 샀어?" 달래의 눈길이 수미의 하얀 셔츠에 머뭅니다. "삼촌이 주셨어. 대학 다니는 삼촌 말이야." "이게 무슨 무늬? 아니다, 글자 같은데? 노 룻 말 씨 미가 뭐야?" 달래는 수미의 얼굴과 글자를 번갈아 바라봅니다. "이게 옛날의 한글이래. 나랏 말쌈이 이렇게 읽는 거야. 나라의 말씀이 이런 뜻이래." "쳇, 누가 애국자 아니랄까봐 왕 잘난 척이야." "삼촌이 그러셨어. 영어나 일본어로 된 옷도 입고 다니는데 한글을 입고 다니는 건 당연하대. 그리고 우리가 우리말을 안 지키면 우리나라가 없어진대." "우리나라가 없어진다고? 그런게 어딨냐?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잘난 척이야." 하지만 달래는 슬며시 자기 셔츠를 가립니다. 사실은 달래의 셔츠에 'Have a nice day'라는 영어가 쓰여 있었거든요. 달래는 뾰로통해져 한마디 내뱉습니다. "그 옷 특이하긴 하다." 차창 밖으로 가로수가 쌩쌩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납니다. 아이들 소풍에 샘이 났나봅니다. 달래도 토라져 창 밖만 바라봅니다. "제니야 얘기좀 해. 그러고 있으니까 나도 재미없잖아. 소풍이 이게 뭐냐?" 수미는 달래가 계속 아무 말이 없자 맘에 걸립니다. "그러니까 잘난 척 좀 하지마, 알았어?" "알았어 미안. 화 풀거지?" "그래. 근데 나 이 박물관 가봤어. 소풍인데 박물관이 뭐냐? 그치?" "그러니까 현장학습이라고 하지." "너 또-?" "아냐 아냐, 네 말이 맞어. 놀이공원 같은 데로 가면 얼마나 신날까?" 어느새 아이들을 태운 버스는 박물관 입구로 들어섰습니다. "각자 질서를 지키면서 관람하세요. 우리 조상들의 생활모습에 대해서 특별히 관심을 갖고 조사하고요. 약속한 시각에 이 자리에서 모입시다. 그때는 우리 모두가 진정한 한국인이 되어 있겠지요?" "예-." 선생님 말씀에 아이들이 큰소리로 대답합니다. 그러자 역사 속에 잠들어 있던 박물관이 깨어나, 바른 자세를 하고 아이들을 기다립니다. 달래와 수미는 나란히 전시실을 관람하였습니다. 중요한 내용은 자세히 적고, 그림도 그려 넣었습니다. "이제 조사할 과제는 끝났으니까 좀 쉬자." "그래." 둘은 의자에 걸터앉아 가방에서 음료수를 꺼냅니다. "수미야, 오늘 끝나고 물고기방 갈래?" "물고기방?" "어제 채팅한 애 ID가 장군의 아들인데, 사귀재. 오늘도 채팅에서 만나기로 했어." "너 정말 채팅의 여왕답다. 엄마도 아셔?" "당연히 모르쥐이-." "근데 제니야, 저게 뭐지?" 수미가 출구쪽을 가리킵니다. "어디?" "저기 말이야. 가보자." 수미가 가리킨 곳에는 「비밀의 방」이라는 푯말이 붙어있습니다. "비밀의 방. 주의! 진짜 한국사람만 들어오세요. 이게 뭐야?" 다 읽은 수미가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우리 중에 한국사람 아닌 사람도 있나? 저번에는 이런 거 없었는데…." "들어가 보자." "어쩐지 으시시하다. 그치?" 문을 열자 좁다란 통로가 나옵니다. 안에서 "한 사람씩 들어오십시오." 라는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내가 먼저 갈꼬야." 달래가 앞장서 들어갑니다. 통로 끝에 희미한 불빛이 보입니다. 저절로 문이 닫힙니다. "왜 이렇게 어둡지? 도대체 여기서 뭘 하라는 거야. 전시된 것도 하나도 없네. 아이참. 수미는 왜 안 따라 와? 수미야! 아무도 없어요?" 그러자 다시 "조용히 하십시오." 라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흘러나옵니다. 수미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불 좀 켜줘여. 넘 어두워서 넘어지겠어여." "길을 따라 계속 가십시오." "여긴 뭘 하는 방인가여? 왜 암도 없어여? 아이고 다리 아퍼. 나가고 싶다." "그럴 순 없습니다" "왜여?" "당신은 진짜 한국 사람만 들어오라는 푯말을 못보셨습니까?" "네에? 난 한국사람에여. 진짜 한국사람이란 말에여." 달래는 힘주어 말합니다. "아닙니다. 당신은 진짜 한국사람이 아닙니다." "진짜로 한국사람 맞는데 왜 나를 가두는 거에여? 나가게 해줘여." 달래는 서서히 무서워지기 시작합니다. "여기 들어온 건 당신의 선택이니 어쩔 수 없군요. 