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 끝나고 개학하면서 학교가 다시 분주해졌다. 학년 마무리 하랴 졸업식 준비하랴 바쁘다. 그러한 잠시 선생님들이 삼삼오오 모여 그간의 안부를 묻고 밀렸던 이야기들을 나눈다. 모처럼 제주도를 다녀왔다, 해외를 다녀왔다는 등 선생님의 이야기에 귀가 즐겁다.
그러나 잘 나가다가 말미에 꼭 되돌이표처럼 돌아오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학생들에 대한 우려의 소리이다. 정말 올 한 해도 무사히 아이들을 지도할 수 있을까. 아이들이 책이나 제대로 가지고 올까. 수업시간에 자는 아이들은 어떻게 깨워야 하나 등등 봇물 터지듯 나온다. 매번 이야기의 결말은 자조적이다. 어떻게 되겠지. 교육감이 저질러 놓은 일 우리가 어떻게 해. 저마다 쓴 소리를 한다. 학생부장은 또 학생폭력에 관한 공문과 연수만 늘었다며 자리를 뜬다.
언제부터 학교가 이렇게 힘들어졌을까. 정말 언제부터 아이들이 선생님의 그림자를 함부로 밟고 친구를 괴롭히는 약육강식의 사바나 초원이 되었는가. 돌아보면 불과 3년 정도 밖에 안 되는 기간에 학교가 너무도 황폐해졌다. 3년 전! 어쩌면 교육감 직선제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식상한 정치판에 대다수 교육감 후보들이 ‘진보’와 ‘민주’라는 두 글자를 표절하다시피 남용하여 반사이익을 챙기던 때. ‘무상급식’이라는 타이틀 하나만으로도 표몰이가 가능했던 걸 보면 ‘진보’의 위력은 대단했다.
암암리에 정치적인 그들. 교육을 구태의연한 보수로 매도하고 그 대안으로 진보라는 카드를 꺼낸 그들. 교육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없이, 아이들과 눈물 콧물 흘려보지 못한 가짜들이 교육감이 된 것은 실로 드라마틱하다. 결국 교육도 정치판이 되어버렸다는 얘기인데. 이제 그들이 다시 기발한 단어를 찾아냈으니 ‘인권’이라는 낱말카드가 그것이다. 그동안 학교에는 인권이 없었다는 듯 교사의 회초리마저 ‘폭력’으로 매도해 조례를 만들었다.
옛날 제대로 된 집에는 으레 매가 걸려 있었다. 아이가 잘못을 저지른 날에는 아버지가 “가서 매 가지고 오너라.” 하면 고개를 숙이고 매를 가져다 드렸고, 아버지는 자신의 살을 때리듯 종아리를 치셨다. 대략 중학교 2학년 정도까지 매를 대셨던 이 땅의 아버지들, 그래서 자식들은 삼나무처럼 반듯하게 자랐다. 그 매를 지금 생각하면 너무 부드러운 매라고 생각이 든다. 아, 그리운 사랑의 매.
언젠가 학생 하나가 담배를 피우다 적발된 적이 있었다.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어 학교에 오실 수 있는가 물었다. 잠시 후 아이 아버지가 오셨는데 신문지에 뭔가를 둘둘 말아 오셨다. 신문지를 펼치니 그 안에 회초리 세 개가 들어 있지 않은가. 아버지는 자신이 아이를 잘못 가르친 탓이라며 아이 보는 데서 종아리를 때려 달라고 양복바지를 걷었다. 생각하면 새삼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풍경! 아이도 울고 아버지와 선생도 울었던, 감동의 순간이었다.
싸리나무 회초리를 폭력의 도구라는 보는 시각은 어디서 말미암은 것인지 궁금하다. 회초리에 유죄판결을 내려버린 교실, 그 곳에 인권의 향기가 넘치기나 하는 건가. 아이러니컬하게도 교실은 무법천지가 됐다. 이상야릇한 색조 화장과 옷차림으로 등교해 수업시간엔 자고 쉬는 시간엔 카톡 하다가 교사가 나무라면 “왜 저만 갖고 그래요?” 눈 치켜뜨고 따진다. 인권교육으로 말미암아 말하기 능력이 신장된 것일까. 교사에게 한 마디도 뒤지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면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에 몸담았던 교육감은 대학 강단이나 시민단체가 어울린다. 그들이 교육계에서 이념적 포석을 두는 한 파란은 피할 수 없다. 현장 경험이 없는 외과 의사가 집도하면 위험이 따르듯 교육감 자리도 마찬가지다. 환자가 어디가 아픈지 교육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MRI를 찍고 판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일선에서 묵묵히 일하며 고뇌하는 선생들의 한숨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교육감은 실로 야전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
교육감은 전가의 보도와 같은 진보적 잣대를 거두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실제적이고도 참다운 교육적 이념을 새롭게 구상해야 한다. 그리하여 아이들 앞에서 교사를 더 이상 부끄럽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 김평엽 경기 효명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