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하루하루 만남 속에 산다. 그리하여 명주실처럼 엮인 인연으로 존재한다. 그 숱한 만남에는 잊지 못할 만남도 있고 지우고 싶은 만남도 있다. 누구에겐들 없으랴만 살아오면서 뒤돌아보면 스승과의 아름다운 만남 그리고 친구나 제자와의 애틋한 만남 정도는 하나씩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잊을 수 없는 스승과의 만남이 있다. 당시 그 분은 중학교 국어를 가르쳤던 분인데 나에게 인간애의 따스함을 처음 느끼게 해 준 분이다. 아마 지금 내가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사랑 운운하는 것도 그 분을 조금 흉내 낸 것이라고 하면 과언일까. 그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궁핍한 70년대까지 올라간다. 눈깔사탕만 있어도 마냥 행복했던 시절, 머리는 기계로 빡빡 깎고 얼굴엔 버짐이 피던 그 시절. 선생님은 방과 후에 나를 교무실로 불렀다. 괘도를 만들고 계셨는데 나에게 작업을 도와달라고 하셨다. 기억에도 생생한 규중칠우쟁론기! 나는 꼼꼼히 일곱 가지 그림을 괘도에 그리고 색칠했다. 선생님의 일을 돕는다는 것만으로도 설렜고, 선택 받은 것만으로 기뻤다. 괘도 작업이 끝나자 선생님은 나에게 “시간이 늦었는데 자장면 먹지 않을래?”하며 자장면 두 그릇을 전화로 주문했다. 다른
작년 여름, 막내를 데리고 가리왕산에 캠핑을 갔다. 몇 가지 필요한 물품을 챙기다 모기에 물릴 때를 대비해서 약품을 하나 샀다. 급한 마음에 점원에게 그 약을 부탁해 사긴 샀는데 왠지 좀 께름칙했다. 물파스 비슷하게 생겼지만 물파스가 아닌 짝퉁. 그러나 바르면 효과는 있겠거니 믿고 캠핑장으로 향했다. 그늘이 시원한 데크(deck)에 텐트를 치고 저녁을 지어먹는 동안 행복했다. 루소나 소로우의 행복과 조선시대 선비들의 음풍농월을 알 것만 같았다. 그러나 호사다마라던가. 날이 어두워지자 생각지 못했던 곤충들의 습격이 시작됐다. 곤충도감에 등록되지 않은 해괴한 벌레들이 막무가내로 몰려들었다. 막내도 뭐에 쏘였는지 복사뼈 근처를 긁었다. 그래서 마침 준비한 그 약을 꺼내 발랐다. 그런데 이게 웬 일! 액체로 된 약이 피부에 스미지 않고 표면장력으로 또르르 흘러내리는 게 아닌가. 나는 순간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락한 자본주의에 매번 속고 속아온 터이지만 다시 한 번 짝퉁에 당했다는 자괴감을 떨치기 힘들었다. 진짜처럼 보여 믿었건만 아무런 기능도 약효도 없는 가짜. 어찌 식·약품만 그러하랴. 교육의 수장들조차 그럴듯하게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것을! 빛 좋은 개살구
집안에 오래 전부터 기르는 화초들이 있다. 게발선인장, 로즈마리, 보춘화 등 대부분 시장이나 화원에서 구입한 값싼 품종의 화초들이다. 그 존귀한 생명들에 값어치를 따진다는 게 좀 지각없는 행위지만, 그 화초들은 5년 정도 나와 함께 호흡하고 공간을 공유하고 있다. 마르틴 부버식으로 말한다면 그들로 말미암아 내가 존재한다고나 할까. 화초와 함께 지내는 동안 더러는 죽이기도 더러는 분갈이를 하면서 생명에 대한 자잘한 감회를 느꼈다. 그 중 게발선인장은 내가 저에게 해 준 것도 없는데 믿음직하게 줄기를 벋었다. 더불어 궁금한 의혹이 새록새록 커져갔다. 그것은 남의 집 화초들은 꽃을 잘도 피우는데 저 녀석은 좀체 그런 조짐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왜 녀석은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것인가. 그랬는데 며칠 전 베란다에 머물던 녀석의 줄기에 머큐로크롬을 바른 듯 빨간 몽우리가 올라오는 게 아닌가. 나는 초록의 중심에서 어떻게 저런 핏빛이 나올까 경이로워 출산을 지켜보듯 입이 말랐다. 이렇게 꽃을 피울 수 있는 녀석이 왜 이전까지는 바보처럼 굴었을까, 생각해 보니 겨울나기가 문제였다. 작년까지만 해도 겨울이 되면 녀석을 거실에 옮겨 애지중지 따뜻하게 한 것, 그게 잘못이었다
