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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의 성찰

"부드러운 아침 햇살이 낮은 각도로 책상에 누울 때,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지 못하고 노트북부터 켜고 업무포털사이트에 접속하는 각박함과 아이들을 삶의 중심에 두지 않고 그저 매너리즘에 빠진 채 교실로 향하는 나의 나무늘보 같은 심보를 반성한다."

나는 말로만 선생이었음을 고백한다. 지루한 장맛비 속에 눅눅하게 곰팡이 핀 내 마음, 무성의하게 아이들의 말과 행동을 재단하며 지내온 시간들을 반성한다. 공활한 가을하늘 아래 오솔길을 지나며 나는 지식을 빵처럼 추구해온 지난날을 반성한다.

반제 저수지를 지나고 독정 저수지를 지나 학교로 향하는 시간, 나는 물속에서 목숨 걸고 살아가는 가시납지리, 끄리, 납지리, 미꾸리, 참몰개 앞에서 안일했던 나의 태도를 반성한다.

푸른 하늘에 맞닿은 들판을 지나며 묵언 수행하는 수수밭의 진지함에 그간 주저리주저리 떠들던 얄팍한 사상을 반성하고, 잡초 같은 악착스러움도 없이 잡초를 비판한 편견을 반성한다. 차창을 열면 밀려들어오는 싱그러운 가을바람을 내 폐 속에 담으며 구차한 내 감정을 반성한다, 찌꺼기까지 헹구어 반성한다.

시내엔 촘촘한 신호등과 차량, 삶의 부대낌을 용납하지 못하고 매사 조급해하던, 남보다 앞서고자 했던 시간들을 반성한다. 생각하면 덧없는 욕망, 인색하게 남을 앞질렀던 옹졸함을 반성한다. 도심의 무성한 플라타너스들의 눈인사를 받으며 이웃을 외면한 날들을 반성한다. 나는 언제 한 번 저렇게 푸른 그림자를 드리웠던가. 내 몸속에 디스토마처럼 잠복한 이기적 유전자들을 반성한다.

아침 일찍부터 각인각색의 표정과 차림으로 재잘대며 등교하는 아이들, 스마트폰을 쥔 아이, 길게 기른 머리칼을 자랑스레 날리는 아이, 커다란 가방에 달랑 책 몇 권 넣은 아이, 슬리퍼를 신고 등교하는 아이, 치마를 짧게 줄여 매끈한 다리를 과시하는 아이, 연예인처럼 예쁘게 화장한 아이, 그들의 다양한 재능과 발랄함을 존중하지 못하고 꼬장꼬장 규범과 틀에 가두려 했던 나의 고지식을 반성한다.

교무실에서 마주치는 사랑하는 동료에게 밝은 미소를 선사하지 못한 예의 실종을 반성한다. 녹차라도 한 잔 건네며 "좋은 아침!"을 전하지 못한, 손수 창문을 열고 환기시킨 뒤 선생님들의 책상을 닦아주지 않은, 대걸레로 교무실 바닥을 청소해본 지 오래된 나는 동료들의 반짝이는 이마 앞에서 반성을 한다.

부드러운 아침 햇살이 낮은 각도로 책상에 누울 때,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지 못하고 노트북부터 켜고 업무포털사이트에 접속하는 각박함을, 아이들을 삶의 중심에 두지 않고 그저 매너리즘에 빠진 채 교재를 들고 교실로 향하는 나의 나무늘보 같은 심보를 반성한다.

시작종이 쳐도 늘 소란스러운 복도와 교실. 책상에 너부러져 잠든 아이들이 꿈속을 헤매고, 반장도 잠들어 인사도 없이 시작되는 만남의 장. 나의 문제풀이 하는 소리에 그제야 깨어나 사물함에서 책을 꺼내오는 아이들, 깨어 있어도 PMP, 스마트폰을 터치하며 삼매경에 빠진 아이들, 무언가에 빙의된 것처럼 혼미한 시선을 허공에 둔 아이들, 이들 앞에서 일방적으로 페이지를 넘기던 나의 오기(傲氣)를 반성한다.

따뜻하게 그들을 안아주지 못함을 반성한다. 저녁에 남아 함께 자장면을 시켜먹으며 이마를 맞대고 함께 고민해주지 못한 나의 인색함을 반성한다. 쉬는 시간, 아이들의 우스갯소리에 웃어주지 못하고 게임이나 족구도 함께 해주지 못한 피곤한 나의 육신을 반성한다. 그들의 아픈 상처에 눈물 흘려주지 못하고 무슨 힘으로 세상의 파도를 건너야 하는지 다리가 되어주지 못한 채 그저 업무와 시간표에만 충실하던 나의 역설적 모순을 반성한다.

교실에 떨어진 휴지나 쓰레기를 먼저 주워본 지 오래된 나, 청소시간에 아이들과 함께 청소하며 먼지 먹은 얼굴로 깔깔 웃어본 적이 드문 나, 나는 그 먼지들 속에서 나의 빗나간 결벽을 반성한다. 그러다 문득 교정이 환히 드러나 보이고 초가을의 참매미가 죽어라 나를 질타하는 이 오후, 산다고 산 게 부질없는 공염불이었음을. 내가 함부로 “나는 선생이다”라고 스스로 욕보였던 지난날을 반성한다.
김평엽 경기 효명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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