비밀의 방에 일단 들어오면 진짜 한국사람만이 다시 나갈 수 있습니다.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이 길은 평생 걸어가도 끝이 없을 것입니다." "뭐라구여? 안돼여, 안돼. 난 한국사람이란 말에여. 울 엄마도 울 아빠도 한국사람이니까 나도 당연히 한국사람이져." "그럴까요? … 계속 걸으십시오." 달래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합니다. 발이 저절로 앞으로 나아갑니다. "난 몰라. 걷기 싫어, 걷기 싫단 말이야. 밖으로 나가게 해줘여. 쌤이랑 친구들이 걱정한단 말이에여." "걱정 마십시오. 당신은 이미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졌습니다." "그런게 어딨어여." 달래의 목소리가 절망으로 가득합니다.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선생님도 친구들도 이미 박물관을 떠났을 것입니다. "엄마 아빠도 날 잊어버리면 어떻게 하지?" 달래는 엄마 아빠가 보고싶어집니다.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 발걸음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말 쓰면 안돼요. 꼭 다른 나라 사람 같잖아.' '우리가 우리말을 안 지키면 우리 나라가 없어진대.' 엄마랑 수미의 모습이 차례로 나타났다 사라집니다. 달래는 몸을 움츠립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습니다. 달래는 무서움을 이기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 달래는 한숨을 푸욱 내쉽니다. "그러고 보니 난 얼굴만 한국사람이었어. 이럴 줄 알았으면 고운말 쓰는 건데. 외제만 좋아하고 영어 좀 잘한다고 잘난척했어. 한국 사람이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달래는 다시 노래를 흥얼거리다 그만둡니다. "내 이름도 진달래인데, 아기 진달래." 달래는 아기 진달래라고 별명을 부르며 놀리던 친구들이 생각납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냥 혼자 말한거에요." "이름이 뭐라고 하셨나요?" "진달래요. 진 달 래." "예쁜 한글 이름이군요. 그런데 당신 이름은 제니가 아니었나요?" "저는 제 이름이 촌스러웠어요. 아이들이 저를 아기 진달래라고 놀리거든요. 달래냉이라고 하는 애도 있구요. 근데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니 제 이름이 제일 예쁜 것 같아요. 앞으로는 별명 부르는 친구들을 미워하지 않을 거예요. 제 이름이 자랑스러우니까. 제가 다시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된다면…" 달래의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진짜 한국사람이 될 거예요." 달래의 발 밑으로 눈물 한 방울이 똑 떨어집니다. 그때 갑자기 밝은 빛이 달래의 얼굴로 쏟아집니다. 달래는 눈이 부셔 두 눈을 꼬옥 감았습니다. "제니야, 여기서 눈감고 뭘 해? 약속시간 다 됐는데." 눈을 떠보니 달래는 이미 밖으로 나와있습니다. 달래 앞에 수미가 웃으며 서있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내가 다시 밖으로 나왔네? 영영 못나올 줄 알았는데." "무슨 소리하는 거야?" "너 안 무서웠어?" "무섭긴, 아주 재밌었는데." "그-래? … 근데 수미야 이제부터는 제니 대신 달래라고 불러 줘. 진짜 내 이름 진달래 말이야. 아기 진달래도 괜찮아." "웬일이니. 진달래는 촌스럽다더니." 수미의 두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난 내 이름이 좋아. 참 예쁜 한글이름이잖아. 진달래, 아기 진달래. 정말 마음에 들어. 늦겠다, 어서 선생님께 가자." 달래가 수미의 손을 잡아끌며 앞장서 걸어갑니다. -끝- 전북 남원 아영초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