학교 화단 울타리에 봄이 노랗게 묻어나고 있다. 어느새 4월, T.S. 엘리엇이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 역설의 시간들이다. 몽롱한 시간들을 새롭게 만들기라도 하려는 듯 한바탕 빗줄기가 지나가고 하늘도 가장 푸른빛으로 몸을 풀었다. 학교 화단을 총총거리며 몰려다니는 참새들의 소리에도 봄이 묻어있다. 쥐똥나무가 풍욕을 즐기며 일렬로 늘어서 초록을 고르는 봄! 이른 아침, 반제 저수지와 독정 저수지를 끼고 출근하다 보면 들녘엔 어느새 자란 호밀들이 푸른 몸을 일으키고 있다. 그 초록의 물결을 이랑이랑 넘다보면 농부들이 깔아놓은 까만 비닐 고랑을 만난다. 그 속에선 감자들이 꿈을 꾸며 화려한 축제를 준비하고 있을 텐데, 어쩌면 봄은 생명의 향연이다. 기다림에 지친 이들과 포기하지 않고 살아온 이들의 축제다. 머지않아 농부가 지나간 자리로 소리 없이 일어날 초록의 반란. 머잖아 그들은 세상의 소유는 인간이 아닌 초록의 것이라는 걸 주장할 것이다. 초록의 권리장전! 온몸을 초록으로 두른 그들은 육식성 동물처럼 다투지 않는다. 경계를 가르지도, 사상으로 네 편 내 편을 나누지도 않는다. 그저 스스로를 통일한다. 어쩌면 진정한 사랑은 초록이 아닐까. 평화의 진정한 문장은 초
우리를 웅크리게 했던 꽃샘추위도 봄기운에 한 풀 꺾이고 이제 완연한 봄이다. 교실 밖 창가로 차이코프스키의 뱃노래가 들리는 듯하다. 어제는 과수원 길을 느린 걸음으로 산책했다. 밭고랑엔 온몸에 푸른 색소를 갈아입는 냉이들이 한창이다. 봄의 청명함 때문일까. 문득 대청소를 하고 싶어졌다. 나는 집안 구석구석을 뒤져 시시콜콜한 것들을 버리기로 했다. 뭐가 아까워서인지 그동안 버리지 못하고 끌어안고 살아온 것들이 얼마 만큼인가! 때가 타고 낡은 문들은 새롭게 페인트칠 하고, 비가 새는 외벽을 손질하기로 했다. 페인트칠하는 분과 방수하는 분, 두 분을 모셨다. 방수하는 사람은 집의 외벽을 살피더니 이내 나가서 쓱싹 쓱싹 일을 시작했다. 둘 다 전문가여서 일하는 모습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 듬직한 모습에 나는 잠시 외출을 하고 다시 돌아왔다. 방수 기술자는 벌써 일을 끝냈는지 돌아간 뒤였다. 점심이나 대접하려고 서둘러 왔는데 아쉬웠다. 하지만 나는 이내 그에게 실망하고 말았다. 방수는 잘 해결했는지 모르지만 일을 한 흔적을 너무 흉하게 남겨놨다. 실리콘 나부랭이와 흙 묻은 발자국, 까만 방수액 등으로 외벽 언저리가 엉망이었다. ‘왜 마무리를 함부로 하고 갔을까’하는
이제 다시 3월이다. 학교마다 입학식이 끝나고 활기찬 새 학기가 되었다. 입학식을 치른 아이들과 진급한 아이들은 상기된 얼굴로 교사와 눈 맞춤하고, 교사도 아이들에게 미소를 보내면서 새 학기의 수채화가 그려진다. 3월은 늘 그렇게 새로운 인연으로 출발한다. 어찌 보면 교사와 학생의 만남은 운명적이다. 학생들은 나름대로 우리 담임선생님은 어떤 분일까 기대하고, 부모는 부모대로 우리 아이의 선생님은 어떤 분일까 궁금해 하며 아이를 챙겨 등교시킨다. 아름다운 만남을 꿈꾸는 것은 역시 교사도 마찬가지이다. 꽃봉오리가 도톰한 입술로 망울지는 3월은 이렇듯 우리를 설레게 한다. 그러나 요즘 보듯이 교사들은 학생들에 대한 기대 이상으로 우려를 하고 있다. 새롭게 만나는 학생들이 아무 문제없이 교사의 지도를 잘 따라 줄 것인가 걱정하는 것이다. 공부도 잘하고 말도 잘 듣는 착한 아이들도 다수이지만, 개중에는 공부도 않고 말도 잘 안 듣는 아이도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가정으로부터 방치되어 일탈을 일삼는 아이들이 학급에 끼어든다면 올 한 해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학교폭력이다, 인권이다 하여 교사들을 힘들게 하더라도 사실 그런 아이들은 일
