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은하수가 너무나 아름다운 밤에 야간학습 하는 학생 하나를 운동장 벤치로 불러냈다. 나는 그 아이와 함께 하늘의 별자리 바라보며 우주의 무한한 시간과 우리의 무상한 삶을 얘기했다. 아, 지금도 그때의 일을 나는 밤하늘의 기적이라 말하고 싶다. 그 누구와의 대화도 거부하던 그 아이, 흐느껴 울면서 내게 많은 일들을 털어놓았다."
동네에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는 주점이 하나 있다. 79년에 발표된 시인 김광규의 시를 그대로 상호로 삼은 술집인데, 거기엔 두 가지의 매력이 있다. 하나는 70년대의 향수와 낭만을 디자인했다는 점과 너무나 인간적인 가격이란 게 그렇다.
나는 동료와 그곳에 가서 진솔한 대화 나누길 좋아한다. 그 낡은 나무의자에 앉으면 벽에 걸린 옛날 교복과 옛날 포스터가 보이고 예전의 시절로 돌아가게 해준다. 언젠가 나는 그 주점의 낡은 벽에서 함민복 시인의 시를 발견했다.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긍정적인 밥’이라는 제목의 시가 가슴에 뭉클 꽂혔다.
과연 우리가 가르치는 지식은 국밥 한 그릇의 가치나 지니고 있는가. 학생의 삶을 설계 한다는 우리가 국밥보다 더 따뜻하게 아이들을 배불릴 수 있을까. 교과 지식과 다양한 경험들을 배합해 만든 ‘강의노트’가 하나의 ‘시집’이라면, 그렇다면 우리의 작품은 얼마짜리로 팔릴 것인가. 오늘날 선생이나 시인은 자본으로부터 추방당한 존재다.
어떤 선생은 말한다. 요즘 학생들은 통 공부를 안 한다고. 잠자는 녀석을 깨우면 오히려 짜증을 내고, 떠드는 녀석을 나무라면 오히려 오만상을 찌푸린다고 불만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사실 예전이라고 불량한 아이들이 없었겠는가만 요즘처럼 리콜 대상으로 넘쳐나지는 않았다. 웃어야 할지 모르지만, 주색잡기라는 말은 이제 애들도 해당되는 말이 되어버렸다. 이성을 날카롭게 벼려야 할 나이에 우리의 아이들이 술과 연애와 게임에 빠져 지낸다는 건 참 서글픈 일 아닌가.
교실에 들어가는 것도 이제는 전쟁터에 가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떠드는 녀석의 고함소리를 제압해야 하고 죽은 듯 쓰러져 자는 녀석을 일으켜야 하며 게임하는 녀석의 스마트폰을 막아야 하는, 좀 과장된 표현이지만 리얼한 현실이다. 사실 아이들과 휴전하면 그만이겠지만 교육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쟁취하겠다고 한다면 분명 수업은 전투다.
어떤 선생은 또 말한다. 이젠 선생도 못해먹겠다고. 아, 이 말 만큼은 듣고 싶지 않은 말이다. 교단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무책임하게 내뱉는 이 말은 주변 사람의 의욕마저도 상쇄시킨다. 어쩌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치료사로서의 역할도 겸해야 할지 모른다. 적어도 아이들의 증상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진찰도 하고 처방할 줄도 아는.
사실 감당하기 힘든 부분이지만 가정이 방임하고 사회가 왜곡해 가르친 부분들을 선생이 치료해 건강하게 자라도록 도와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가정결손, 부모와의 갈등이라든가 가정폭력 또는 경제적 궁핍 등을 고민하고 있지나 않은지 또는 게임중독이나 이성에 대한 왜곡된 집착, 아니면 ADHD나 우울증과 같은 병적인 상태에 있지는 않은지 한 번쯤은 고민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언젠가 나는 장마철도 지나 은하수가 너무나 아름다운 밤에 야간학습 하는 학생 하나를 운동장 벤치로 불러낸 적이 있다. 매우 예민한 아이인데, 나는 그 아이와 함께 하늘의 별자리 바라보며 우주의 무한한 시간과 우리의 무상한 삶을 얘기했다. 아, 지금도 그때의 일을 나는 밤하늘의 기적이라 말하고 싶다. 그 누구와의 대화도 거부하던 아이, 그 아이가 흐느껴 울면서 내게 많은 비밀들을 털어놓는 것이었다. 실로 가슴 아픈 이야기, 가슴으로 남을 이해한다는 것이 어떤 것이지 그때 알았다.
요즘, 아이들에 대해 무한한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인권과 사랑을 위하는 행위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아이를 포기하는 미숙한 행위일 뿐이다. 또 매사에 불평만 늘어놓거나 짜증부터 내는 교사 역시 바람직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이다. 가급적 성숙한 교사는 엄하게 야단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엄한 가르침은 양식이 되지만 잔소리와 짜증은 독이 되기 때문이다.
한 번뿐인 인생, 우리는 교육 현장에서 시행착오나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로 하여금 감동적인 선생 하나 가슴에 간직할 기회를 주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비극인가. 땡볕으로 익어가는 노지 수박처럼 우리도 뜨거운 가슴에 단맛 담뿍 머금은 멋진 선생이 되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