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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으로 사랑을 꿈꾸다

오늘 내가 품은 초록의 향기를 어떤 미소로 누구에게 나눠줄까. 초록으로 충전된 나는 그저 내가 가진 사랑을 방전하고 싶다. 만나는 아무에게나 손 붙잡고 푸른 전기를 나눠주고 싶다.

학교 화단 울타리에 봄이 노랗게 묻어나고 있다. 어느새 4월, T.S. 엘리엇이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 역설의 시간들이다. 몽롱한 시간들을 새롭게 만들기라도 하려는 듯 한바탕 빗줄기가 지나가고 하늘도 가장 푸른빛으로 몸을 풀었다. 학교 화단을 총총거리며 몰려다니는 참새들의 소리에도 봄이 묻어있다. 쥐똥나무가 풍욕을 즐기며 일렬로 늘어서 초록을 고르는 봄!

이른 아침, 반제 저수지와 독정 저수지를 끼고 출근하다 보면 들녘엔 어느새 자란 호밀들이 푸른 몸을 일으키고 있다. 그 초록의 물결을 이랑이랑 넘다보면 농부들이 깔아놓은 까만 비닐 고랑을 만난다. 그 속에선 감자들이 꿈을 꾸며 화려한 축제를 준비하고 있을 텐데, 어쩌면 봄은 생명의 향연이다. 기다림에 지친 이들과 포기하지 않고 살아온 이들의 축제다.

머지않아 농부가 지나간 자리로 소리 없이 일어날 초록의 반란. 머잖아 그들은 세상의 소유는 인간이 아닌 초록의 것이라는 걸 주장할 것이다. 초록의 권리장전! 온몸을 초록으로 두른 그들은 육식성 동물처럼 다투지 않는다. 경계를 가르지도, 사상으로 네 편 내 편을 나누지도 않는다. 그저 스스로를 통일한다. 어쩌면 진정한 사랑은 초록이 아닐까. 평화의 진정한 문장은 초록이 아닐까. 초록으로 자라는 한 저들은 하나다.

오늘도 초록으로부터 푸르른 꿈 배달받으며 나는 출근을 한다. 몸이 싱그러운 바람처럼 가벼워진다. 그냥 이대로 푸르름 속으로 잠적하고 싶은 아침. 세상에 머무는 풀포기 하나 이팝나무 하나조차 새롭고 이채롭다. 오늘 내가 품은 초록의 향기를 어떤 미소로 누구에게 나눠줄까. 초록으로 충전된 나는 그저 내가 가진 사랑을 방전하고 싶다. 만나는 아무에게나 손 붙잡고 푸른 전기를 나눠주고 싶다.

교정에서 만나는 아이의 얼굴들. 그들도 초록의 세례를 받았는지 모두 민들레꽃처럼 환하다. 그들의 세포 하나하나가 싱그러운 향기를 발산한다. 아, 꽃이 따로 있으랴, 진정 보고 또 보아도 물리지 않는 저들이 내 가슴에서 피어나는 꽃인 걸! “안녕하세요, 선생님!” 외치는 저들의 목소리가 버찌씨처럼 그저 파릇하다. 분명 봄의 요괴가 우리를 홀렸나보다. 봄의 마법에 걸린 게 분명하다.

교실도 활짝 피어나고 있다. 지난주까지만 하더라도 꽃잎들을 오므리고 있던 교실. 이제는 봄의 싱그러움에 살그머니 창문도 열고 세상의 소리를 듣는다. 별로 재미날 것도 없는데 꼬맹이 숙녀들이 저들끼리 얘기하다 그저 까르르 웃는다. 웃는 하얀 치아들이 배꽃처럼 예쁘다. 초록은 그들을 예술가로 만든다. 미열처럼 벅차오르는 감정들을 다소곳 공책에 써내려간다. “친구야, 사랑해!”로 시작하는 그들의 작은 편지. 그래서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라고 했던가.

아, 지금 우주의 중심을 지나고 있는 저 아이들. 그저 신비한 별들의 숲을 지나며 꿈을 꾸는 저 아이들. 신화와 전설을 노래하며 은하수를 건너 하늘궁전을 향하는 그들. 그들은 한동안 꿈을 꾸리라. 더러는 단맛이 농익은 포도와 올리브를 따먹으며 저들끼리 스스로 자라리라.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마냥 요정들과 얘기하며 행복하리라.

어쩌면 아이들은 스스로 자란다. 견고한 꿈을 고르며 스스로 견인의 지혜에 눈뜨리라. 그리하여 나침반 없이도 하늘의 별자리를 읽고 가야할 길을 찾으리라. 더러는 사랑에 웃고 슬픔에 울기도 하리라. 어린 젖니가 있던 자리엔 하얀 송곳니가 솟아 발톱도 강철처럼 단단해져 언덕도 단숨에 오를 것을!

그리하여 밤이 되면 바위산 꼭대기에서 푸른 숨, 거친 숨소리로 포효하리라. 우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무너지는 별빛 아래에서 킬리만자로를 그리워하리라. 또 그러면서 지나온 자취를 한편의 서사시로 남기리라. 살다보면 인생이 무엇인지 알 때가 있다. 미풍에 실려 오는 흙냄새에도, 무심히 빠져나가는 시간들에 손을 털며 인생을 알 때가 있다. 인생은 그러한 것.

살다보면 부모도 떠나고 변치 말자던 친구도 떠나고, 죽고 못 산다던 연인도 떠난다. 시간의 태엽이 거의 다 풀린 그 길을 가다보면 끝에서 안다. 사는 게 무엇인지. 길이 거의 끝날 무렵에서야 안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을 열람하듯 초록이 눈을 뜨는 봄! 우리는 그저 철부지처럼 봄의 장난에 온몸을 맡겨야 한다. 아지랑이가 살그머니 뒤에서 다가와 내 눈을 가리고, 이내 깔깔거리며 “사랑해!”라고 속삭이는 시간. 오늘만큼은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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