방학이 끝나고 개학하면서 학교가 다시 분주해졌다. 학년 마무리 하랴 졸업식 준비하랴 바쁘다. 그러한 잠시 선생님들이 삼삼오오 모여 그간의 안부를 묻고 밀렸던 이야기들을 나눈다. 모처럼 제주도를 다녀왔다, 해외를 다녀왔다는 등 선생님의 이야기에 귀가 즐겁다. 그러나 잘 나가다가 말미에 꼭 되돌이표처럼 돌아오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학생들에 대한 우려의 소리이다. 정말 올 한 해도 무사히 아이들을 지도할 수 있을까. 아이들이 책이나 제대로 가지고 올까. 수업시간에 자는 아이들은 어떻게 깨워야 하나 등등 봇물 터지듯 나온다. 매번 이야기의 결말은 자조적이다. 어떻게 되겠지. 교육감이 저질러 놓은 일 우리가 어떻게 해. 저마다 쓴 소리를 한다. 학생부장은 또 학생폭력에 관한 공문과 연수만 늘었다며 자리를 뜬다. 언제부터 학교가 이렇게 힘들어졌을까. 정말 언제부터 아이들이 선생님의 그림자를 함부로 밟고 친구를 괴롭히는 약육강식의 사바나 초원이 되었는가. 돌아보면 불과 3년 정도 밖에 안 되는 기간에 학교가 너무도 황폐해졌다. 3년 전! 어쩌면 교육감 직선제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식상한 정치판에 대다수 교육감 후보들이 ‘진보’와 ‘민주’라는 두 글자를 표절하다시피
학생 문제가 불거지면 으레 입시교육에 따른 경쟁심 조장의 산물로 몰아붙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것은 현장을 몰라도 너무 몰라 말하는 소치이다. 학생 문제는 현장에 있는 선생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다. 아이들의 용의주도한 비행을 단지 공부만 시켜온 교육제도의 허점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문제 학생 앞에서 우리는 현재의 퇴폐적 문화, 그리고 문제 부모와 교육 관료의 안일함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을까. 예전에도 학생들의 탈선은 있어 왔다. 음주, 흡연, 폭력, 절도, 강도, 강간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범죄를 우리의 학생들도 저질러 왔다는 것, 그 통계를 공식적으로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분명 있어왔다. 학교 화장실에서부터 으슥한 공원, 상가 후미진 곳 등 다양한 공간에서 아이들의 일탈이 있어왔다. 최근 들어 그것이 불거져 표면화 되고 있을 뿐, 지금까지는 그러한 사건을 학교의 불명예라 여겨 책임자가 상급기관에 보고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해 학생들을 어리다고 해서 두둔해서는 안 된다. 현장에 근무하는 상담교사의 사례들을 들어보면 어린 아이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죄질이 나쁜 사례들을 접할 수 있다. 담임도 감당하기 어려운 아이들,
며칠 전 내린 눈으로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말 그대로 설국(雪國)이다. 수북이 눈 덮인 간이역, 여전히 눈보라는 날리고 그 쌓인 눈을 헤치며 기차는 달릴 것이다. 그 열차를 타고 한정 없이 가다보면 차창엔 그리운 이들의 모습이 어른거릴 테고, 그러다 새벽쯤이면 겨울 끝자락에 다다라 있을 것이다. 대관령을 지나 횡계에 가 보았는가. 험준한 산 하나를 넘으면 매서운 바람이 퍼덕이며 달겨드는 곳. 능선에 늘어선 나뭇가지들에 갈라지고 찢겨진 바람, 그 칼바람을 맞아 보았는가. 언젠가 횡계를 찾은 적이 있다. 영하 19도의 혹한 속에 제단 같은 덕장을 보았다. 짙푸른 동해 바다에서 올라온 명태를 선창에 하역하면 겨울이 시작되고, 아낙들의 손도 분주해진다. 명태의 배를 갈라 알을 꺼내고, 내장을 제거하여 민물에 씻는다. 그리고 덕장으로 싣고 가 즐비하게 내건다. 푸르른 하늘과 하얀 눈, 밤이면 차가운 별빛과 어둠이 전부인 고산지대. 덕장에 매달린 명태는 겨울 한철 그렇게 칼바람을 맞으며 얼고 녹다가 마침내 누런 황태가 되는 것이다. 아, 얼마나 오묘한 깨달음인가. 자신의 모든 알과 내장을 다 내어주고 시린 덕장에 올라 은빛 다비식을 치르는 명태. 아무나 황태가 되
