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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어 네가 살 수 있다면…

며칠 전 내린 눈으로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말 그대로 설국(雪國)이다. 수북이 눈 덮인 간이역, 여전히 눈보라는 날리고 그 쌓인 눈을 헤치며 기차는 달릴 것이다. 그 열차를 타고 한정 없이 가다보면 차창엔 그리운 이들의 모습이 어른거릴 테고, 그러다 새벽쯤이면 겨울 끝자락에 다다라 있을 것이다.

대관령을 지나 횡계에 가 보았는가. 험준한 산 하나를 넘으면 매서운 바람이 퍼덕이며 달겨드는 곳. 능선에 늘어선 나뭇가지들에 갈라지고 찢겨진 바람, 그 칼바람을 맞아 보았는가. 언젠가 횡계를 찾은 적이 있다. 영하 19도의 혹한 속에 제단 같은 덕장을 보았다. 짙푸른 동해 바다에서 올라온 명태를 선창에 하역하면 겨울이 시작되고, 아낙들의 손도 분주해진다. 명태의 배를 갈라 알을 꺼내고, 내장을 제거하여 민물에 씻는다. 그리고 덕장으로 싣고 가 즐비하게 내건다.

푸르른 하늘과 하얀 눈, 밤이면 차가운 별빛과 어둠이 전부인 고산지대. 덕장에 매달린 명태는 겨울 한철 그렇게 칼바람을 맞으며 얼고 녹다가 마침내 누런 황태가 되는 것이다. 아, 얼마나 오묘한 깨달음인가. 자신의 모든 알과 내장을 다 내어주고 시린 덕장에 올라 은빛 다비식을 치르는 명태. 아무나 황태가 되는 게 아니다. 철저히 자신을 헌신하고 혹독한 시련을 견뎌야만 황태가 되는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선생도 이제는 동안거에 든 스님처럼 지극히 겸손하고 낮은 모습으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이 그랬고, 성철 스님과 법정 스님이 그랬듯이, 우리는 좀 더 가난해 질 필요가 있다. 내면 깊숙이 도사린 욕망을 버리고, 뜨거운 심장을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나눠주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선생은 비로소 국화빛 노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선생은 스스로를 비워내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선생들이 필론의 돼지도, 배부른 돼지도 아닌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었으면 좋겠다. 절망에 빠져 방황하는 아이에겐 듬직한 언덕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도심의 골목을 방황하는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주고 안아주는 착한 선생들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 친구들을 괴롭히는 악동들을 개과천선시킬 수 있는 선생들이었으면 정말 좋겠다.

정말 새해에는 아이들이 인의예지를 바탕으로 성실히 학문을 탐구하길 소망한다. 자신의 적성을 살려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하며 부푼 꿈에 설레는 아이들이길 소망한다. 화장하고 염색하고 피어싱하며 치마를 줄여 입는 것이 젊음의 특권이 아니란 것을 알기를 소망하고, 스승을 존경하며 감사할 줄 아는 아이들이 되길 소망한다. 거짓말 하지 않고 정의롭게 행동하는 아이들이길 소망하며, 나아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하는 심정으로 친구를 아끼고 진정 사랑하는 아이들이길 소망한다. 그리하여 절망의 난간에서 눈물 흘리는 아이가 두 번 다시없기를 소망한다.

이제 학교는 서서히 신학기 준비에 들어가고 있다. 부장 보직을 정하고 담임을 배정하는 작업을 한다. 학교마다 상황이 다르겠지만, 부장 자리를 욕심내는 선생이 있고 부장 일이라면 힘들어서 안 하려 하는 선생도 있다. 담임에 대한 보람도 예전 같지 않아 담임을 피하려는 선생도 늘고 있다. 또한 성과급과 초과 수당에 미련을 두는 선생도 있다. 따라서 매년 신학기 때가 되면 인사 담당자들이 겪는 난감한 일이 믿음직한 ‘알곡’이 적다는 것, 그게 고민이다.

이제, 선생들은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새로운 다짐을 해야 할 것이다. 학급 운영에 대한 새로운 계획을 짜고 아이들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 구상해야 한다. 온 천지에 내린 하얀 눈이 세상의 아픔을 감싸듯, 아이들을 사랑으로 끌어안아야 한다. 그리고 연수다 보충 수업이다 하여 바쁠지라도 시간을 내어 대관령을 넘어 횡계에 가 보아야 할 것이다. 폭설 속에서도 하얀 눈을 입에 물고 명상에 잠긴 황태를 만나야 한다. 눈이 부시게 푸른 하늘 아래 황태와 선문답을 주고받아야 한다.

남들은 말한다. 교사는 방학이 있어 편할 거라고. 그러나 진정한 교사는 슬퍼할 겨를도 없다. 교과 수업을 위한 자료를 수집해야 하고, 학급운영에 대한 밑그림을 그려야 하며, 아이들의 신상정보도 파악해야 한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만나는 아이들은 얼마나 운명적인가! 마르틴 부버가 말한 ‘나와 너’의 진정한 관계가 아닐 수 없다. 새해에는 ‘내가 죽어 네가 살 수 있다면’을 되뇌며 맛나게 먹히는 황태가 되길 바란다. 경기 효명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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