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주간 한 대학의 사범대학 교사 지망생들의 교생 실습이 있었다.
실습을 마치는 날 교생 대표는 송별 인사에서 “교사는 바람이고 학생은 풀과 같아서 풀은 바람 부는 대로 움직이는 법인데, 어설픈 바람이 되어 학생 앞에 서보니 정말 나의 길이 바로 이 길이라는 확신이 섰다.”고 말을 했다. 그들은 ‘사도의 길, 이거라면 평생을 다 바쳐 일해 볼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큰 숲은 보지 못한 채 나무 몇 그루만 보고 가는 정말 어설픈 경험이지만 의욕 넘치는 젊은 그들에게 교육의 밝은 앞날이 보인 것일까.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 교육 현장의 앞날은 그리 밝은 것만은 아니다.
신학년도가 되어 지역사회에서는 가장 학군이 좋아 학부모가 선호한다는 전형적인 도심학교로 이동했다. 그런데 학년 초 몇 주 만에 아주 사소한 일로 툭하면 학부모가 전화를 걸어 학사 일정에 시비를 걸거나 아이들 일로 항의 방문하는 풍토에 놀랐다. 그 중에 한 선생님이 댄 회초리를 구실로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학부모 때문에 학교 전체가 시끌했던 일이 있었다.
앞뒤 정황을 생략한 채 변명하듯 고해바친(?) 자식의 얘기만을 듣고 주위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생들이 보는 가운데 막무간으로 학교를 휘저었다. 우여곡절 끝에 다행히 잠잠해지긴 했지만 어쩐지 뒤 끝이 씁쓸하기만 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 학부모는 잘못을 꾸짖은 교사에게 자기 아이는 성격이 특이해서 부모가 직접 지도 할 테니 잘못한 일 있으면 자기에게 맡기라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는 집에서나 키우지 학교는 왜 보내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가 재직하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하급생 집단 구타 학생을 조사하고 지도하면서 주동 학생을 퇴학시키겠다고 했더니, 학부모가 와서는 반성은커녕 오히려 상부 기관에 ‘만약 이 학교에서 퇴학을 시키면 집단 가출을 시키던지, 음독을 권할 터이니 알아서 하라.”고 위협했다고 한다.
학창시절 우리의 엉덩이는 선생님들의 사랑(?)의 매로 성할 날이 없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우리는 물론 부모님까지 곧 머리를 숙이고 자신의 잘못을 시인했다. 체벌 옹호론자는 물론 아니지만 요즘은 가정도 사회도 사랑의 채찍이 없어 정신은 막대기처럼 야위고 몸뚱이는 비만이 되어 건전한 성장이 되지 못하고 있다. '자녀에게 회초리를 쓰지 않으면 자녀가 아비에게 회초리를 든다.'라는 속담이 무색하기만 하다.
체벌을 당한 학생이 신고하여 경찰이 학교로 진입한 일이 있었던 것은 그리 오래전 이야기가 아니다. 그 결과 교사가 학생들 앞에서 경찰에 연행되는 망국적인 광경을 우리는 보아야 했다. 시대에 뒤떨어진 얘기인지 모르겠으나 일제의 압박 하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던 학생을 쫓던 일경이 학교 안으로 피신한 학생을 더 이상 쫓지 않고 정문 앞에서 돌아갔던 일을 생각해 보자.
요즘 교육정책이나 공문 내용들을 살펴보면 소위 국민의 정부라는 지금의 교육당국이 일제 강점기보다도 교사의 권위를 더 실추시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연 그들은 아군인가 적군인가.
체벌로 버릇없는 아이를 바로잡거나 무너지는 교실과 교권이 다시 살아난다는 논리는 아니지만 학교에서의 이런 현상이 어느 특정한 곳에만 일어나는 특수한 일이 아니라 현장의 곳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학부모 그들은 자기 아이만은 교육적인 체벌도 하지마라는 현실이다. 표현은 하지 않지만 그들의 관심은 따로 있다.
자녀를 대학에 보내 놓고 나면 교육문제는 벌써 남의 얘기가 되고 하고 싶은 말을 마구 쏟아 놓는다. 각자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면 결국 내가 먼저 ‘좋은 학교’에 가야 된다는 ‘아우성’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교육열이 세계 최고라는 국가에서 극과 극이 교차하는 ‘풍요 속의 빈곤’의 모습이다.
문득 얼마 전 명예 퇴직한 노(老) 교사가 “이제는 버릇없는 아이들과 아등바등하며 수업을 하지 않아서 정말 가슴이 후련하다.”라고 한 말을 떠올렸다. 이것이 작금의 우리 교육 현주소의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지금의 이 시점에서 어떤 대책과 방향이 수립되지 않으면 우리의 교육은 갈 때까지 가는 막다른 골목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면 붕괴 된 미국이나 일본의 교육처럼 학교 안에서 교사 폭행, 마약 판매, 성폭력, 같은 30년 전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봄직 하던 사건들이 대두되기란 불을 보듯 뻔하다.
요즘 자고 나면 신문과 방송에는 교실 무너지는 소리만 신이 난 듯 전할뿐 이의 극복을 위한 대안 제시는 없고, 교육 당국은 문제의 근본을 파악하지 못한 채 이론에만 해박한 소위 교육전문가들이 탁상공론으로 여론의 눈치를 보며 교사들의 사기를 꺾는 정책만 들먹거림으로써 장래를 걱정하는 일부의 목소리마저 메아리에 그치게 하고 있으니 답답한 심정을 금할 길 없다.
작금의 시류를 보면서 자위하며 얻을 수 있는 하나의 답은『수용(受容)』아닐까. 그렇다, 오늘날 학부모와 학생들, 그리고 교육부까지도 우리에게 무조건적인 수용을 원하는 것 같다. 그렇다, 흔들면 떨어지고, 찢으면 찢기고, 밀면 굴러 넘어지자. 그래서 이 나라의 백년대계가 우리 교사들이 모든 것을 수용함으로써 이루어진다면 기꺼이 우리가 모든 상처를 감싸고 인내하자.
그리고 우리에게 수용을 요구하는 그들이 우리 교사들이 이 나라의 교육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고 있기만을 바라자. 이런 현실 속에서도 많은 교사들이 교직을 생각하기를, 우리는 결코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생업이 아니라 천직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