“문제아는 느는데 대안 없이 침묵하는 학교, 그 경계에 교사가 있음을 행간이 말해준다” 이번 ‘교단 체험수기 공모’에 응모한 교사를 분석하면 다양한 프리즘으로 나타난다. 유치원 교사로부터 장학사, 대학교 교수에 이르기까지 여러 층위를 이루고 있다. 400여 편 중 초등학교 교사의 작품이 206편으로 단연 우위를 차지했고 이어 고교 105편, 중학교 61편 등의 분포를 보이고 있다. 연령층도 소재도 다양하다. 20대 초임 교사로부터 정년을 앞둔 교사까지 비교적 정상분포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일반 신춘문예와도 비슷한 양상이다. 즉, 젊은 교사들의 참신한 표현과 시각, 그리고 중년 교사들의 중후한 어조와 성찰, 원로교사의 교단회고 등이 퍼즐처럼 교단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교사와 학생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제시해주고 있다. 그러나 학교의 우수 프로그램 소개, 동아리 소개, 개인적 프로젝트 연구보고 같은 글도 있었다. 전반적으로 이들은 하나의 코드로 읽히는데, 그것은 학교생활에 부적응을 보이는 학생, 문제 학생들에 대한 것이었다. 문학은 현실을 반영한다고 할 때, 이러한 분석은 오늘날의 현상을 이해하는데 매우 흥미로운 결과로 해석된다. 즉, 갈수
조선시대 선비들이 현재의 교육을 본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진보된 교육, 희망의 교육이 활짝 꽃 피었다고 말할까. 아니면 장탄식을 하며 꾸짖음의 일갈을 할 것인가. 또 먼 훗날 우리 후손들이 현재의 교육을 본다면 뭐라고 할 것인가. 인간적 애정이 끈끈하게 묻어난 시대라고 평가할 것인가.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어진 교육을 보면서 연말연시가 심란하다. 어쩌다 교육이 이렇게 변질되었는가. 세상에는 변하지 말아야 하는 게 있는 법. 과학이나 기술은 진보해야겠지만, 윤리는 변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바로 그 윤리를 보존하는 교육의 틀이 지금 깨져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양심을 지켜내고, 선과 악을 분별해주던 교육. 그 판이 흔들리고 있다. 위엄 하나로 살아가던 이 땅의 선량한 교사는 다 어디로 갔는가. 건기가 시작된 사바나 초원, 지평선의 태양마저 물어뜯던 표범은 모두 죽었는가. 황량한 교육현장. 교사들은 그저 양지 바른 곳이나 따뜻한 곳에 모여 잡담을 한다. 커피를 마시고 소일하다가 어둠이 내리면 귀가를 서두른다. 소인은 이익에는 민첩하고 군자는 의에 민첩하다고 했던가. 혁신이다 인권이다 하여 학교가 뒤숭숭하다면 혁신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수술 집도의가
가람 이병기 시인의 체취가 묻어 있는 전주 다가산(多佳山). 그 앞을 흐르는 냇물을 보며 나는 유년을 보냈다. 그동안 세상 여행을 하면서 많은 강을 만났고 섬진강에 이르러 아, 이것이 ‘강’이로구나 생각을 했다. 그런데 황하를 본 사람은 여타의 강은 강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니 어쩌면 나는 ‘강’을 더 찾아다녀야 할는지 모른다. 추운 겨울날, 나는 나무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저들도 이제 동안거에 드는구나.’ 부질없는 나뭇잎 다 떨쳐버리고 호숫가에서 묵언수행에 드는 성자들! 오직 사람들만이 분주히 움직이며 떠들썩하게 살아가는 건가. 오늘도 사람들은 욕망의 그릇에 담긴 오욕칠정으로 몸살을 시작한다. 그리하여 늘 고요함에 머무르지 못하고 부스럭거린다. 학교와 거리에서 많은 학생을 만난다. 바다에 녹조현상이 번져가는 것처럼 어느새 아이들은 유형화된 차림을 하고 있다. 어디서 보았더라, 생각해보면 텔레비전에서 본 아이돌 가수의 모습과 닮아있다. 딱따구리처럼 머리를 꾸미고 패딩점퍼, 줄여 입은 바지에 명품 운동화. 여학생들도 뒤지지 않고 선정적이다. 선생의 모습은 어떨까. 선생도 부스럭부스럭 말한다. “이제 선생 해먹기도 힘들어. 애들이 말을 들어야지!” 틀린 말은
12월, 또다시 학년 말이 되었다. 기온 뚝 떨어진 거리에는 구세군의 자선냄비가 딸랑거리고 직장인들은 망년회 얘기로 의기투합을 한다. 학교도 기말고사가 끝나고 진학문제와 학년 마무리로 바쁘다. 그리하여 선생들은 나이스를 붙잡고 손가락이 뻐근하다. 선생은 그렇다 치고 학생들은 안녕한가. 아침에 까맣게 등교하는 학생들을 보면 꼭 무슨 콘서트의 방청객으로 오는 아이 같다. 왁자지껄 발걸음도 가볍다. 패션 가방을 매고 오는 아이, 빈손으로 오는 아이, 제각각이다. 가방을 맨 아이가 기특하다 싶어 물어보면 등을 따뜻하게 해주니까 맨단다. 그리고 가방을 매야 패션이 완성된단다. 가방 속엔 달랑 책 한두 권과 머리빗, PMP가 전부인 아이. 여학생 가방에는 BB크림과 매니큐어, 헤어 스트레이터가 눈에 띈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천만다행 슬리퍼를 신고 등교하는 아이는 줄었지만, 학생 차림이 아니다. 머리를 퍼머하거나 염색하고 쉬는 시간마다 거울 속으로 들어가려는 아이들. 교복이 아닌 패딩점퍼를 입고 멋스러워 하는 아이들. 아, 우리 선생들도 저렇게 입고 다녀볼까나. 자율이란 명분으로 일탈 한 번 누려볼까나. 학생들의 80% 정도가 이런 모습이라면 과언일까. 이제는 너 나 할
사람을 그리워 해 본 적이 있는가. 사람이 사무치게 그리워 목숨이 사위어 간 적이 있는가. 나는 절해고도(絶海孤島)에서 1년 넘게 머물며 사람을 갈망해 본 적이 있다. 파도와 바람과 갈매기 울음이 전부인 바다. 밤이 되면 악몽처럼 사람이 그리워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멀리서 어선의 통통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눈물이 났다. 물고기는 물고기끼리, 갈매기는 갈매기끼리 어울려 산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사람 냄새에 굶주린 나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젊은 시절, 끝없는 전라도 길을 여행하면서 사람을 그리워 해 본 적도 있다. 어두운 밤 산 하나를 넘으면 또 산이 가로막고. 듣는 소쩍새 소리는 무섭다기보다 차라리 반가웠다. 정말이지 아무 집이나 숙식을 청하면 하룻밤을 재워 주었고, 초로의 집주인이 정갈한 밥상을 챙겨주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스마트폰만 터치해도 아무에게나 연락할 수 있다. 그토록 바라던 사람과의 어울림이 이루어졌건만 왜 허망함이 앞서는 것인가.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면 외롭지 않을 줄 알았는데, 섣부른 판단이었다. 사람이 늘면 늘수록 역설적으로 외로움이 깊었다. 어쩌면 ‘외로움’이
지긋지긋한 수능이 끝났다. 선생한테도 학생들한테도 수능은 그동안 무거운 ‘짐’이었다. 저마다의 짐을 내려놓은 지금은 모두 허탈하다. 언젠가 TV에서 본 ‘차마고도’처럼 우리의 여정은 산맥 몇 개를 넘어온 대장정이었다. 온몸이 좀 쑤시는 시간을 묵묵히 감내해준 학생과 그 부모들이 고맙기도 하다. 등산이 그런 것처럼 우리만이 아니다. 산악인들도 가족과 헤어지는 안타까움과 설산에서 크레바스의 공포를 이겨낸 뒤 히말라야를 얻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DNA에는 오래 전부터 도전과 투쟁의 인자가 있어 온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배부르면 그만인 짐승과 사뭇 다른, 산이 있어 올라야 하는 인간만의 특징이 아닐까. 수능을 끝낸 후, 우리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선생과 부모는 또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복불복처럼 서로의 희비가 다르겠지만, 만나는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시험 잘 치렀니?” 그러면 대부분 “잘 못 봤어요”라는 대답이다. 그게 겸손한 어법이 아님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수시 모집 원서는 몇 개나 썼니?” 물으면 열 몇 장 썼다고 상기되어 웃는다. 인생의 험준한 산을 오르려면 무슨 준비를 하고 어떻게 훈련을 해야 하는지 얘기해 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